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365칼럼 | 노래하는 삼국유사] (20)여인의 향기 관세음보살, 그리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성불

[정진원 교수의 인문학 놀이터 이야기]

2024-11-26     정진원 칼럼니스트

 

(19)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진성여대왕을 위하여 이어서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여인의 향기 그 너머

- 관세음보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미륵불과 무량수불이 되다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관음보살은 삼국유사에 자주 등장하는 비중 있는 배역이다.

원효에게 서답 빨래한 물을 떠주어 원효를 기겁하게 하거나 의상에게만 친견의 기회를 주기도 한다(낙산이대성). 최승로에게 젖을 먹여 살려주기도 하고(삼소관음 중생사), 희명의 딸에게 눈을 주기도 한다(분황사 천수대비). 자장도 관음보살이 기도를 들어주어 태어나게 된 인물이다. 광덕과 엄장을 성불하게 하는 것도 그들의 부인 역할을 자처하였던 관음보살이다.

그 중에서도 관음보살이 처녀로 변신, 미륵불과 무량수불이 되게 만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는 삼국유사 관세음 보살 스토리텔링의 백미라 할 만하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백월산(지금의 창원)에 사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신라식 토박이말 이름을 가졌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캐릭터대로 ‘달달박박’은 뭔가 까탈스럽고 야박한 음상으로 다가오고 ‘노힐부득’은 상대적으로 여유있고 부처의 경지에 근접한 캐릭터이다. 둘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스무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부득’은 회진암에 살고 ‘박박’은 유리광사에 살면서 처자를 데리고 와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출가의 풍속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결혼한 채 출가하고 수행하고 또 식구들과 함께 살았어도 허물이 되지 않는 세상이었던 모양이다. 계율이 문란했다기보다는 불교가 밥 먹고 잠자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효의 초개사처럼 당시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던 수많은 삼국유사 속 일화들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둘은 금빛 팔이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꿈을 똑같이 꾸고서는 더 깊은 산 속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간다. 박박스님은 북쪽 사자암에 널빤지로 방을 만들고 부득스님은 동쪽 고개에 돌무더기로 방을 만들어 살았다. 부득은 미륵부처를, 박박은 미타불을 염송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키포인트, 또한 당시 신라 불교의 잘 나가는 부처님은 이 두 부처임을 알 수 있다. 그뿐이랴.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

성덕왕 8년(709), 그렇게 3년이 될 즈음 어느 해저물녁 갓 스물되어 보이는 꽃답고 치명적 매력의(姿儀殊妙) 낭자가 나타난다. 게다가 그녀는 난초향과 사향으로 치장하고 박박의 암자로 와 시 한 수를 던진다. 난초와 사향이라니... 극과 극의 향기로 매칭한 그녀의 도발.

관세음보살 처녀의 달달박박을 향한 세레나데

갈 길 멀고 해저물어 온산이 어두우니

길은 막혀있고 저자는 멀어 사방이 아득하네

오늘 이 암자에 머물고자 하니

자비로운 스님께서는 성내지 마소서

行逢日落千山暮. 路隔城遙絶四隣.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嗔.

젊고 이쁘고 섹시한데 시로 추파까지 던지는 재색 겸비한 처녀의 유혹에 우리의 박박은 깨끗한 절을 더럽힌다며 문을 닫아 걸고 이름처럼 야박하게 내친다. 신라 사나이의 우직함이여.

관세음보살 처녀의 노힐부득을 향한 선문답과 세레나데

낭자는 부득에게 발길을 돌려 청하였다. 그녀의 방문에 부득의 수상한 거동보소. ‘그대는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디서 왔는가.’

이어지는 낭자의 대답. ‘담연과 태허가 동체이거늘 무슨 오고감이 있으리오. 다만 어진 스님의 뜻이 깊고 덕행이 높다는 소리를 듣고 보리를 이루도록 도와드리려 할 뿐이지요.’

그리고 두 배 길어진 시 한 수. 얼쑤~

해저문 깊은 산길

가도가도 사방은 막히고

대나무 소나무 그늘만 깊어

시내와 골짜기 소리만 새록새록

길잃은 게 아니어든 머물 곳을 구하는 것은

존경하는 스님 성불하시도록

원컨대 소녀의 청 들어만 주시고

어디서 온 사람인지 묻지 마시길.

日暮千山路. 行行絶四隣. 竹松陰轉邃. 溪洞響猶新. 乞宿非迷路. 尊師欲指津. 願惟從我請. 且莫問何人

노힐부득과 처녀의 하룻밤 만리장성, 미륵불 나투시다

갈수록 점입가경. 부득스님은 깊은 산골 어두운 저녁에 중생을 따르는 일이 보살행이라 생각하고 예의를 다해 암자에 머물게 하였다. 둘 중 하나다. 인적 끊긴 깊은 산골 해저물녁 치장하고 나타난 여인은 요물 아니면 범상치 않은 사건의 전조!

낭자는 염불에 열중한 부득에게 밤이 샐 무렵 설상가상 아기를 낳으려 하니 해산 준비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부득은 이에 해산 구완을 하고 낭자에게 목욕을 시키니 아연 물이 향기를 풍기며 금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낭자가 권하는 대로 부득은 그 물에 목욕까지 하고 나니.. 여기서부터는 서정주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로 시작하는 ‘신록’의 직설법이 펼쳐질 태세. 그러나 반전, 부득은 살이 금빛이 되고 미륵불의 그 모습으로 연화대에 앉는다. 그제서야 낭자는 나는 관음보살인데 스님을 도와 대보리를 이루게 한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증명법사 소임을 자청한 달달박박의 이튿날, 얼룩덜룩 아미타불

박박은 계를 범했을 부득을 조롱하러 이튿날 나타났는데, 부득이 연화대에 앉아 금빛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뿜고 있었다. 박박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였다.

박박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탄식하였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 운 좋게 부처를 만나고도 대우하지 못해 그대가 먼저 도를 이루었구려. 부디 옛정을 잊지 마시고 잘 부탁하오.”

부득이 남은 금물에 박박에게 목욕하기를 권하니 박박은 그가 염송하던 무량수불을 이루게 되었다. 무량수불은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 이야기 첫머리에 부득이 미륵불을, 박박이 미타불을 염송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라.

두 부처는 소문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에게 부처의 요지를 전하고 구름을 타고 떠났다.

그런데 깨알 같은 사족, 박박의 무량수불은 금물이 모자라 얼룩이 남았다고 전한다.

신라인 누구나 부처가 되던 시절

흔히 우리나라 불교를 통불교라 말한다. 신라의 미륵부처와 아미타부처의 사이좋은 성불, 그리고 그 부처가 되도록 주관하는 인물이 부처의 협시보살로 등장하는 관세음 보살이라는 점이 퍽 흥미롭다.

신라에서는 불보살과 중생이 이렇게 차별 없이 서로서로 언제든 역할과 위상을 자유자재로 바꾸어 성불을 돕는 그야말로 불국토였나보다.

천변만화로 화현하는 관음보살 중에서도 신라 가시내의 치명적 매력을 품고 나타난 이 이야기에서 서정주의 신록에 ‘사랑’ 대신 ‘부처’를 놓고 읽어 보면 미당의 신라초 메타포에 새삼 공감할 것이다.

신록/서정주

어이 할거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 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나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나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폴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나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