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역대급 '햄릿'을 보다

- 신시 제작, 손진책 연출의 연극 '햄릿' 장기 공연 개막 - 80대부터 30대 배우까지 신구의 조화가 빚어내는 최고의 앙상블 - 현대 감각의 세련된 무대에 명확하게 들리는 대사까지...재미와 감동 안겨

2024-06-14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2024연극햄릿]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요즘 한국 무대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김동수 배우가 연출한 '햄릿'이 지난 5월 하순 대학로 드림씨어터에서 공연됐고, 신시컴퍼니의 연극 '햄릿'이 6월 9일 막을 올려 9월 1일까지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장기 공연에 돌입했다.

국립극단도 정진새 각색, 부새롬 연출의 '햄릿'을 7월 5일부터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국립극단 '햄릿'에는 김별,김수현, 이봉련 등이 출연한다.

국립극단 '햄릿'은 8월 9일과 10일 세종시 세종예술전당 무대에도 오른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은 국내 대학극은 물론 국공립 극단과 민간 극단에서 자주 공연되는 단골 레퍼토리 중 으뜸에 속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사대로도 유명하지만, 기라성같은 배우들이 햄릿 역을 맡아 명성을 얻었다.

지난 5월 장충동 국립극장에 배우 김동원(1916~2006) 흉상 제막식이 열렸는데 흉상 아래에 ‘영원한 햄릿’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는 1951년 국립극단 전신인 극단 신협 시절,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햄릿 역을 맡아 이 같은 명예를 얻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도 배우 시절, 이해랑 연출의 '햄릿'에서 단골로 타이틀롤을 맡아했다.

오프닝

'햄릿' 공연은 많았지만 작품 해석, 무대, 연기 등 완성도 면에서 퀄리티가 높았던 작품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이번 신시컴퍼니 손진책 연출 '햄릿'은 무대 메커니즘도 현대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 특히 객석과 소통이 잘 돼 재미와 감동까지 안겨주는 웰메이드 공연으로 주목받고 있다.

필자가 지난 반세기 동안 국내 무대에서 보아온 셰익스피어 '햄릿' 무대 중 가장 완성도가 좋았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좋았고, 대사가 잘 들려 작품의 이해가 쉬웠으며, 연출의 감각이 이 시대 현대성과 맞았으며, 무대미술 조명 의상 등이 참신했다. 무엇보다 지루한 장면이 비교적 적었고, 연출이나 연기도 흠잡을 데가 별로 없어보였다.

이호재의 우뚝 선 존재감, 박정자의 탁월한 캐릭터, 강필석의 호연

[2024연극햄릿]

선왕 역을 맡은 80대의 이호재 배우는 등장 자체로 무대를 장악하는 존재감을 보였으며, 초반에 4명의 앙상블 중 배우 1로 나오는 박정자 배우는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저음으로 “춥다! 뼈가 시리게 춥다!”는 대사 한마디로 객석을 휘어잡았다.

햄릿 역을 맡아 175분(인터미션 포함)간 무대를 누빈 강필석 배우는 대사, 연기, 순발력, 에너지 등 전반에서 타이틀롤다운 단단한 기량을 보였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유려한 발성과 감정의 강약 조절로 역대급 햄릿의 반열에 오를 만했다.

여타 '햄릿'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길래 평이 좋은 것일까.

무엇보다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한국형 햄릿’으로 평가받을 만큼 퀄리티가 우수했다. 무대디자인과 미술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되어 세련미를 보였을 뿐 아니라 중앙에 마당을 만들어 배우들이 마음껏 연기를 펼치게 했고, 적역의 배우들이 연기 앙상블을 이루어 관객들이 중앙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2024연극햄릿]

반투명 유리 벽에 추상미술을 변주시키며 배우의 실루엣이 투영되도록 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넓은 무대 바닥에 성벽 안 또는 인간의 굴레처럼 조명으로 원형의 공간을 구획 지었으며, 라스트의 칼싸움 대결 때에는 원 안에 다시 사각의 링을 만들어 몰입도를 높였다. 여기에 조명이 높이와 깊이, 점과 면, 흑백과 컬러로 장엄한 아우라를 조성했다.

