[정진원 365칼럼 | 노래하는 삼국유사] (23)통일신라의 세 영웅, 삼대 김흠순·김반굴·김영윤 이야기
[정진원 교수의 인문학 놀이터 이야기]
▶(22)거문고 갑을 쏘아라, 사금갑의 주인공과 그 의미 이어서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2025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2024년 1년 치 다사다난이 12월에 다 일어난 듯 나라는 계엄과 탄핵, 비행기 사고로 떠들썩하다. 12월은 서막에 불과해 이제 본격적인 전개로 새해가 왔는지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나가는 세계영향력 5위의 국민 아닌가. 이 와중에 역대 수출이 최고라 하고 지구촌 나의 친구들은 너희 나라 같은 강대국에 이런 일이 웬 말이냐고 진심으로 위로와 안부를 전한다.
나는 한류 종주국 맏형답게 의젓하게 대답을 하고 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김흠순 신라 애국 삼대처럼 우리는 이 혈통과 유전자를 이어받아 이 위기를 한 뼘 성장의 기회로 만들 거라고 확신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내가 이 나라 주인처럼 아니 주인으로서 말이다. 대한민국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우고 있는 세계 속 한류인을 우리 ‘대한국민’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흠순과 김인문에 대하여
신라에 삼대 보배가 있다. 문무왕은 김유신, 김흠순, 김인문을 일컬어 나라의 보배라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서 말하였다(公等三臣 國之寶也). 그 셋 중에 김유신과 그의 사람들을 자세히 써왔다. 이제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을 쓸 때가 왔다.
내가 하는 일은 마치 진시황제의 병마용갱에 각기 다른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옛사람과 눈을 맞추고 보듬어 숨을 불어넣는 작업 같다. 오랜 숙제처럼 김유신 가문의 이야기를 쓸 때마다 등장하던 김흠순. 그에게 늘 무대에 등장시켜야 하는데 하며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 세상은 늘 1등만 기억하는 법. 필자도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과 늘 혼동되기 일쑤였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활약으로만 고구려, 백제, 당나라를 물리치고 통일신라가 된 것으로만 기억하는 나를 비롯한 후손들에게 김흠순의 가문이야기를 할 때가 왔다.
김흠순과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이제는 알아주어야 한다. 김유신과 흠순의 외조카이기도 한 김인문. 이 둘을 쓰는 것으로 ‘노래하는 삼국유사’도 일단락을 짓기로 한다.
김흠순과 그의 아들 김반굴 그의 손자 김영윤 삼대 업적
김흠순(金欽純, 599년 ~ 680년)은 가야의 왕족 출신이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김서현의 아들이다. 무엇보다 김유신의 동생이다. 신라의 출중한 무장이자 당나라에서 활동한 정치가였다. 신라 화랑도의 19대 풍월주이며 관직은 시중에 이르렀다. 원광법사의 동생 15세 풍월주 보리공의 사위가 되어 두 딸 보단과 이단을 아내로 맞는다.
첫 부인 보단이 낳은 아들이 김반굴이다. 그 유명한 백제 멸망의 황산벌 전투에서 반굴이 불리한 전장에 뛰어들어 전사한다. 신라 승리의 결정적 역할을 한 반굴의 뒤를 이어 화랑 관창이 쐐기를 박는다. 그 반굴도 이미 아들이 있었으니 김영윤이다. 영윤은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토벌하러 갔다가 전사한다.
어쩌면 흠순이 통일 신라를 위한 공신이 되기까지 아들 반굴은 백제를 신라로 귀속시키는 역할을, 손자 영윤은 고구려를 신라로 완전히 복속시키는 완성과 마무리 작업을 매듭지어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김흠순 삼대의 노력이 형 김유신의 활약 못지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수많은 2인자와 이름 없는 무명씨들의 역사이다. 이들은 가야왕족이자 신라왕족의 최측근임에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민초라 부르는 우리는 일러 무삼하리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은 수많은 김흠순 삼대가 이룩해 냈고 지켜나갈 것이다.
장군 김흠순의 인간미
삼국사기에는 ‘흠춘(欽春)’이라고도 한다. 18세에 전방 화랑이 되어 19세 풍월주로 인덕과 신의가 깊어 크게 존경을 받았다. 화랑세기에 전쟁에 나가서는 산천초목이 떠는 영웅호걸이었지만 집안에서는 더없이 가정적으로 두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였다 전한다. 이 중 반굴은 셋째 아들로 김유신의 딸 김영광과 결혼하였다. 이 사이에 영윤이 태어났다.
