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그리스 연출가와 한국 배우들의 합작 '안티고네', 소통과 앙상블 절정
- 배우와 코러스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희랍 비극 - 고전 작품의 현대적 해석, 중요한 메시지는 연기 아닌 대화로 전달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희랍 연극의 원형에 뿌리를 두고 현대극으로 재구성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연극이 왜 예술인지를 실감케 했고, 재해석인데도 비극의 목적인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배우의 용인술만으로 무대를 꽉 채운 연출가가 다양한 미장셴으로 엮어내는 신(神)의 법과 인간의 법의 대결, 결국 모두가 파멸로 치닫는 클라이맥스, 비극이 빚어내는 카타르시스, 거기에 객석에 전하는 현실적 메시지...시공을 초월해 재미와 감동을 안기는 극술(劇術)에 필자는 매료되었다.
그리스 연출가 이아니스 파라스케보플로스를 대한민국연극제 용인에 초청해 한국 배우들과 작업한 '안티고네'(7월 15일 오후 4시, 7시 용인평생학습관 큰어울마당)는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면서 연출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 정석의 무대였다.
'오이디프스'와 함께 국내서도 자주 공연되는 '안티고네'인데, 이아니스는 정통에 바탕한 현대적인 연출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 공연의 요체는 ‘코러스’였다.
이아니스 연출은 등장인물 20명(프로배우 10명, 용인시 일반인 10명)을 코러스로 등장시켜 암전(暗電)없이 90분간 기원전 5세기의 희랍 비극을 현재 한국의 배우들로 재현해 현대에서도 여전히 비극을 빚어내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 그 교훈을 명징하게 그려냈다.
이아니스는 연출 의도에서 밝혔듯이 “그리스 비극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간 간과되어온 ‘코러스’의 역할을 부각하는 동시에 스타시마(스타시몬)의 철학적 성격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희랍 비극의 구조는 프롤로그-파라도스-에피소드-스타시몬-엑소더스로 되어있다. 프롤로그는 도입부, 파라도스는 코러스의 입장, 에피소드는 배우의 대사와 행동으로 진행하는 이야기, 스타시몬은 극 중 주인공과 코러스가 대화하는 부분, 엑소더스는 퇴장을 뜻한다.
이아니스 연출은 연출적 요소의 출발점으로 ‘문(문턱)’을 설정하고, 관짝 같은 나무상자들과 우산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10여 개의 에피소드(무대에서는 장면 번호로 설정)를 스타시몬 형식으로 끌어나갔다.
전반부는 안티고네(박현지)와 언니 이스메네(배보경) 자매가 크레온 왕(이기복)과 맞붙는 서사적인 장면을 보여주었으나 후반부는 거의 코러스와 주고받는 형식으로, 배우들이 무대에서 회오리를 일으키듯 격정적인 몹신들로 장엄한 클라이맥스로 객석을 감동시켰다.
인간은 관(棺)같은 공간에서 태어나 관으로 다시 들어가는 가련한 존재인가.
이아니스 연출은 안티고네와 하이몬 왕자, 에우리디케 왕비에 이어 크레온 왕까지 관 속에 눕히면서, 그 가련한 비극의 바닥에서 감정의 진수를 뽑아내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하는 강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연극을 이끄는 주체는 배우들이다.
크레온 역을 맡은 이기복 배우가 인간의 법을 고집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독선적 역할을 박력 있게 해냈다. 안티고네와 격한 감정으로 다투고, 아들 하이몬과 격투까지 벌이다가 무너지는 캐릭터 자체가 파워플한 에너지를 요하는데, 젊은 배우들과 앙상블을 이루면서 숙련된 연기로 존재감을 뚜렷이 했다.
안티고네 역 박현지 배우도 극 초반에 자신의 소신을 설득력 있는 화술로 펼쳐냈고, 클라이맥스에서도 타이틀롤로서의 이미지를 살린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스메네와 왕비 에우리디케를 차분하게 연기한 배보경을 비롯해 패기넘치게 하이몬 역을 해낸 김형건, 초반부를 뜨겁게 달군 파수꾼 역 남승화, 후반부를 충격으로 열어준 메신저 역 이의령, 파격적 의상과 중성적 목소리 연기로 극에 결정타를 던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역 장민기의 상탈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아니스 연출의 '안티고네'는 이들과 함께 김태균 손진영 이태규 등 프로 배우 3인을 비롯, 용인시의 남녀 시민 배우 7명이 가세한 코러스들의 앙상블이 이번 무대의 중심이었다. 특히 대사는 없었지만 연출가의 의도를 잘 파악해 군중으로, 때로 증언자로 심판자로 격동의 그림을 만들어내면서 춤과 소리로 극의 아우라를 살린 용인시 시민 배우들의 활약도 멋졌다.
이번 '안티고네'는 다이내믹한 미장셴, 빠른 전개로 사건을 풀어나간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그리고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대화체로 던진 현실감 있는 메시지 전달이 잘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코러스의 역할 강조, 스타시몬의 성격을 살린 고대 비극의 견고한 구조뿐 아니라 그리스의 연출가가 한국 배우들과 소통해 고전적 텍스트를 한국 관객 입맛에 맞게 현대적으로 해석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최소한의 세트(문)와 목재 박스 오브제로 역동성을 살린 손호성의 무대디자인, 종반에 조명 세트를 배우 머리 위로 내린 윤진영의 집중적인 조명, 검은 상복 이미지의 유채색 단체복에 권력과 신분에 따라 포인트를 둔 김정향의 의상, 물결치듯 자유로운 몸짓의 이경은의 안무, 클라이맥스를 해탈의 경지로 이끈 마노스 밀로나키스의 판타지한 음악 등 스탭들의 작업 퀄리티가 돋보였다.
이만한 클래스의 작품을 제42회 대한민국연극제 용인에 유치한 손정우 제작감독(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번역을 맡은 정은주 정혜정, 그리고 그리스 연출과 한국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소통시켜 집단 앙상블을 이뤄낸 심마리 조연출의 역할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번 한-그리스 합동 공연을 보면서 가장 부러운 것은 연출의 열정과 배우들의 연습량이 이뤄낸 연극적 성과였다. 전통을 바탕으로 고전 텍스트로 뭔가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는 외국 연출가들이 한국 연극에 자극을 주고 있는 요즘이어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다.
이아니스 연출은 공연 전 배우들이 몸을 푸는 무대에도 모습을 보였고, 커튼콜 때는 무대에 올라와 배우들에게 한국식으로 절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배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연극이 일상처럼 놀이처럼 몸에 익도록 배우들과 숱한 낮과 밤을 연습했다는 후문이다.
우리도 이런 열정을 지닌 연출가들이 많았고, 밤샘 작업을 하면서까지 완성도를 높여 세계 연극제에 나가 주목받은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습 시간이 제한되고 집단 작업의 연극이 힘든 환경이 되면서 대학로 연극 동네에 품앗이 공연들이 만연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필자는 극장을 나서며 우리 연극인들이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실험 정신을 중시하는, 무엇보다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연극다운 연극이 나오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