2016년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위주로 '햄릿' 을 기획해온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프로듀서는 2022년 관록의 노장과 패기의 소장 배우들로 앙상블을 끌어올린 '햄릿' 을 선보였다. 그리고 2024 버전에는 문호를 개방하고 더블캐스팅으로 9월 1일까지 장기 공연하는 올라운드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번 '햄릿' 은 국공립도 하기 힘든 캐스팅을 이뤄냈다. 여러 세대를 아우르고, 캐릭터에 맞는 배우로 팀워크를 이뤄, 최고 기량의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화음처럼 최상의 앙상블을 빚어낼 수 있었다.

[2024연극햄릿]

신시의 '햄릿'을 3회 연속 무대에 올린 손진책 연출은 무대의 특성, 배우들의 개성, 관객의 취향까지 고려해 버전을 업그레이드 해왔다. 극작가 배삼식이 다듬어온 대사는 배우들이 구사하기 쉬워 관객들도 편하게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무대에서는 무선 마이크의 성능이 좋아 공간제약의 단점을 보완하여 육성보다는 진솔하지 못했지만 듣기가 한결 편했다.

대다수 '햄릿' 무대장치를 설치해 그 안에서 해왔던 것에 비해 손진책의 '햄릿'은 첨단 기술로 현대적인 미감을 살리면서, 배우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엣지 있는 미장셴'의 변화를 만들어낸 점도 좋았다.

시작과 끝은 전체 배우가 등장하는 몹신으로 처리, “인간과 인류가 영원히 고민해야 할 문제“가 그 원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2024연극햄릿]

날마다 캐스팅이 바뀐다는데 필자가 본 6월 11일의 출연진은 햄릿 강필석, 오필리어 루나, 선왕 이호재, 무덤파기 김재건, 클로디어스 길용우, 거트루드 김성녀, 폴로니어스 박지일, 레이터스 양승리, 호레이쇼 정환, 로렌크란츠 김영기, 길덴스턴 이호철과 코러스 4명(배우1 박정자, 2 이항나, 3 정경순, 4 손봉숙)이었다.

80대의 이호재 박정자, 70대의 김재건 김성녀, 60대의 길용우 손봉숙 등 원로와 중진, 30대 초반 루나와 40~50대 배우들이 고르게 캐스팅되어 무리한 배역에 따른 어색함 없이 매끄러운 앙상블을 이뤄낼 수 있었다.

예술원 회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뮤지컬과 대중음악 쪽 스타까지 망라해 커리어가 다채롭고 화려한 것도 극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였다.

죽은 선왕 역을 해낸 이호재 배우는 우뚝 선 존재 자체로 빛이 났고, 박정자 배우는 어떤 역을 맡던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모든 배우들이 고르게 자신의 캐릭터를 소화했지만 거투르드 역 김성녀의 원숙한 연기가 돋보였고, 김재건 배우는 무덤파기 작은 역이지만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2024연극햄릿]

연극무대에서 오랜만에 만난 클로디어스 역 길용우 배우는 개성이 강한 캐릭터를 개성이 강한 연기로 힘있게 펼쳐냈다. 올해 이해랑 연극상을 수상한 폴로니어스 역 박지일은 연기파 배우다운 위트 있는 연기로 객석에 웃음을 선사했다.

배우 역 4인방의 연기 호흡도 척척 맞았는데 박정자, 손봉숙 등 기존 멤버와 이항나, 정경순 등 새 멤버가 각기 개성을 살리면서 앙상블을 이루어 보기 좋았다.

햄릿 역 강필석과 대결하는 레이터스역 양승리의 거구에서 뿜어나오는 선 굵은 연기가 눈에 띄었고, 정환 김명기 이호철 등 중견 배우들도 자연스러운 연기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햄릿'에서의 꽃인 오필리아 역 루나는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답게 노래와 연기가 신선했고, 비운의 캐릭터지만 감정을 오버 하지 않고 깔끔하게 연기, 연민을 안겨주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 강필석이 이 불후의 명대사를 독백하는 장면도 멋졌는데, 특히 손진책 연출은 일체의 군더더기를 말끔히 거둬낸 미니멀한 무대에서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인간의 문제를 파고드는 집요함을 보였다. 그 결과 객석의 호응을 얻었고, 연극사에 기록될, 격조 있고 현대 감각에 맞는 2024 '햄릿'이 탄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