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14) 꿈에 그리던 교토를 다시 가다
- 여행 13일차, 마지막 여행지 교토...시내 곳곳 누비며 벚꽃 엔딩
▶(13)백제 후손이 지배한 메이지유신 발상지, 야마구치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여행 13일차, 3월 30일이다. 내일은 아침에 간사이 공항으로 가서 귀국 비행기를 타야하니 오늘이 사실상 마지막 여행날이다. 아침 7시 39분 신야마구치역를 떠나 2시간이 채 안 된 9시 37분 신오사카역에 도착했다. 역 인근의 호텔에 가방을 맡겨두고 다시 역으로 나와 교토로 향했다.
지난번 패키지여행 때는 교토의 동쪽 교외 기요미즈데라(淸水寺)와 서북쪽 교외 아라시야마 지역만을 봤기에 교토 시내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오늘에야 그동안 그림 엽서나 책에서만 보아왔던 꿈에 그리던 교토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설레임으로 교토로 향했다.
일일승차권으로 교토 시내를 누비다
교토는 열흘 전과는 달리 벚꽃이 만개하였고 관광객들로 북새통이었다. 역구내의 관광안내소에서 오늘의 목표인 니조성(二條城), 금각사(金閣寺), 은각사(銀閣寺)를 어떻게 찾아갈지 대충 설명을 듣고 메트로, 버스 일일승차권을 샀다.
여행을 할 때는 관광안내소부터 찾아가서 설명을 듣는 게 필수적이다. 설령 그 지역을 좀 알거나 책자를 통해 사전에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결국 시간과 노력을 덜어준다. 알고 있는 걸 묻더라도 다른 대답이 나오고, 그래서 또 배운다.
우선 전국시대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부하였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급습을 받아 자살한 역사의 현장인 혼노지(本能寺)를 찾아보기로 하고 교토역에서 그린선을 타고 가라스마마오이케(鳥丸御池)역에서 내렸다.
인근의 일본인에게 길을 물어보고 4~5 블록을 걸어왔지만 혼노지는 오리무중이어서 또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방향을 잘못 잡고 한참이나 걸어온 게 아닌가. 그래서 혼노지는 포기하고 바로 니조성으로 갔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란 말이 있지만 나의 교토 시내 답사는 혼노지에서부터 꼬였다.
교토 시내를 걷다 보니 이 도시가 천몇백 년 전에 세워진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리가 반듯반듯하다. 당나라 장안을 모델로 초기에 도시를 건설할 때부터 이런 모습을 갖추었다 하니 놀랍기만 하다. 마치 신도시 같은 느낌이다. 이건 도쿄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의 지혜가 놀랍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토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교토'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토의 '고도'라는 인상은 거리구획으로 상정된다. 이 장대한 구획을 설계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성을 건설한 정치력과 경제력은 과연 어디에서 탄생한 것일까"
천하 통일의 마지막 승자 이에야스의 교토 거소, 니조성
거의 40~50 분 이상을 걸어와 니조성까지 왔는데, 티켓 줄이 보통 긴 게 아니다. 쇼군의 거소였던 니조성은 기대 이상이었다. 정문인 카라몬(唐門)의 화려함과 섬세함, 그리고 니노마루궁의 천장 조각이나 벽화는 우리의 궁궐 건축 양식이나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시 문의 형태는 그 가문의 지위를 나타낸다. 카라몬은 가장 높은 지위의 문이다. 우리 건축물에서는 저렇게 공들인 문은 없지 않은가. 니노마루궁의 조감도를 보면 6개의 건물이 마치 기러기떼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런 건물 배치도 사실 우리 건축에선 볼 수 없다. 완벽한 좌우 대칭보다는 약간의 파격의 미를 추구하는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니노마루궁 33개의 방에는 벽이나 병풍에 그려진 쇼헤키가(障壁畵, 쇼헤이가(障屛畵)라고도 한다)가 3,600여 점이 있다. 크고 작은 쇼군의 접견실에는 소나무나 벚꽃, 매나 호랑이 등을 금박의 바탕 위에 큼직큼직하게 그려넣어 방들을 장식했는데, 웅장하면서도 화사롭기 그지없다. 경탄을 자아낸다.
