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소음과 광기’의 끝에서 맞은 ‘죽음’...샘컴퍼니 연극 '맥베스'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샘컴퍼니 6번째 연극 시리즈, 총 객석 점유율 102% 기록 - 황정민⨉김소진⨉송일국⨉ 송영창⨉남윤호 원 캐스트 공연

2024-08-29     주하영
샘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예언’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일에 대한 지식을 미리 얻는 것,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의 힘은 강렬하다.

하지만 예언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 예언이 진실을 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예언의 당사자가 그 예언을 굳게 믿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예언을 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행동의 추진력을 최대로 발휘해 그 예언이 실현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까?

황야에서 만난 세 마녀에게 들은 ‘예언’으로 인해 반역의 살인을 저지르고 왕위에 오르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과 불안, 죄책감 속에서 스스로 폭군으로 전락해 파멸에 이른 스코틀랜드 왕의 이야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비극'은 탐욕과 욕망의 위험성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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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글래미스의 영주, 코더의 영주,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는 맥베스를 향한 마녀들의 예언에는 현재의 덩컨 왕을 죽여야 한다는 지시는 없다. 그렇다면 맥베스는 왜 굳이 사촌이자 스스로가 인정하는 덕망 높은 군주인 덩컨을 죽여야만 했을까?

예언이 실현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좀 더 빨리 예언을 실현하고픈 조급한 욕망에 휘둘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아내인 레이디 맥베스의 추동에 휩쓸려 순간적인 판단의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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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작사 샘컴퍼니는 6번째 연극 시리즈로 황정민, 김소진, 송일국, 송영창, 남윤호 등이 원 캐스트로 열연한 연극 '맥베스'의 막을 내렸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1,200석을 매진으로 이끌며, 유료 점유율 99%, 총 객석 점유율 102%를 기록한 연극 '맥베스'는 5주 동안 총 38회의 공연을 선보였다.

연출을 맡은 양정웅은 프로그램북 인터뷰를 통해, 2024 '맥베스'는 20년 전 원작을 동양적으로 재해석해 선보였던 작품 '환'과는 다르게 “원전을 제대로 표현”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면서, “과도한 욕망에 흔들리며 무너지고 갈등하는” 맥베스가 “현대인들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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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셰익스피어 원작 대사의 문학적 유희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과 각색에 있어 운율과 리듬, 표현에 신경을 썼다는 양정웅 연출은 이야기를 관객들이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려는 노력 또한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샘컴퍼니의 연극 '맥베스'에는 셰익스피어 원작 텍스트의 비유와 언어유희를 반영하면서도 맥락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단순화된 표현들이 존재한다.

또, 현대적 비주얼과 이미지를 채택하면서 불필요한 장면들을 제거하거나 순서 배치를 바꾸고, 관객에게 좀 더 긴박감을 전달하고, 감정적 연계를 쉽게 하기 위해 한 장면을 둘로 나누어 다른 곳에 배치한 부분들도 눈에 띈다. 장황하거나 시적인 표현들이 축약된 부분이 있고, 새롭게 추가된 대사도 일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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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세 마녀의 캐릭터를 남성 배우들이 연기하도록 설정한 부분인데, 양정웅 연출에 따르면, 원작에서 뱅코우가 마녀들을 향해 수염이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에 착안해 “중성적인 마녀들의 모습”을 표현해 보고자 했다고 한다. 이는 '맥베스'의 주제 중 하나인 ‘이중성과 모호성’이라는 맥락을 강조하게 된다.

마녀들이 하는 가장 유명한 대사인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되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이중성’,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모호함’은 맥베스가 예언이라는 유혹 속에서 선택을 하고,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출발선이자 혼란스러운 세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정웅 연출은 ‘중성’적인 미지의 존재들이 여섯 개의 꼭짓점을 가진 다윗의 별을 만들어 보이거나 666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양면성을 갖춘 어두운 존재의 모호함과 혼란을 드러낸다.

치마를 입고 수염을 단 중성적인 존재들은 초자연적인 악령이라거나 악마의 하수인이기보다는 복수심과 악의, 증오를 표출하는 ‘광기’처럼 느껴진다. 전쟁터에서 산산조각이 난 사체들을 수거하는 존재들의 모습은 전쟁의 ‘광포함’ 혹은 ‘잔혹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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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객석에서부터 까마귀를 머리 위로 날리는 검은 옷의 스태프들이 노출된 가운데 ‘까악까악’ 우짖는 까마귀 떼 소리로 시작한다. 관객은 곧 천둥소리와 번개, 기계음과 함께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를 외치며 등장한 알 수 없는 불길하고 모호한 존재들과 마주하게 된다.

