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성소수자 문제, 발칙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연극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 신선한 희곡에 놀이처럼 연출...재미와 메시지 두 마리 토끼 잡아 - 남녀 배우 4명이 올라운드 플레이로 다양한 캐릭터 소화 - 2024년 주목할만한 작품이자 연극의 사회적 역할 일깨워 - 해체되어 가는 가족, 그리고 개인의 주체적 삶에 대한 이야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매진으로 어렵게 표를 구해 8월 9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관람한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8월 11일)은 올해 가장 주목할만한 연극으로 꼽아도 좋을 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신선한 파격을 보여준 역작이었다.
서동민이라는 신진 작가는 터부시하거나 왜곡된 성(性) 정체성의 문제를 픽션이 아니라 현실의 가족을 통해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30대 초반의 강훈구 연출가는 공놀이클럽이란 극단 이름처럼 연극을 놀이처럼 만들었다. 4명의 배우들만으로 배 이상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올라운드 플레이를 펼친 것이다.
배우들의 변신도 놀라웠다. 하나의 배역을 제대로 해내기가 버거운 무대에서 김솔지, 남재국, 류세일, 박은경 배우는 고정된 배역 없이 가발과 의상 변화만으로 다역을 맛깔나게 해냈다.
가족 구성원은 할머니, 어머니, 아들, 딸인데 딸이 오빠가 되었다가, 엄마로 나오기도 하고, 구부정한 할머니로 변신해 젠더와 연령대를 경쾌하게 넘나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배우들이 다른 구성원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놀이의 특성을 살려낸 것이다.
이는 배우들이 희곡을 완전히 이해하고, 캐릭터 분석으로 대사를 꿰고 톤을 맞춰야 가능한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상세하게 '말린 고추...'의 작가와 연출가, 배우들에 대해 알아보자.
서동민 작가는 2021년, 15주의 과정을 거쳐 장막 희곡을 완성하는 서울연극센터 PLAY-UP 아카데미 희곡창작 워크숍에서 초고를 썼고, 2023 국립극단 '창작공감: 희곡'에 선정되어 낭독 공연과 멘토링 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이처럼 4년간 심도 있는 개발 과정을 거친 이 희곡은 2024년 8월 경쾌하고 감각적인 강훈구 연출을 만나 아르코소극장에서 정식 공연을 갖게 되었다.
희곡뿐 아니라 소설, 웹에서 작가로 활약 중인 서동민 작가는 첫 장막 희곡에서 단단한 구성과 감각은 물론 요즘의 현실 언어로 가족 도를 끈적하게 그려냈다.
필자는 몇 년 전 근로자연극제에 참가한 한 극단의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이란 공연을 의미있게 보았는데 그 희곡을 쓴 작가가 강민구 연출이었다.
그는 청년과 청소년, 그 경계에 있는 영어덜트를 위한 연극제작집단 공놀이클럽 대표를 맡아 그 세대에 맞는 연극 제작을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유아부터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 세대별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영어덜트 연극은 황무지나 다름없어 그의 작업이 더욱 주목되고 있다.
강 연출은 “청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말을, 우리의 욕망을 무대에 올린다”고 밝혔다.
필자는 '말린 고추...'를 관극하며 신인 작가의 신선한 희곡도 너무 좋았지만 강훈구 연출의 작업에 흠뻑 매료되었다.
연극사를 공부할 때 연극은 플레이, 유희임을 배웠지만 그는 현대사회의 예민한 주제를 놀이처럼 풀어내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무대 활용도 특이하다.
넓은 무대에 옹색한 공간을 구획하고 허름한 소품 몇 개로 은평구 16평 연립주택의 소시민 가족의 복작이는 일상을 상상케 했다. 무대장치라고는 한 평도 안되는 거실과 그보다 협소한 딸의 방, 그리고 택배 더미가 고작이다.
이 작은 공간에 4명의 배우가 살을 맞대고, 가족이란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 것이 구차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이 연극의 쿰쿰한 냄새처럼 공연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서로의 윤리와 욕망이 다른 가족간의 관계가 꿈틀거리려면 공간은 좁을수록 꿈꿈했기 때문이다.