당시 가노파(狩野派)의 대표자였던 가노단유나 그의 동생인 가노나오노부의 작품이다. 조선의 궁궐에서 느꼈던 약간의 침침함과 삭막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궁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 사진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였던 모모야마(桃山) 시대(1573~1603년)에는 아즈치성(安土城), 히메지성(姬路城), 오사카성(大阪城) 등 많은 성들이 축성되었고 벽이나 병풍에 그림을 그려서 방들을 장식했다.
일본 건축과 디자인의 황금기인 모모야마 시대에 만들어진 니노마루궁과 정원은 아름다웠다. 정원의 중앙 연못에는 봉래, 학, 거북의 섬이 배치되어 있는데, 큼직큼직한 돌의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이 정원은 니노마루궁의 쇼군의 거소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니조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직후인 1601년 서부의 영주들에게 축성을 지시하여 1603년에 완공하였다. 도쿠가와 시대의 정궁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는 지척에 있는 당시 천황이 살던 황궁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성을 지어서 자신이 새로운 권력자로 등극했음을 보여주려 했다.
1603년 천황의 명으로 쇼군이 된 이에야스는 이 성에서 다이묘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쇼군이 되었음을 알렸고, 도쿠가와 시대의 막바지인 1867년에는 마지막 쇼군이었던 요시노부가 40개 한(藩)의 대표단에게 국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돌려주겠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여기서 선포했다. 이 대정봉환의 역사 현장은 밀랍인형으로 당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중신들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러니까 일본 번영의 기초가 된 260여 년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이곳에서 시작하고, 이곳에서 끝났다.
무로마치막부의 정치 중심지였던 금각사에서 기타야마(北山) 문화를 꽃피우다
니조성에서 나와 금각사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사찰이 오후 5시까지만 입장객을 받기 때문에 금각사를 본 후 은각사까지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금각사와 은각사의 일본어 발음은 킨카쿠지와 긴카쿠지다.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기사에게 재차 확인했다. 금각사의 정식 이름은 로쿠온지(鹿苑寺)이고, 은각사는 지쇼지(慈照寺)다. 금각사, 은각사는 무로마치 막부 시절 14세기 말과 15세기 중반기에 각각 조성되기 시작한 임제종에 속하는 선종 사찰이다.
금각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최고조에 달했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1397년 그의 저택으로 지었던 기타야마도노(北山殿)를 그의 사후 사찰로 조성한 것이다. 당시 요시미츠는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고, 천황의 칙사나 명나라의 사신을 이곳에서 맞았으니, 무로마치 막부의 청와대였으며, 여기서 하나아와세(꽃꽂이모임)가 열리기도 했다.
지천회유식 정원을 끼고 있는 금각(사리)전은 3층 누각으로 1층 법화원은 헤이안 시대의 공가식(公家式) 침전조 양식이며 3층의 구쿄초(究竟頂)는 무가적(武家的) 선종 양식의 불당이다. 1950년 화재로 소실되어 1955년 재건하였다.
무로마치 시대(1333~1573년)에는 금각에서 보듯 무가(武家)와 공가(公家)의 문화가 융합되었고 선종의 영향이 뚜렷해지면서 정원, 건축, 회화에 소위 "와비, 사비"라는 간소하면서도 예스런 단아함이 녹아들게 되었다.
건축에서는 서원조가 새로운 주택 양식으로, 정원에는 돌과 모래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가레산스이 양식이, 회화에는 본격적인 산수(山水)나 꽃과 새를 그린 수묵화가 나타났고, 노(能)와 다도(茶道)가 유행했다.
