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서울시극단 고선웅 연출의 '퉁소소리'...시공 넘나든 조선 시대의 대서사시

- 조선시대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이별과 극적 재회 그린 대서사극 - 조선시대 조위한 고소설 ‘최척전(傳)’ 원작 - 상상 뛰어넘은 탈주극 완성...고선웅 연출의 힘 - '관록' 이호재 배우 비롯, 박영민 정새별 등 호연 빛나

2024-11-1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고선웅 연출의 홈런이 터졌다!

이호재 배우의 캐스팅은 신(神)의 한 수, 신예 박영민은 숨은 보석이었고, 정새별은 새처럼 날아올랐다. 

서울시극단이 11월 11~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하는 고선웅 작, 연출의 '퉁소소리'는 소재도 우리 옛 소설에서 발굴해 특이했지만, 고선웅이라는 특별한 연출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시공을 넘나든 조선(朝鮮)시대의 대서사시이자 ‘블록버스터 로드 씨어터’(극단측 표현)였다.

고선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조씨 고아-복수의 씨앗'은 원전이 중국이지만, 이번 작품 '퉁소소리'는 조선시대 조위한의 고소설 ‘최척전(傳)’이 원작이다.

15세기 전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격변 속에서 조선의 남녀가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다시 해외로 뿔뿔이 갈라졌다가 극적으로 재회하는 파란만장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더욱이 무대가 조선 반도를 벗어나 일본과 중국을 거쳐 안남(베트남)까지 글로벌하게 펼쳐진다면 웬만한 극적 상상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데 필자가 지금까지 눈여겨 보아온 연출가 고선웅은 이것을 해낼 토대를 쌓아온 준비된 인재(人才)다. 그의 대표작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지만 '퉁소소리'의 바탕이 된 이전 작품으로 2016년의 '탈출'과 2019년의 토끼전(수궁가) 완판본 '귀토(歸兎)'를 꼽을 수 있다.

탈북자들의 엑소더스를 극화한 '탈출'은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역경을 헤쳐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탈북민들의 생사의 험로를 덧마루 몇 개로 실감나게 형상화했다. 배우들은 죽도록 달리면서 온갖 장애를 만나지만 이 덧마루가 배가 되었다가 버스가 되기도 하고 길이 되어 관객의 상상을 뛰어넘은 탈주극을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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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탈출'을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관람했는데, 체육관 넓이의 극장 무대를 끝도 없이 뛰던 배우들의 절박한 연기가 지금도 떠오른다.

국립창극단과 함께 창극 '토끼전'을 해온 고선웅 연출이 완결판으로 보여준 '귀토' 역시 수궁과 육지를 오가는 수단과 토끼의 꾀를 고선웅만의 독창적 기법으로 형상화하여 관객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우리 연극에 일본이나 중국이 나오는 사례는 많았지만 베트남까지 3개국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일지 모른다. 육로로 이어지지 않으니 바다에 배를 띄워야 오갈 수 있는데, 고선웅 연출은 이 난제를 몇 개의 소도구와 그래픽으로 처리해 연극만의 재미를 살려냈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 배가 건조되기도 하고, (멀티 배우가 조종) 망망대해의 일엽편주처럼 떠다니기도 한다. 대나무 빗자루가 달리는 말이 되거나 복식과 모자로 나라의 풍속을 살려낸 아이디어도 기발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것은 '퉁소소리'의 극적 스토리텔링과 이를 펼쳐가는 연출의 힘이 아닐까. 방대한 이야기를 무대에 담다 보니 러닝타임만 150분(인터미션 포함)이고, 의상이나 소품도 엄청나지만 무엇보다 20명도 안 되는 배우들로 스펙터클한 군중 신과 각가지 장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마술처럼 느껴졌다. 1인다역의 멀티플레이로 조선, 일본, 중국, 안남의 주요 인물과 민중을 구현해냈고, 독특한 몸짓과 화술로 웃음도 자아내면서 170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도 고선웅 연출의 특기다.

'퉁소소리'의 매력은 배우들의 연기가 고정관념을 벗어나 파격이라는 점이다. 캐스팅부터가 그렇다.

방대한 이야기를 펼치려면 길잡이가 필요한데 우리 시대의 명배우이자 원로의 위엄을 갖춘 이호재 대배우를 해설자로 세운 것 자체가 연극의 신뢰성을 높이고 극적 재미를 안겨주는 보증수표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극 중에서 이호재 대배우는 고소설의 주인공 최척의 실제 인물을 맡아 자신의 행적을 펼쳐나가는 가이드 역을 하다가 극 말미에 자신은 작가 조위한임을 밝히는데, 80대 노배우의 원숙한 연기는 경지에 올랐다고 밖에 표현할 방도가 따로 없다.

분장도 안 하고 상투 틀고 도포만 입었을 뿐인데 필자에게는 신선 같은 아우라가 풍길 정도로 캐릭터에 관록이 배어 나왔고 극의 사실감을 더해주었다.

어찌 보면 '통소소리'는 군중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페라의 합창을 뚫고 나오는 청아한 아리아처럼 주역들의 연기가 힘 있고 관객을 휘어잡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아내 역을 맡은 정새별 배우였다. 그는 처녀 때부터 적극성과 끈기뿐 아니라 강인한 의지를 지닌 캐릭터로 등장해 극의 초반을 총각 역 박영민과 함께 이끌었다. 이후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파란만장한 소용돌이에 휩쓸린 그는 귀소본능(歸巢本能)과 모성애를 발휘하며 강인한 조선의 여인상을 열정적으로 연기해냈다. 역경을 뚫고 산 넘고 물 건너 마침내 고향 땅을 밟는 순간, 관객들은 우리 선조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 감격스러웠다. 특히 선상에서 구조를 외치는 결연한 외침은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또 하나의 보석은 오디션으로 선발했다는 남편 역 박영민이었다. 결코 연기 경력이 많지 않은 신예일텐데 발성이 시원하고 연기도 깔끔했다. 노역까지 하기에는 아직 연기가 미치지 못했지만 이 큰 서사극에서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에너지가 대단했고, 최척이라는 인물 구축에도 손색이 없었다. 이 배우가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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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주역 외에도 서울시극단의 베테랑 배우들이 병풍처럼 뒷받침을 해주었기에 이 스피디한 역사 이야기가 관객에게 실감 나게 전달될 수 있었다고 본다. 최척 아버지 역의 강신구를 비롯해 김신기 최나라 이승우 등의 노련한 연기가 극을 받쳐주었다. 어머니 역으로 캐스팅된 장연익 배우도 이제까지와 다른 색깔로 우리네 투박한 어머니상을 보여주었다.

이름과 배역을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류주연 오현우 이원희 전재형 박장면 민경석 윤준호 김용준 최아론 최민혁 박예리 이석중 배우들의 집단 연기와 오브제 역할이 없었다면 이 큰 무대가 그리 빨리 달리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시극단이 오랜만에 새 작품으로 시민들에게 유익하고 볼만한 작품을 보여주어 반가웠다.

연극은 상상력의 빚어내는 환상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고선웅 연출의 연출력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