강훈구 연출은 이 공연을 ‘퀴어 가족 이야기’라고 했다. 평론가 김건표 교수도 “한국사회 퀴어의 시각성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공감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무대화 했다”고 페북 리뷰에 올렸다.
퀴어는 동성애자나 성전환자 등 성적소수자를 일컫는 용어이고, 이 '말린 고추...'에 트랜스젠더가 등장하다 보니 ‘퀴어 연극’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같은 규정은 서동민 작가와 강훈구 연출의 독창적 작업을 틀에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지금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가족의 해체, 그 와중에서 가족의 개념과 개인의 취향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이 작품은 넓은 의미로 가족극 또는 휴먼드라마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아버지는 사고로 죽고 아들 선호 사상에 찌든 할머니와 시집살이 하는 어머니 밑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란 아들이 여동생의 립스틱을 훔쳐바르고, 온갖 여성 의류를 택배로 사들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는 아들, 철저하게 숨기려던 비밀이 드러나자 한 가정에 회오리가 일어난다.
예전 같았으면 이같은 소재는 금기였으나 이제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미덕은 성소자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시류에 영합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현실에 있을 법하게 진솔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죄악시하는 껄끄러운 소재를 전통적 가족 서사 안에 녹이다보니 퀴어적 요소가 배어나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우리도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는 반추해 볼 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이 주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한다.
이제 배우들의 연기를 이야기 해보자.
비교적 연극을 많이 보는 필자에게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에 출연한 배우들을 무대에서 본 적은 있지만 백그라운드나 연기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다.
그런데 공연을 보는 내내 어쩌면 네 명의 배우가 저렇게 역할을 돌려가며 연기를 잘 해낼까 경이롭고 감탄스러웠다.
아들에서 엄마로 할머니로, 할머니가 손자와 손녀로 변신하고 돌변하는데, 남녀 성별과 외모가 전혀 문제 되지 않을 만큼 1인 다역을 모두가 해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다 보면 멀티 배역이 등장하고, 젠더 프리의 유행으로 햄릿 같은 남성 역을 여배우가 맡는 사례가 많지만, 이 무대에서의 올라운드 플레이는 캐릭터 소화나 역할 변신면에서 독특했다. 스포츠로 보자면 선수 각자의 개인기도 뛰어났지만 팀웍도 최상이었다는 얘기다.
공연이 시작되면 딸 역의 박은경 배우가 가족들을 소개하는데, 상대의 옷을 입어보는 것이 특이하고 뭔가를 암시한다. 오빠 역 남재국이 가발 하나로 여성스럽게 등장하고, 엄마 역 김솔지 배우가 분장과 의상으로 중년의 아우라를 풍긴다.
마지막 소개자는 할머니 역 류세일 배우다. 라스트에 여장한 트랜스젠더로 나오는 이 배우는 뽀글이 가발에 등굽은 품새가 영락없는 할머니인데 실제는 30대 청년이다.
김솔지 남재국 류세일 박은경 4명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들은 본격 연기수업을 받은 세대일 뿐 아니라 수상 경력도 화려한 차세대 인재들이다.
김솔지 배우는 엄마 역이 어울렸지만 트렌스젠더 언니 연기도 어울렸다. 머리가 긴 아들 역으로 등장한 남재국 배우는 후반에 커밍아웃한 아들을 마주해야 하는 엄마의 고통스러 연기를 애절하게 해냈다. 뽀글이 가발을 쓰고 등 굽은 할머니로 등장한 류세일 배우는 라스트에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여장 남자 역을 기막히게 해냈다. 해설자 겸 딸 역으로 처음 관객을 대한 박은경 배우는 어떤 역이든 그 캐릭터에 맞게 다양한 연기를 펼쳤다.
서구에선 연극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룬지 오래지만 우리는 조금만 민감한 사회 이슈도 터부시 하거나 요란을 떠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협동한 공놀이클럽의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고추와 복숭아 같은 성적 상징을 유니크하게 풀어냈을 뿐 아니라 우리 가정의 현실 문제로까지 대두된 성 정체성을 발칙한 상상력으로 풀어내 재미와 메시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이 연극이 더욱 끌리는 이유는 영어덜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그러기 위해서 가족과 사회는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답이 아닌 진솔한 질문을 던져 주고 있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