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나진환 표’ 연극의 매력, ‘햄릿 걷는 인간’

- 3시간 넘는 대작...‘햄릿’과 ‘걷는 인간’ 2편을 본 기분 - ‘햄릿’ 해석 우아하고 신선...‘걷는 인간’은 해설 많아 장황 - 나진환 표 ‘햄릿 걷는 인간’ 한윤춘 리다해 김찬 임윤비 등 핵심 배역 연기 빛나

2023-10-13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극 ‘햄릿 걷는 인간’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나진환 연출의 ‘걷는 인간’ 2편을 동시 공연으로 본 느낌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높은 관객이 1편으로 볼 연극을 필자는 2편으로 나눠 본 것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극단 피악의 나진환 각색 연출로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햄릿 걷는 인간’(~10월 22일까지)은 인터미션 15분 포함해 3시간 30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처음 접한 관객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나진환 연출작을 지속해서 보아 온 찐 관객들에게는 210분은 그리 긴 편이 아니며, 끊임없이 펼쳐내는 연극적인 행위에 빠져들면 한눈팔 새도 없다. 그가 연출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2부는 7시간에 달했고,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단테 신곡-지옥편’ 등도 대담한 연출 기법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긴 대작들이다.

극단 피악과 나진환 연출은 수년 동안 고전 작품을 재해석한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를 공연해 왔다. 열악한 제작 환경과 관객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마니아들에 의해 ‘나진환 표’ 공연들은 명작의 대명사가 되었고, 온 몸을 던져야 하는 극한 연기지만 정동환, 한윤춘 등 연기파 배우들이 기꺼이 참여해 격을 높여왔다. 필자도 어느새 찐 팬이 되었다.

이번 공연을 보면서 여러 영감과 생각들이 교차했다. 필자의 주관이지만 ‘나진환 표’ 작품에서 새로운 장점을 발견한 반면, 인문학적 해석에 점점 설명이 많아지고, 주관이 드러나고, 기법의 반복에서 오는 여러 단점들이 한 무대에 얽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점부터 말하면 그간 수많은 버전의 ‘햄릿’을 보았지만, 나진환 연출의 ‘햄릿’ 원작 재해석은 핵심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와 신전(神殿)을 본뜬 대칭 무대(디자이너 임일진)에 주요 장면들이 고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한 미장셴으로 펼쳐져 이해가 잘 되었고 울림도 느껴졌다.

핵심 배우란 햄릿 역 한윤춘, 클로디어스와 선왕 역을 함께 해낸 김찬, 왕비 거투르드 역의 리다해, 오필리어 역의 임윤비를 아우른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한윤춘 배우였다. 3시간 동안 종횡무진, 숱한 변신으로 무대를 누빈 폭발적인 연기는 열정과 몰입 그 자체였다.

여기서 ‘걷는 인간’ 쪽을 빼고 셰익스피어 재해석 부분만 보면, 한윤춘은 우유부단과 광기의 캐릭터로 오필리어와 애틋한 연정을 나누고, 어머니 거투르드와 천륜의 연민을 쏟아내며, 선왕에게 마음 아파하면서도 클로디어스와 당당히 맞서는 4중주의 중심에서 중후하면서도 파워풀한 연기를 보였다. 특히 연륜에서 배어 나오는 유연함과 들리는 화술은 이 배우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 공연을 보면서 김찬이라는 배우를 새삼 발견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단테 신곡-지옥편’에서 눈여겨보았던 그는 ‘세자매, 죽음의 파티’에서 한껏 물오른 매력을 드러내더니, 이 작품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두 개의 캐릭터를 상반된 이미지로 소화해 내며 연기파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삭발에 상반신 노출로 배역에 몰입한 자세도 돋보이지만, 고전극부터 현대극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그의 미래를 지켜볼 만하다.

거투르드 역 리다해도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였다. 전작 ‘세자매 죽음의 파티2’에서 열정과 매력을 한껏 드러낸 그는 격변의 무대에서 중심을 잡으며 욕정과 모정을 오가는 인간적인 연기를 의젓한 자태와 당당한 화술로 해냈다.

오필리어 역 임윤비는 처음 접한 배우이나 이제껏 본 어떤 오필리어보다 청순했으며, 자기 주관을 지닌 적극적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이들 주요 배역과 함께 중견 배우들이 호연해 ‘햄릿’과 ‘걷는 인간’의 가교 역할을 잘 해주었다. 폴로니어스와 무덤지기 역의 이기복, 호레이쇼 역의 유진우, 레어티어스 역 전현철도 ‘햄릿’ 부분을 잘 받쳐주었다. 나진환 연출도 극 중 극 대표 배우로 출연했다.

이 주옥같은 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을 갉아먹은 최대의 적은 무선마이크였다. 대사전달은 잘 될지 모르나 거리나 공간감을 현저히 방해한 것이다. 육성으로 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이번 공연의 단점은 인문학적 성찰이 지나쳐 철학 강의처럼 장황해진 것이라고 필자는 느꼈다. 나진환 연출은 햄릿을 ‘걷는 인간’ ‘행동하는 인간’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불안, 망설임, 고통, 두려움, 이성, 광기 등의 화두를 내걸었고, 여기에 비장의 연출 기법(물, 춤, 물감칠하기, 벗기 등등)을 총동원해 체력을 소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막은 무덤 장면에서 시작해 결투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나진환 작 연출의 ‘걷는 인간’ 한 편을 그 안에 포함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햄릿은 행동하는 걷는 인간”이라고 크게 한번 방점을 찍었으면 좋았을 것 같았는데, 연출자는 이래도 안 믿겠느냐는 듯이 여러 상황과 언어로 걷는 인간임을 거듭 강조했다.

비장의 연출 무기들도 처음 접했을 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나 여러 작품에 잇달아 나오면 감동이 반감되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연출의 의도는 알겠는데 너무 인문학의 늪에 깊이 들어가 연극적 요소를 약화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렇더라도 나진환이 아니면 누가 이런 작업을 할 것인가?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수도승의 고행을 방불케 하는 지난한 과정에 연기파 배우들이 기꺼이 뛰어들어 희열을 느낀다는 나진환 표 연극의 매력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