포탄에 맞아 찢겨진 듯 보이는 사체의 몸통과 팔, 다리, 머리를 수레에 싣는 중성적인 미지의 존재들은 황야에서 맥베스를 만날 것을 예고하며, 까마귀 소리와 같은 웃음을 남기고 사라진다. 곧바로 이어지는 지휘관이 전장의 상황을 보고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찢겨진 시체들이 덩컨 왕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들을 전멸시킨 맥베스의 용맹함의 결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르웨이 왕과 합세했던 코더의 영주는 반역죄로 처형되고, 대신 공을 세운 맥베스에게 코더 영주라는 작위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아직 맥베스는 그 소식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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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돌아오는 길에 맥베스와 뱅코우는 “여자 옷을 입고 수염이 달린” 존재들을 만나 예언을 듣지만, 황당하다는 듯 웃어넘긴다. 하지만 코더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맥베스는 세 가지 예언 중 이미 두 가지가 실현되었음을 인지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글래미스 영주인 것은 당연하고, 덩컨 왕의 명령으로 코더 영주까지 되었으니, 남은 것은 왕이 되는 것뿐인가 자문하던 맥베스는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을 느낀다.

“끔찍한 살인의 상상”에 빠져들며 강렬함에 사로잡힌 맥베스는 곧 분별력을 되찾고, 시간은 흐르는 법이니 왕이 될 운명이라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유혹을 느낀다.

예언이 진실인가에 대한 궁금증, 과연 실현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 기대와 희망, 욕망으로 부풀어 오르는 조급함과 초조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맥베스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위대하고, 왕이 되지는 못하지만 대대로 왕을 낳는다”는 예언을 들은 뱅코우와 달리 맥베스에게 주어진 예언의 실현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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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아내 레이디 맥베스가 야망을 실현할 ‘악함’의 필요와 ‘지름길’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남편에게 “권력의 동반자”라고 불리는 그녀가 인지하는 맥베스는 “악한 것을 원하면서도 성스럽기를 바라는”, 권력 쟁취에 방해가 되는 ‘약점’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눈앞에 다가온 절호의 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빠르게 실현되는 예언의 속도를 늦출 필요 없이 즉각적인 실행으로 ‘왕’이라는 최고 권력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여긴다. 그녀는 자신들의 성에 하룻밤 머물기로 한 덩컨 왕의 살해를 주저하며 망설이는 남편을 “겁쟁이”로 몰아붙이며, 강하게 추동하기 시작한다.

의지와 용기를 갖춰 권력이라는 목표 외에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사내다움”을 장착하라고 도발하는 레이디 맥베스에 관해, 문학비평가 A. C. 브래들리는 “셰익스피어가 그린 인물 중 가장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남편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도록 만드는 위치에 자신을 설정하고, 그 어떤 의심이나 갈등 없이 의지를 곧 행동으로 옮겨 계획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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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야망이라는 열정에 함께 불타오르던 “상당히 많이 닮은 존재”인 맥베스 부부는 나이 든 잠든 왕을 살해한 날 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술에 만취해 정신을 잃은 호위병들 손에 남겨두고 왔어야 할 피 묻은 칼을 겁에 질려 그대로 갖고 온 남편 대신 칼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대담했던 레이디 맥베스 역시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다”는 환청을 들으며, “내면의 양심에 의한 경련”에 휩싸여 피 묻은 손을 닦아내려 애쓰는 맥베스의 모습은, 이후 몽유병으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모든 진실을 쏟아내는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으로 그대로 연결된다.

그녀가 ‘좋은’ 선택이라고 여겼던 암살은 최악의 수단, 최악의 결과를 낳는 ‘나쁜’ 선택이 되고, 그로 인한 불안의 증폭은 살인을 행한 그 순간부터 몰락의 수순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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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언에 대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식이 없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대 왕들의 아버지로 예언된 ‘뱅코우’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대담함과 기개, 기품을 지닌 뱅코우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후계자가 없는 자신이 피를 부른 악행과 죄책감의 고통에 잠 못 이루는 대가가 결국 뱅코우의 자손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또 다른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맥베스의 선택은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까지 살해할 것을 자객에게 요구하는 ‘타락’으로 이어진다. 영문학자인 캐롤 루터는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한다는 사실보다 더 끔찍한 것은 “아이들을 죽이는 살인자라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맥베스는 “결점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는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루터는 처음부터 맥베스가 덩컨을 죽이는 일이 끔찍한 잘못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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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컨 살해는 정치 범죄이자 친족 살해이고, 신의 섭리에 따라 통치권이 부여되는 ‘왕’을 죽였다는 점에서, “우주 섭리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고 설명하는 루터는, 권력의 완성은 자신의 뒤를 잇는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후세를 없애는 일이라는 사실을 맥베스가 뒤늦게 깨달았다고 분석한다.

