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가 만난 人] 윤형섭 전 장관 “현대사의 기록, 후대들 인생 항로에 도움되길”
[인터뷰365] 윤형섭 전 교육부장관, 회고록 ‘살며 생각하며-인생 구십의 보람과 아쉬움’ 출간 - 전두환 정권에 연세대 학장직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는 수난 겪어 - ‘사상계’에 군사 정권 비판적인 글 써 중앙정보부로부터 신변 위협을 받기도 - YS 요구 거절해 교육부 장관, 서울신문사장 물러나...‘공직자의 표상’으로 평가 - 떠날 땐 ‘흑자로 만들고, 장기발전계획 수립 사장 정권 바뀌었다고 교체해선 안 돼’
인터뷰365 박현수 편집위원(인터뷰어) = 윤형섭(90) 전 교육부장관(전 서울신문사 사장)이 최근 회고록 성격의 구순기념문집 ‘살며 생각하며-인생 구십의 보람과 아쉬움’(박영사)을 출간해 주목을 받고 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올바른 공직자를 찾아보기 힘든 요즘 윤 전 장관은 ‘공직자의 표상’으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숱한 일화들이 이 같은 평가를 대변한다.
윤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사상계’에 군사 정권에 비판적인 글을 써 중앙정보부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았던 이야기를 담담히 회고해 눈에 띄었다.
연세대 학생처장 시절 학생들의 문무대 군사훈련 때 교수들이 버스에 동승해 인솔하라는 정부의 지침에 반발·불복했다는 이유로 결국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사회과학대학장직을 박탈당하고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는 수난을 겪기도 한 아픈 사연들을 공개했다.
이후 교수들을 동원하지 않기로 정부 정책이 바뀌었고, 귀국 후 행정대학원장 등 학내에서 주요 보직을 맡은 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초대 회장에 이어 1990년 12월 노태우 정권에 의해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 그리고 YS와의 악연
교육부 장관 재임 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악연도 털어놨다. 1991년 당시 집권당인 민주자유당 대표였던 YS가 불러 갔더니 K대학 강원도 속초·고성 캠퍼스 설립 건을 조속히 결재하라는 요구였다. 그래서 “이 문제는 좀 더 신중히 고려할 사항이 많으니 제게 맡겨 달라”며 “이 사실이 K대학에 알려진다면 대학가의 기류를 보아 1986년의 극렬했던 폭력 시위가 재현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교육부가 주관하는 후기 대학 입학 학력고사 시험 문제지를 시험 전날 경기도 부천 서울신학교에서 도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윤 전 장관은 사태수습과 함께 사후 대책을 발표한 뒤 장관직 사표를 냈다. 사표가 수리된 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YS가 윤 장관을 해임하지 않으면 눈앞에 다가온 14대 총선을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하니 어쩌겠나”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시험지 도난 사건은 경찰청 책임 영역이지 교육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도 YS가 괘씸죄를 물어 보복을 한 셈이다.
난이증교(蘭以證交) 부채 일화...이종찬 회장 호적 주소는 윤 전 장관 집
회고록에는 난이증교(蘭以證交) 부채 일화도 훈훈한 감동을 준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가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으로 1910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산실인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에 몽땅 쏟아 붓는 바람에 가족들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특히 윤형섭 전 장관의 부친이자 우당의 제자이기도 한 일농 윤복영 선생은 우당 선생이 1913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만주에서 서울로 잠입했을 때 그를 서울 통인동 자택에 숨겨주기도 했다.
이 무렵 석파란(石坡蘭·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의 대가였던 우당은 부채에 난을 친 뒤, '蘭以證交(난이증교)'라는 글씨를 일농 선생에게 남겼다. ‘이 난초로 사귐의 증표를 삼는다’는 뜻이다. 이 부채는 윤 전 장관이 간직해 오다 2009년 11월 17일 우당기념관에 기증했다. 11월 17일은 우당의 기일이자 윤 전 장관 부친 일농의 기일이기도 하다.
