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복싱의 '생활스포츠화'에 앞장선 80년대 스타복서 이상호
- 한국권투인협회 이상호 회장 인터뷰 - 1980년대 ‘KO펀치’의 미남 선수로 인기누려 - 한국권투인협회 회장으로 전국생활복싱대회 연 4회 주관...복싱 저변 확대 앞장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권투선수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복싱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1966년 이탈리아 벤 베누티를 누르고 WBA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의 등장 무렵부터 라디오와 TV 스포츠 중계방송에서 최고 인기 종목은 복싱이었다. 이상호(1959∼ ) 한국권투인협회(KBI) 회장도 1980년대에 이름을 날린 ‘KO 펀치’의 미남 선수로 인기를 누렸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웰터급 1위와 OPBF(동양태평양복싱연맹) 챔피언을 거친 그의 프로전적은 48전 46승 2패로 그중 39회 KO승의 기록을 남겼다. 복싱선수의 등용문이었던 1980년 MBC 신인왕전에서 이상호 선수가 최우수선수상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할 때 전국에서 프로 데뷔를 꿈꾸는 선수지망생이 자그마치 386명이나 출전했다. 그때 나중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 된 장정구가 우수상을 받았고 역시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던 백인철도 우수선수로 선발됐다.
이상호 회장에게 성장기부터 권투선수에 대한 꿈과 열망을 안겨준 사람이 ‘4전 5기’의 신화를 만든 홍수환 선수였다. KBI 단체를 창립할 때도 홍수환 선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고 이상호 후배 선수는 사무총장을 맡았다. 지금 이상호 회장의 KBI는 권투인들의 단순한 친목 단체로 머물지 않고 비인기 종목으로 밀려난 복싱운동의 활성화와 복싱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전국생활복싱대회를 매년 4회에 걸쳐 개최하고 있다.
김기수, 홍수환을 비롯해 유제두, 염동균, 박찬희, 김태식, 장정구, 유명우 등의 선수들이 세계챔피언으로 남긴 뜨거운 투혼과 화려한 발자취를 창립 정신으로 이어가는 복싱선수들의 단체, 한국권투인협회 이상호 회장을 만났다.
마음 모아준 비운의 복서 최요삼
- 한국권투인협회 창립 배경은?
“세계복싱기구(WBO) 플라이급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이었던 최요삼(1974∼2008) 선수가 방어전 경기의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 우리 권투인들의 마음을 모으게 했다.
그는 2007년 12월 서울 광진구민체육센터에서 개최된 1차 방어전에서 인도네시아 챔피언 지낸 헤리 아몰 선수를 3-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제압했지만 경기 직후 바로 정신을 잃었다. 곧장 용산에 있는 순천향대학병원으로 후송돼 뇌수술을 받았으나 뇌사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가족의 뜻으로 6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35세에 그는 눈물과 피와 땀에 젖은 글로브를 벗어놓고 삶을 마감했다. 불꽃같이 피어난 그의 복싱 인생은 스무 살 때 프로 선수로 링에 올라 1996년 라이트 플라이급 동양 챔피언, 1999년 대망의 WBC(세계복싱평의회)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이 되었으나 방어에 실패, 한때 은퇴를 선언하고 다시 재기한 곡절도 따른다.”
- 최요삼 선수 사망을 계기로 권투인들이 협회 창립의 마음을 모은 것인가?
“그의 장례식장에 모여든 선후배 선수들이 다 같이 우리 스스로가 권익을 지키고 친목을 나누는 모임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최요삼에 앞서 1982년 김득구 선수의 사망사고 악몽도 이때 다시 부각되어 한국권투위원회(KBC)의 선수 건강 보호 개선책이 논쟁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장례식장에는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운집해 한층 권투선수에 대한 관심이 달아올랐다.”
- 2009년 1월에 발매된 힙합 그룹 리쌍의 앨범 ‘백아절현’에 수록된 ‘챔피언’이 최요삼 선수를 추모하며 만들어진 노래였다. 리쌍의 멤버 개리는 평소 최요삼과 두터운 우정을 나눈 사이로 알려지기도 했다.
“어쩌면 국민적 관심을 모은 프로 권투선수의 마지막 스타로 최요삼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점점 복싱경기도 비인기 종목으로 관심을 끌지 못하고 한때 후속 스포츠로 격투기 경기가 활기 있게 발전했지만 역시 시들해졌다. 인기 스포츠 경기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이끌어 간다. 권투가 인기를 잃어가면서 프로선수도 점점 줄어들어 우리 단체가 해야 할 일이 복싱 꿈나무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창립 초기부터 연 4회 분기별로 전국생활복싱대회를 개최해 왔다.”
-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행사인가?