뱅코우는 살해했지만 플리언스는 놓쳤다는 사실을 대관식 연회장에서 자객들로부터 보고받은 맥베스가 뱅코우의 유령을 보며 혼비백산하는 모습은 레이디 맥베스조차 더는 상황을 수습할 수 없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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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는 어둠의 존재들을 찾아가 또 한 번 예언을 요구하고, 그들은 ‘맥더프를 조심할 것’과 ‘살아있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맥베스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 ‘버넌 숲이 던시네인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패배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하지만 맥베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운명대로 살다가 주어진 시간에 따라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뱅코우의 자손들이 정말로 왕이 되는지에 대한 답을 들으려 한다.

뱅코우의 후손 여덟 명이 줄지어 왕관을 쓰고 등장하는 환영을 본 맥베스는 잉글랜드로 도망친 맥더프를 쫓는 것이 아니라, 맥더프의 성으로 가서 그의 부인과 아이들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다.

자식이 없는 맥베스가 예언을 핑계 삼아 갈망하고 추구했던 권력이 “열매 없는 왕관”과 “불모의 왕홀”이라는 ‘실패’의 결과를 낳은 것이나 다름없음을 인지한 탓이다. 맥베스는 잠들 수 없는 불안과 양심의 고통, 다가올 미래의 복수에 대한 공포를 막기 위해 후세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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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의 폭주는 원하는 것을 가졌으나 만족은커녕 더 큰 불안이 지속됨에 따라 “차라리 살인을 당하는 편이 낫겠다”고 외치는 레이디 맥베스의 몽유병을 가속화한다.

맥더프 부인과 아이들까지 살해하는 결정을 내린 남편의 폭정에, 레이디 맥베스는 “지나가 버린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진실과 후회, 죄책감을 느끼며, 아무리 씻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피 묻은 손을 밤마다 씻는 행동을 반복한다.

양정웅 연출은 맥더프 역과 맥더프 부인 역을 1인 2역으로 설정하는데, 맥더프 부인을 찾아와 위험을 경고하는 ‘사자’ 역할을 레이디 맥베스가 1인 2역으로 하도록 함으로써, 레이디 맥베스가 겪는 ‘죄책감’의 맥락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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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학자인 수잔 스나이더는 연극 '맥베스'가 주인공이 잘못된 행동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도덕적 타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스나이더는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이치를 드러냄에 있어 “연극 '맥베스'는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심리적 과정”과 필연성을 보여준다고 덧붙인다.

양정웅 연출은 죽은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태어난 맥더프와 맥베스가 결투하는 장면에서, 맥베스가 잠든 상태에서 끝없이 계단을 오르다 죽음에 이른 아내의 ‘환영’을 보는 것으로 설정한다.

자신이 간과한 예언의 허점과 모호함, 이중적 의미와 종말의 도래를 인식한 맥베스는 항복 따위는 없다고 외치지만, 맥더프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령하며 승리를 할 것 같은 순간, 죽은 아내가 지나가는 환영을 본다.

이미 레이디 맥베스의 죽음에 관한 보고를 듣던 순간, “최후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견한 상태에 있던 맥베스가 마주하게 된 아내의 유령은 그를 멈칫하게 만들고, 맥더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칼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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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내일”을 바라보며 끝을 향해가는 삶은 “짧은 촛불”과 같고, “소음과 광기”로 무대를 가득 메우며 요란하게 휘저어도 인간은 결국 때가 되면 퇴장해야만 하는 “가련한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맥베스가 아내의 죽음 뒤에 남긴 회한의 독백은 고스란히 자신의 퇴장을 알리는 죽음의 예고장이 된다.

루터의 표현처럼 “자신의 세계에 공포를 풀어 놓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잘못된 선택의 연속으로 인해 죽음의 끝에 이르고, 극의 첫 부분에서 검은 존재들이 전쟁터에 흩어진 훼손된 사체들을 수레에 실으면서 발견했던 누군가의 ‘목’은 이제 맥베스의 얼굴을 한 채 맥더프의 손에 들려 있다.

최고 권력의 왕위는 덩컨 왕이 후계로 지정했던 맬컴 왕자에게로 향하고, 극의 시작 부분에서 충직함과 용맹함으로 칭송받던 맥베스의 위치는 맥더프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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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것은 권력이라는 지위와 명칭뿐, 욕망이라는 괴물에게 현혹되어 한바탕 “소음과 광기”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맥베스 부부의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 놓여 있는 것은 예언이었을까, 욕망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리석음이었을까? 미지의 존재들이 겨냥한 것은 전쟁의 복수였을까, 악의 조장이었을까, 아니면 과도한 탐욕과 욕망에 대한 처벌이었을까?

셰익스피어가 연극 '맥베스'를 통해 관객에게 일깨우고 싶었던 것은 불안의 공포였을까, 욕망과 탐욕의 위험성이었을까, 아니면 예언의 저주와 실현에 대한 경종과 경고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