문무왕 20년인 680년 2월에 아내 보단낭주와 함께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 82세, 보단이 80세였다고 한다. 이 생애를 마친 기록은 화랑세기에 외에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 중요하다.
보리공의 아들이자 처남이기도 한 20세 풍월주 예원공 기록에 따르면 흠순을 친형처럼 섬김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고 한다. 흠순에 대한 기록이 적어 화랑세기의 흠순 전후 기록이 요긴하다. 화랑세기는 여전히 위서 논란으로 나에게 주의하라는 선배 학자도 있지만 역사의 기록은 모두 중요하다. 옥석은 후대가 가려줄 것이고 최대한 가로세로를 맞추어 기록하는 것이 나의 책무이다.
백제 정복의 황산벌 전투의 김흠순과 반굴, 품일과 관창 네 부자
660년(태종무열왕) 6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품일(品日)과 함께 김유신을 도와 계백(階伯)의 백제군과 황산(黃山)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신라군은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이때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 노릇을 하자면 충(忠)만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자면 효(孝)만한 것이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목숨을 바치면 충효를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니, 반굴은 곧 적진에 뛰어들어 용맹히 싸우다가 죽었다.
이어 품일의 아들 관창(官昌)도 싸우다 죽었다. 이를 본 신라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백제 계백장군의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김흠순의 종횡무진한 전적
김흠순은 백제 정복 이후에도 백제 유민과 고구려 정복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662년(문무왕 2) 8월 백제의 남은 백성들이 내사지성(內斯只城 : 대전광역시 유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흠순은 19명의 장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663년 3월에는 천존(天存)과 함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경상남도 거창)을 공격해 빼앗고 70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이어 덕안성(德安城 : 은진)을 쳐서 1,000여 명의 반민을 토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당나라와 전쟁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하며 이미 노쇠한 형 김유신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668년 6월 고구려 정벌 때 이미 각간(角干)에 올라 있던 흠순은 김인문(金仁問)·천존·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양도(良圖)·개원(愷元)·흠돌(欽突)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형 김유신을 도와 출정하였다.
고구려 정벌 이후 신라는 부흥 운동을 꾀하는 백제·고구려의 유민을 포섭, 회유하는 한편 대당 항쟁을 도모한다. 그리하여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669년에 그는 파진찬(波珍飡)인 김양도와 같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갔다.
문무왕은 격앙된 양국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고자 그들을 파견한 것이었으나, 그가 당나라에서 어떠한 외교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670년 당나라에서 귀국했으며, 그 뒤의 기록은 없다. 김양도가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죽은 것으로 보아 고초가 컸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세상의 2인자를 위한 노래
주인공이니 괜찮아
남이야 뭐라하든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
다른 인생의 이인자도 엑스트라도
나는 괜찮아
나 오롯이 나답게 살다가 죽으리니
내 인생에 한 점 후회 없어라
형 김유신의 그늘에 가려졌다 말하지 말라
집을 지나치며 물 맛이나 보고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보다
화목한 가정 종이호랑이 아비 노릇한 아우가 부러울사
백제에 먹히느냐 마느냐 생사기로에 선 결전의 순간
내가 죽느니 아들이 명예로운 것이 나으리
자식을 앞세우는 아비의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어차피 멸망한 가야의 왕족
형제 유신과 문희 보희가 이미 신라 왕족 김춘추에게 목숨을 바쳤는데
나라고 함 몫을 마다하리
반굴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 백제를 손에 넣고
고구려를 정복하고
당나라 너마저 신라를 넘볼진대
이 몸이 죽고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나의 아들 반굴과 그 뒤를 잇는 수많은 아들들이
내 뒤를 따르리
세상은 이인자와 무명씨들의 것
기실 신라는 가야 왕족의 것
김반굴에 대하여
김흠순의 아들 김반굴(金盤屈, ?~660년)은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지만 신라의 화랑이었으며 백제 계백장군과 벌인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아버지의 나라에 충성과 부모의 효도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라는 말에 적진에 뛰어 장렬히 전사하여 신라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하였다. 그야말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화랑정신 또는 군인정신의 표본이었다. 이 공로로 급찬(級飡)에 추증되었다.