“매년 초등, 중등, 고등부 등 학생들과 20대에서 30, 40, 50대 남녀별로 나누어 연간 1500명 이상이 출전해 기량을 겨루는 경기인데 올해 58회를 맞이해 오는 11월 25일부터 이틀간 서울 마포구민체육센터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육상선수로 활약하다 홍수환 선수 동경해 복싱 입문
- 권투선수가 된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강원도 원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운동 감각이 특출했던 것 같다. 특히 서울로 유학해 상도중학교에 다닐 때는 육상선수로 활동했다. 지금도 구순 가까이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는 아버지의 건강 체질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어릴 때부터 달리기가 특기였던 어머님(타계)의 운동 DNA를 더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 운동 가운데 왜 하필 복싱을 택하게 됐는지?
“내 꿈의 길잡이는 홍수환 선수였다. 1977년 WBA가 신설한 주니어 패터급챔피언 결정전에서 파나마의 카라스키야에게 2라운드에서 네 차례 다운을 당하고도 일어나 통쾌한 역전 KO승을 거둬 ‘4전5기 챔피언’의 신화를 이룬 그가 롤 모델이었다. 그런 선수를 동경하며 복싱 체육관을 찾았고 1980년 MBC가 주관한 신인왕전에 출전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장정구가 우수상 선수로 선발되었고 백인철도 그때 함께 등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계챔피언을 거쳤지만 나는 동양챔피언(OPBF)에 WBA 주니어 웰터급 1위까지 올랐으나 챔피언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프로전적 48전 46승 2패에 39KO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선수가 아닌가?
“권투 시합은 상대를 언제 어디서 누굴 고르느냐가 결정적인 성패를 가르고 진로를 좌우한다. 상대 선수의 공격과 방어술에 관한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비, 철저하게 기술적 전략적 준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진 운도 따라야 한다. 나는 프로 데뷔 후 1983년 10월 필리핀의 알란 알게리아 선수와 대전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당했다.
이어서 이듬해 1월 재기전에서 멕스보이 도요곤 선수를 1라운드에서 KO시키고 재기에 성공한뒤 같은 해 3월 알란 알게리아 선수와 재대결해 7회 KO승으로 설욕, 시원하게 제압했다. 내가 WBA 주니어 웰터급 세계 1위 시절이었다.”
통산 48전46승2패(39KO승) 스타복서로 활약...그리고 이른 은퇴
- 은퇴 전후의 상황을 들려 달라.
“1988년 5월 이탈리아 로제토시에서 베네수엘라의 후앙 마르틴 코지의 세계 타이틀 방어전에 도전했다가 2회 KO로 패하면서 선수 활동 8년 만에 은퇴를 발표했다. 서른 살 때였다. 그 후 학업으로 진로를 돌려 한양대 체대를 졸업한 나는 다시 경영학과 3학년에 학사편입, 졸업하고 이어서 경원대 재단 김동석 이사장의 권유로 경원대 대학원에 진학, 교수의 꿈을 키웠다. 그분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까지 떠났지만 김 이사장께서 교통사고로 타계한 뒤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중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 무렵에 선배의 요청으로 충무관광호텔 총지배인의 직장 생활도 경험했다.”
- 서울에서 한때 체육관을 운영했다는데
“나와 아주 깊은 인연을 나눈 분 중에 재일동포 부동산 사업가 한 분이 있었다. 일본에서 양광그룹이라는 부동산기업을 설립해 크게 성공시킨 사업가 문민부 회장이었다. 그분이 1989년 체육관을 열어 운동선수를 양성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을 듣고 당시 거액인 7천만 원을 조건 없이 선 듯 지원해 주셨다. 그 돈으로 수유리에 큰 규모의 체육관을 운영하는 중에 문민부 회장의 기업이 부도를 내고 파산되면서 체육관 운영도 3년 만에 감당할 수 없는 운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나는 다시 길을 바꾸어 압구정동에서 일식 음식점을 차려 제법 재산을 모을 때도 있었다.”
복싱운동 저변 확대 앞장..."한때 방황도 했지만, 행복합니다"
- 살아온 길이 평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가?
“나는 선수 시절 정말 내 주먹의 힘이 강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링을 오려 내렸고 대개는 KO 펀치가 통했다. 상대가 누구든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안 하고 무소불위 자만심으로 가득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두번 실패를 하면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좌절에 빠지기도 하고 운을 탓하기도 했다. 사실 나의 경기 전적을 보고는 게임 상대로 불러주는 선수가 많지 않았다. 자신 있게 상대가 되어 준 선수들은 역시 강자들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지면 그만두겠다고 마지막 시합을 하며 링에 오를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나오더라. 패하고 난 뒤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대가 큰 만큼 꿈이 순식간에 무너졌을 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함을 느꼈다.”
- 10년 미만의 선수 생활이 너무 짧아 회한도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때 나는 여행을 다녔다. 차를 몰고 국내 가볼 만한 곳을 찾아 무작정 돌아다녔다. 한때 운행기록이 연간 7만5000㎞에 이르기도 했다. 때로는 가방을 메고 해외로 떠나기도 했다. 가정이 안정되지 않아 사생활 면에서 변화도 많았지만, 지금은 가정도 사회활동도 모두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