우당과 일농의 인연은 우당이 1932년 대련 감옥에서 옥사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우당 선생 가족들이 만주 망명 후 국내에 다시 들어와 거처할 곳이 없자 통인동 자택 사랑채에 거처를 내 준 일화도 회고록을 통해 공개됐다. 그래서 우당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광복회 회장 (전 국정원장) 일가의 본적지가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다. 윤 전 장관이 태어나고 살던 집이다. 1925년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한 우당 선생의 부인 이은숙이 일농 집에 머물며 중국에 있던 우당 일가의 생계를 위해 집 안에 재봉틀을 놓고 삯바느질을 하는 곳인 내재봉소(內裁縫所)를 차렸다.
윤 전 장관은 "일제 말 아버지는 저희 3형제를 매일 밤 거의 강제로 적선동 설렁탕집에 자주 보냈는데 해방 후에야 그 식당이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독립운동 자금 공급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회고록은 간행위원장을 맡은 김영래 전 동덕여대 총장을 비롯해 18명의 제자가 출판비를 감당하며 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30년 전 회갑 기념 문집에도 참여한 멤버들이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정에 변함이 없다. 그만큼 윤 전 장관의 인품과 제자 사랑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윤 전 장관은 이들과 지금까지도 정기 모임을 가질 정도로 관계가 돈독하다. ‘일향회’가 그것이다. 그는 남들로부터 “제자 복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다.
윤 전 장관은 “내가 겪은 현대사의 기록들을 제자뿐만 아니라 후대들의 인생 항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장관직 사임 후 서울신문 사장 첫 출근 날 붙은 노조 대자보
그는 교육부 장관직을 사임한 이후 유력 일간지인 서울신문사 제21대 사장으로 임명됐다.
6일 ‘인터뷰 365’와 가진 인터뷰에서 윤 전 장관은 서울신문 사장 재직 시 있었던 일에 대해 소상히 회고해 눈길을 끌었다. 사장으로 임명돼 출근하던 첫날 1층 로비에 ‘장관만 하면 서울신문사 사장이 되는 거냐‘ 라는 노조 대자보가 붙었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신문사를 떠날 때는 ‘단기간에 적자를 흑자로 만들고, 장기발전계획까지 수립한 사장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교체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노조 성명서가 1층 로비 같은 자리에 붙었었다고 회상했다.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운영실태를 조사해 보니 적자투성이 상태였습니다. 사원 수가 무려 1,600명이나 됐지요. 조선일보를 비롯해 모든 신문사 가운데 가장 많았어요. 그래서 처음 한 일이 임원 회의에서 정년퇴직은 물론이고 사표 내는 사람들이 있거든 반려하지 말고 수리하라, 그리고 빈자리에 내 허락 없이 충원하지 말라고 지시했지요.”
그렇게 해서 큰 파동 없이 사원 수를 많이 줄였다고 했다.
또 취임 후 편집국에 처음 들렀더니 기자 두 명이 벌떡 일어나 “교수님”이라며 인사했는데, 연세대 정외과 1980년대 학번 제자였다. 그러나 “떠나는 날까지 한 번도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무척 서운해 했을 것”이라며 “아직까지도 그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들은 현재 집권 여당과 청와대에서 실세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서울신문 사장으로 있으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인연도 많이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평소 매우 가깝게 지내던 고위층에 있는 분들이 사장실로 찾아와 인사 청탁을 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계가 아주 소원해진 사람도 여러 명 된다. 심지어 직원 가운데 매우 가까운 친척도 있었는데, 사고를 냈다는 보고를 받고 예외 없이 중징계(해임) 했던 일을 지금도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다. 윤 전 사장은 그만큼 강직하고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서울신문사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최근 서울신문사가 서울 세종대로에서 양재동으로 이사하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데 대해 “서울신문 사옥을 초현대식 건물로 새로 짓는다니, AI(인공지능)시대에 현대화된 최첨단 시스템에서 신문의 질도 더욱 높아지고 괄목할만한 발전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90세 건강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절제’, ‘양보’ 그리고 ‘관용’의 삶
올해 아흔인 윤 전 사장은 매우 건강하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평생 ‘절제’와 ‘양보’ 그리고 ‘관용’을 생활철학으로 삼고 살았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윤 전 장관은 서울로 모임을 갈 때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이것만으로도 대략 3000보는 걷는다. 하루 5000보 걷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다.
