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고학찬 전 예술의전당 사장...도전의 삶 살았던 '아이디어맨'
- 인기 방송 프로듀서 출신...예술의전당 사상 최초의 연임 사장 - 15년간 미국 거주...뉴욕서 첫 한국어 방송 성공시켜 - 75세 가수로 데뷔하며 도전의 삶 이어가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예술의전당 사상 최초의 연임 사장이란 전례를 남긴 고학찬(77) 전 사장이 4일 세상을 떠났다.
TBC프로듀서 출신으로 윤당아트홀을 운영하다 2013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6년간 예술의전당을 이끄는 등 평생을 문화 예술 확장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방송 프로듀서에서 작가, 제작자, 연극 연출가, 대학겸임 교수에서 아트홀 경영자, 예술의전당 사장, 그리고 가수까지 다채로운 직업경력을 가진 그의 삶은 젊은 때부터 재치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맨이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실험정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도전정신으로 활동무대를 달리할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성과를 남긴 기록들이 라디오시대를 이끌었던 프로듀서 시절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라디오 어린이 히트 프로인 '손오공'으로 시작해 TV시대로 옮겨 '장수만세', '좋았군 좋았어', '엄마의 일기' 등 TBC-TV(KBS-2TV)의 교양 및 코미디 프로 연출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한 때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가수출신 이장희 씨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방송을 시작했을 때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의욕만 가지고 무턱대고 찾아간 뉴욕시장이 그의 협력자가 되고 빈털터리로 뉴욕에서 방송국을 창립했던 이야기는 소설 같은 일화들이다. 어느 해 15년간 살던 미국에서 소리 없이 돌아온 그는 케이블 TV 제작운영에 참여했고 대형 복합 문화공간 윤당아트홀을 운영했다.
예술의전당 재직시엔 2013년 국내 최초로 우수 레퍼토리 공연을 영상화해 국내외에 상영하는 영상화사업을 시도하고, 시민 누구나 찾을 수 있도록 예술의전당 문턱 낮추기를 추진하는 등 문화 영토 확장에 주력해왔다는 평을 받았다.
가곡 마니아인 고 전 사장은 과거 스페인 합창단 내한 공연 당시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을 정도로 수준급의 가창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 '고학찬의 비긴어게인'을 운영하며 뛰어난 노래실력을 드러냈던 그는 지난 2022년에는 75세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는 등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에도 가곡 콘서트를 개최했다. 고인은 과거 인터뷰365와의 인터뷰에서 세계합창단음악제를 꿈꾸고 있다는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인터뷰365는 2010년 윤당아트홀을 운영하던 고 전 사장을 단독 인터뷰한 바 있다. 그 기사의 일부를 다시 옮겨 싣는다.
뉴욕市長 설득시켜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방송
- 일선 PD시절부터 매우 엉뚱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행동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히트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선배들이 찾아내고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내 나름의 새 길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 새로운 시도를 해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나타나 희열을 맛볼 때도 많았다.
- 대표적인 사례를 든다면?
라디오시대 어린이들의 최고 인기 프로였던 '손오공'을 연출할 때도 효과음 담당자와 수없이 대립하고 설득해가며 기본 효과음의 틀을 벗어난 기발한 효과음을 선보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손오공이 하늘을 날고 여의봉을 휘두르는 소리, 호리병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모두 상상력이 미치지 않은 특이한 소리를 만들어 사용했다. 전자오르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악단에 부탁해 신기한 소리를 많이 만들어냈다. 인기 프로의 음악과 효과음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다가 소속부장의 경고까지 받았지만 라디오는 소리의 문화이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을 소리를 통해 느끼게 하므로 효과음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
- 일에서만 독창성을 즐긴 것이 아니라 인생도 그처럼 새롭고 모험적인 시도를 즐긴 것은 아닌가?
난 사실 대학(한양대)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막상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할지 어디에 취직할 지 막연했다. 영화감독의 조감독으로 가는 길이 최상인데 처음부터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 싫어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학생 때 한번 구경 갔던 천안 근교의 성불사라는 절에 살고 싶어서 그곳으로 갔다. 출가할 생각보다 수도나 수양을 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혼자 적막강산의 산속 절에서 새벽 예불하고 참선하며 보내는 동안 노스님은 “자네는 절에서 살아야한다”며 하산을 말리셨지만 어느 날 누님이 일본으로 먼 길을 떠난다는 연락이 와 그길로 하산했다. 그때 길에서 구입한 신문광고를 보고 동양방송(TBC/현 KBS 2TV) 프로듀서 공채에 원서를 냈다. 1970년도였다.
- 자칫 스님이 될 뻔 하셨는데 진로가 달라진 것 아닌가? 그래도 전공과 무관하지 않아 제대로 된 선택 같다.
내가 제주도 출신인데 제주도 출신 PD로는 1호였다. 4명의 합격자 중에 사방을 둘러보아도 학연이나 지연이 없었던 나는 점심식사도 혼자 다니며 외톨이 취급을 받았다. 그때 분위기는 ‘왕따’라는 말이 맞다. 방송국 동네 식당이 싫어서 버스 타고 다른 동네 가서 혼자 밥 먹고 올 정도로 서먹하게 방송국 생활을 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일에 열중할 수 있었다. '손오공'은 나의 첫 작품이다.