당시 자세한 상황을 보자. 계백과 5천 결사대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저지당하자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이 반굴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님께 충성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며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효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작전을 펼친 반굴은 백제군에 포위되어 결국 전사하고 부대는 전멸했다. 이를 본 김품일의 아들인 관창이 소부대를 이끌고 돌진했으나 역시 휘하 부대는 전멸하고 본인은 두 번 사로잡힌 뒤 결국 목이 잘렸다. 신라군이 이를 보고 용기백배하여 백제군은 마지막 다섯 번째 교전에서 패하며 황산벌 전투는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고 백제는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게 되었다.
이때 반굴은 이미 결혼하여 영윤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심지어 부인은 김유신의 딸 김영광이었다. 급박한 전쟁터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순간. 어떻게 해도 불리한 전세에 아버지의 결정적 용기를 주는 한 마디라면 나 또한 영예롭게 죽는 방법을 택했을 것 같다.
반굴의 노래
사나이로 태어나서 화랑정신으로 살았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할 절호의 기회
큰아버지 유신과 아버지 흠순과 나란히
신라보다 유구한 백제 계백장군과 맞서니
이 한 목숨 나라를 위해서라면
아버지형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어도 좋으리
나의 아들 영윤이 있어
내 뒤를 이으리
나의 아내 영광도 유신의 딸로
결연하리
자 내 칼을 받아랏
존경해 마지 않았던 계백장군이여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김영윤의 고구려 가잠성 전투
영윤에 대한 기록도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
사량 사람으로 아버지는 반굴 할아버지는 흠순이 아니라 흠춘각간(欽春或云欽純)이 먼저 나온다. 명예와 절개에 자부심이 대단하였는데 고구려 멸망 후 백성들이 봉기하자 신문왕의 명령으로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전장에 나갔다.
“내가 전쟁에 나가 가문과 친구들에게 결코 누가 되지 않으리.”
전쟁은 녹록지 않았다. 고구려 장수 실복은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 지점까지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적들은 마치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틀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처럼 필사적이다. 만 번 죽기로 싸워도 하루살이 목숨밖에 안 된다.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좀 물러났다가 적이 극도로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에 후퇴하려는데 유독 영윤만이 수긍하지 않고 싸우고자 하였다.
영윤이 말했다.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禮經)』에서 경계한 바이고, 전진이 있을 뿐 후퇴하지 않는 것은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대장부가 전쟁에 임해서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무리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죽었다.
신문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그의 의리와 장렬함은 기릴 만하도다.”
왕은 작위와 상을 추증하는데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김영윤
나 화랑정신 임전무퇴의 화신
반굴의 아들이로세
그 반굴의 아버지 신라장군 김흠순의 손자라네
큰할아버지는 태대각간 김유신장군
어머니는 김유신의 딸 영광부인이라네
어려서부터 옛날이야기대신 전쟁의 전설들을 듣고 자랐네
나라를 위해서라면 나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길을 가리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리
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다른 장수들처럼 느긋할 수도 있으련만
나에게는 한 번뿐인 사나이 대장부의 일기일회
어찌 놓칠 수 있으랴
가문의 영광을 지키는 길은 멀고 험해라
신라인과 가야인의 이름으로
가야 출신 흠순, 반굴, 영윤 삼대의 통일신라 수호는 어찌 보면 눈물겹기조차 하다. 삼국사기의 영윤의 기록은 가문의 무게에 짓눌린 듯이 보이기도 한다.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끊임없이 지켜내고 수호하여 통일신라를 만들어 낸 것은 신라보다 더 약해 멸망한 가야 후손의 절체절명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는지 모른다.
그 위대한 선조들의 명예를 어깨에 짊어지고 태어난 후손들은 오히려 태평성대가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영윤 이후는 기록 남아있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작금이다. 무엇보다 신라시대에는 투철한 사명감과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고 확장하려는 기개가 장한 왕족과 신하들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21세기 2025년 새해 1월은 맞이한 현재를 사는 우리는 어떠한가. 정치가와 군인들보다 훨씬 힘 있고 지혜로운 국민들이 세상을 리드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해도 될 것인가. 한류 종주국인 대한민국을 세계인이 주시하고 있다. 부디 이 비바람 끝에 훌쩍 성장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빌고 또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