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아! 우리 인생에 건배를...연극 '목련아래의 디오니소스'
- 내 청춘의 자화상...김명화 작·연출 '목련아래의 디오니소스' - 술과 연극, 꽃과 향기가 청춘의 푸르름으로 피어오르다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내 젊은 날의 낭만과 아스라한 추억을 떠오르게 한 연극.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죽은 줄 알았던 청춘의 세포들이 살아나는 전율은 나만 느낀 것일까.
15일 꿈빛극장에서 김명화 작·연출 ‘목련 아래의 디오니소스’(10월 12~15일)를 보면서 희곡도 연출도 좋았지만, 다섯 명 배우들이 모두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사랑하고 죽고 아리고 서늘한 우리네 감정을 일상의 아우라로 보여주어서 그랬으리라.
디오니소스로 가기 전에 7장 ‘백부의 춤’에서 기가 막힌 독백으로 필자의 눈시울을 적신 박상종 배우의 연기와 8장 ‘라일락이 필 때면’에서 배우들이 윤창으로 엮어낸 정한이 서린 감정의 앙상블에 대해 먼저 얘기하고 싶다. 그리스 신화와 술과 인생을 논하는 이 작품에서 순수 우리 정서로 표출되는 이 두 개의 장면이 백미이기 때문이다.
박상종은 최근 ‘벚꽃동산’과 ‘만선’에서 개성있는 역할을 해낸 연기 잘하는 배우로만 알았는데, 이 작품에서 기른 정으로 아들을 찾아온 떠돌이 술주정뱅이 역할은 그야말로 적역이었다.
술에 대해 얘기하다가 노스(박상종의 극중 이름)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던 백부를 회상한다. 작가는 그 장면 묘사를 위해 목련 나무 아래서 백부의 춤을 재연토록 연출했다. 그때 아주 짧은 순간에 받은 찰나의 환영으로 평생 술을 마시며 떠돌았다는 독백이 왜 그리 처연하면서 저리게 눈물샘을 자극하던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필자는 극 중 노스가 내 분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목련이 필 때면 처음 마신 술을 떠올리고 꽃이 질 때면 옛사랑을 기억하리.”
다섯 명의 배우들이 ‘라일락이 필 때면’으로 시작해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에서 패랭이꽃까지 화두로 자신의 감정을 노래하는 장면은 남도민요의 윤창(輪唱)처럼 폐부를 파고들어 가슴을 울렸다.
공연예술 창작산실로 선정된 김명화의 이 작품은 희랍 신화 속에 현대인의 일상을 녹여낸 희곡 그 자체도 뛰어나지만, 희곡의 언어들을 배우들의 육성으로 실어낸 연출까지 섬세하면서도 똑 부러져 1시간 40분이 후딱 흐른다. 작가는 고대 신화 속 인물들의 상황과 현실을 사는 등장인물의 관계를 절묘하게 대비시켰다.
술과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는 이 무대에서 카페 이름이며, 등장인물들 이름도 소스(서태성), 아리(서진), 피스(노준영) 카루(서정식)와 노스 등 신화에서 따왔다.
다섯 명의 배우들은 무대에서만 보았지 친분이 없는데도 100분 공연 동안에 금방 친숙해졌다. 카페 디오니소스를 경영하는 소스 서태성은 배우 지망생이면서 아리 서진과 러브라인을 이루며, 의붓아버지에게 술지게미를 받아먹고 자란 캐릭터를 서글서글한 인상과 일상성을 살린 편한 연기로 소화해냈다.
이 작품에서 배우들은 한 번씩 개인기를 펼치는데 상복을 입은 여인 서진의 술주정과 신화2, 작가 지망생 노준영의 해설과 포도주 취중 연기, 그리고 외모부터가 튀는 카루 서정식의 한강 투신과 구더기, 자살소동으로 이어지는 선 굵은 연기도 일품이었다.
작가는 저마다 상처가 드러난 다섯 인물을 건배로 화해시키면서 희랍 최초의 배우로 꼽히는 테스피스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극 중 극과 랩도 재미를 더하는 요소인데, 희랍 신화 배경의 작품인 만큼 극 중 살롱극 소재는 현실적인 우리 얘기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어처럼 부드러운 대사와 목련꽃 아래 흐드러진 이야기를 카페 테아트르 같은 술집에서 보여주는 ‘목련 아래의 디오니소스’는 창문과 꽃과 향기 속에 우리네 시린 추억과 아픈 상처를 보듬어 모처럼 상큼한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었다.
필자는 영어도 모르면서 타임지를 끼고 다니며 낭만을 외치던 내 청춘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풋풋한 감정이 피어오르고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서둘러 극장을 나오는데 김명화 연출이 분장실 배우들을 보고 가라는 말을 뿌리친 게 못내 아쉽다. 작가 연출 배우들과 술 한잔하며 늦도록 얘기하고 싶은 공연이었다.
10월 20~21일 부평아트센터 대극장, 10월 27~28일 진주 현장아트홀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