- 연출활동을 라디오시대에서 TV시대로 옮긴 것은 언제인가?
라디오 PD 3년만에 였다. '서수남 하청일의 유쾌한 샐러리맨'이 최초 뮤지컬 형식의 드라마인데 그게 라디오 때 나의 마지막 작품이다. TV 연출을 시작하면서 코미디 '좋았군 좋았어'의 프로그램 제작파트에서 활동했다. 최초로 개를 의인화 시킨 코미디를 연출해 화제가 됐지만 새로운 것을 버릇처럼 고집하고 또 라디오 출신이라 것 등으로 인해 눈총을 받다가 '장수만세', '여고생 퀴즈' 같은 교양프로 옮겼다.
- 견공이 등장해 멍멍거리면 사람이 대신 말을 하는 코미디 프로가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개가 짖으면 성우가 대신 개의 입놀림에 맞추어 말을 하는 것인데 강아지를 통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는 '좋았군 좋았어'의 코미디 코너였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진행한 '장수만세' 때도 장롱에서 살아가는 서울 신림동의 별난 할머니 사연을 소개해 한동안 세상이 그 할머니 화제로 시끄러웠다.
-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고 왜 미국으로 떠났는지?
1980년 5공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 통폐합과 해직 언론인시대가 개시됐다. 그 무렵 내가 일하던 방송사도 흔들렸지만 개인적으로도 좀 튀는 인물로 분류될 수 있었다. 내가 미국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인데 아내로부터 그런 변화의 소식을 접하고 그냥 그곳에서 내 일을 찾아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 15년 쯤 미국에 살며 활동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 모자 장사로 돈을 번 동기와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돈을 좀 버니까, 내가 하던 일,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생각나더라. 나는 어느 날 에드워드 카치 뉴욕시장실로 면담을 신청했다. 미국이란 나라의 매력적인 점은 민주주의가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과 면담 약속을 한 날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뉴욕시청으로 들어가 곧장 화장실로 갔다. 그런데 내 옆에서 소변을 보던 사람이 동양인인 나를 보고 당신 누구 아니냐고 묻더라.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가 곧 나와 만나게 될 뉴욕시장 에드워드 카치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는 기관장쯤 되면 화장실을 따로 사용하는데 그곳은 시장도 시민과 같은 화장실을 사용했다.
- 시장 면담을 신청한 이유는?
한국어 방송을 하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첫마디에 오케이를 했다. 일본어 방송, 중국어 방송은 있는데 누구도 한국어 방송을 신청하지 않았으나 이제 당신이 한다니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 뉴욕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방송을 생각한 용기도 대단하다.
FM 한국어 방송을 시작할 무렵의 나는 사람도 장비도 없었다. 중고품 시장에서 마이크와 녹음기재를 구입해 아내와 함께 녹음을 하고 서울로 지원을 요청해 지구레코드 등에서 음악테이프를 전달받아 방송을 했다. 그때는 불법 체류자가 많아 신청곡을 내보내면서 불법체류를 하는 동포와 함께 노래를 듣고 싶다는 멘트도 내보내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당시 우리 동포사회는 세탁소와 봉제공장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 광고를 얻기가 힘들었지만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해 운영이 가능했다.
- 큰 보람을 남긴 이력이다.
그때 내가 몰고 다닌 차가 델타88 고물차였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방송테이프를 가지고 뉴욕 블룩크린에 있는 송신소로 가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난 일이 있다. 방송시간이 급해 차를 버리고 아내와 테이프를 들고 미친 듯이 달렸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 8층까지 죽을힘을 다해 올라가 간신히 펑크를 안 내고 방송을 내보낸 적도 있다.
- 귀국 후 방송에 복귀하면서 기업의 사회기여(공헌)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제작방식인데 꾸준히 발전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렇다. MBC-TV가 1997년부터 이듬해까지 58회 방송한 '그대 그리고 나'는 좋은 프로그램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제작된 삼성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이었다. 일각에서 프로그램 제작을 통한 재벌의 방송 장악 음모라는 오해도 했으나 실제는 뜻이 순수했다. IMF 때 사라졌지만.
- 윤당아트홀 운영은 개인 재산으로 시작한 것인가?
샐러리맨 출신이 마련할 수 없는 재산이다. 건물주인은 문화사업에 애정이 많은 대구의 기업인이다. 미술관과 공연시설의 경영에 대한 공부를 2년간 하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임무처럼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기업인에게 예술혼을 심어주기 위한 시도에서 16주 과정의 CEO예술문화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 대학과 각종 문화행사에도 이름이 빈번하게 오르내리고 있는 것 같다.
서울예대, 추계예대, 세명대 등에서 극작부문 겸임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상명대 방송예술대학원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동양방송 퇴사 후 한동안 작가활동도 하고 연극 연출도 한 적이 있다.
- 꿈이 있다면?
제주도에는 화산이 만들어 낸 오름이 많다. 그 가운데 북제주군 구좌읍에 있는 다랑쉬 오름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공간이다. 그곳을 자연 그대로의 노천 공연장으로 만들어 세계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열고 싶다. 약 1천여 명이 참가하는 세계합창단음악제 도 꿈꾸고 있다. 다랑쉬 오름은 달이 뜨는 시간이 가장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