지난해 운전면허증도 새로 발급받았다. 오로지 3살 연하 부인의 운전기사를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끔찍한 애처가다. “아내 손에 물 묻히는 것이 보기 싫어 없는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외식을 자주 한다”고 들려줬다. 메뉴도 부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정한다. “부인이 결혼 전부터 약한 체질인데다 그동안 공직과 연구 활동을 하면서 가정에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배경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아내가 목 디스크로 앓아누워 간병하느라 열 달 사이 몸무게가 6kg이나 빠졌어요.” 다행히 지난 7월 강원도 평창군 횡계에서 3주간 휴가를 보내고 나서 부인의 목 디스크는 거의 회복된 상태다.
그의 가훈은 여느 가훈과 달리 특별나다. 많이 길다. 일명 ‘일민 형섭 가훈 10개 조’다. 그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라’다. 보잘것없는 작은 일일지라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하고 그럴수록 더욱 철저하고 정밀하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잉 747이 엔진 나사못 하나로 추락하고 큰 둑이 쥐구멍으로 무너진다”면서 “작은 일이 모여 큰일이 되는 만큼 큰일이 작은 일로 망가진다”고 했다. 그래서 주위에서 그를 ‘완벽주의자’라고 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장로로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고, 지금은 원로장로를 맡고 있다.
그는 고령층이 되면 첫째 남들과 의견충돌이 일어날 때 져주는 법을, 둘째, 모임 초청을 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젊은 후배들에게 폐가 될까 두려워서란다. 그래서 요즘 특강 요청이 와도 응하지 않고, 송년회를 비롯해 각종 모임에도 가급적 참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1933년 서울 종로구 통인동 128번지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를 나와 1953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이곳에서 석·박사학위까지 마쳤다. 그리고 미국 존스 홉킨스대와 하버드대에서 연수도 했다. 1966년부터 1991년까지 연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정외과 주임교수와 학생처장을 비롯해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학내에서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학자의 외길을 걸었다.
민주주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이론가이자 자존심이 강한 지도자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사학의 전통과 명예를 살리고 사학의 권위를 지키는 일에 굽힘이 없었다.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올곧은 스승이라는 이미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훈장(訓長)이 가업’이라고 말할 정도로 집안 식구 중 교육계 종사자가 23명이나 되어 ‘친척이 모두 모이면 소교련(小敎聯)’이라고 불렸다. 서울시교육위원회 자문위원을 시작으로 대한교육연합회장을 거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까지 교권 운동과 교육 활동에 오랜 시간 몸담았고, 1990년 12월 제31대 문교부 장관이자 초대 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교육의 자율화’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교원 지위 향상을 위한 특별법’을 성취하는 한편 6차 교육과정 개정안 통과 등 정책 성과를 달성했다.
1992년 1월 교육부 장관직을 물러난 이후에도 합리적인 문제해결사로 종횡무진 활약해 서울신문사 사장, 건국대 총장,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 대통령 직속 반부패특별위원장, 호남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길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정치학회 회장, 건국대와 단국대, 명지대 석좌교수, 연세대와 단국대 이사를 거쳐 지금은 교육계 원로로서 학교법인 홍신학원 이사장으로서 42년간, 그리고 과 연세대 명예교수, 한국정치학회와 대한노인회, 연세대 총동문회 고문 등을 맡고 있다.
저서는 ‘한국 정치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의 정치문화와 교육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 정치론’, ‘한국 정치과정론’,‘정치와 교육’ 등이 있다.
윤 전 교육부 장관은 대한민국 교육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16회 경복동문대상, 연세대 총동문회 자랑스런 연세인상, 국민훈장 모란장, 청조근정훈장, 연세대창립기념 학술상, 대한교련 교육특별공로표창, 국민훈장 동백장, 육군사관학교 공로표창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