"와비 사비"의 단아함이 드러난 히가시야마(東山) 문화의 발상지, 은각사
금각사를 본 후에는 버스를 타고 은각사로 이동했다. 은각사는 무로마치의 권력이 쇠약해진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1482년 산장으로 조성한 히가시야마도노(東山殿)가 그 시초가 되었다.
2층 누각인 은각(관음)전의 1층은 서원조로 요시마사의 서재였고, 이층은 관음보살이 모셔진 관음전으로 선종 양식이다. 은각의 동북쪽에 있는 도구도(東求堂)의 도진사이(同仁齊)에서 열렸던 차 모임은 오늘날 다도 문화로 이어졌다. 은각은 착공 후 오닌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완성인채로 남았다. 은각에 은이 없는 이유다.
그러나 금각과 달리 은각과 도구도는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당시 서원조 주택이나 선종 양식의 사찰과 가레산스이 정원, 그리고 노(能)와 다도(茶道)에는 무가가 선호한 선(禪)의 정신이 짙게 배어있다. 이것이 금각사와 은각사로 상징되는 기타야마 문화와 히가시야마 문화다.
은각의 동쪽 정면에 킨쿄치(錦鏡池)라는 연못을 끼고 있는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13세기 사이호지(西芳寺) 정원을 모델로 했다. 교토의 서쪽 외곽에 위치한 사이호지는 이끼 정원으로 유명한데, 불교의 서방정토를 재현한 것이다.
존 카터 코벨 여사는 7세기 아스카 강 언덕에 있는 한반도 도래인 소가 우마코의 집에 백제인이 설계한 정원이 있었다면서 여기서부터 일본의 정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정원의 특징이 바로 안마당에 돌을 넣고 연못을 파서 한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수미산의 서방정토를 재현한 것이다.
은각사의 정원은 많은 일본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주위 자연경관을 활용하여 산자락과 평지를 조화롭게 입체적으로 조성한 정원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돌과 물이 정원의 이끼, 화초, 수목들과 어우러져 있다. 여기에 가레산스이 양식의 흰모래의 고게쓰다이(向月臺)와 긴샤단(銀沙灘)이 더해졌다. 이끼 정원과 초목, 산수는 철마다 옷을 갈아입고 일본식 정원의 진수를 보여준다. 나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각보다는 작지만 더 섬세한 은각에 마음이 쏠렸다.
사색을 불러오는 철학의 길에서 벚꽃 향기에 취하다
이번 일본여행에서 은각사에서 처음으로 기념품을 샀다. 냉장고 같은 데 붙여놓고 볼 수 있는 마그넷을 두 개 샀다. 은각사를 보고 나오면서 '철학의 길'을 만났다. 내가 마치 철학자가 된듯 만개한 벚꽃의 향기를 흠뻑 만끽하면서 좁은 물길을 따라 1㎞ 정도를 걸어 나왔다.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들어오니 어느덧 밤이 찿아왔다. 교토의 첫 일정으로 보려던 혼노지 터는 결국 못찾았다. 길 가던 행인에게 혼노지를 물어 찾아갔더니 혼노지가 아니라 혼간지였다. 혼노지 절은 이미 사라졌으니 아마도 내가 혼간지를 찾는 것으로 알았던 것인지...
승승장구하면서 일본 통일을 목전에 두었던 오다 노부나가. 그는 2천 군사로 적진에 뛰어들어 자신의 영지를 침략한 3만 군대의 이마가와(今川) 대영주를 격파한 오케하자마 신화를 탄생시킨 귀장(鬼將)이었다. 하지만 믿었던 부하에게 기습을 당해 혼노지에서 생명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정녕 인화에 실패한 지휘관이었나? 그가 첫 부인인 노히메를 맞은 혼례식에서 불렀다는 노(能)의 아쓰모라(敦盛) 노래 한가락이다.
"인생살이 50년, 돌고 도는 흐름 속에 덧없는 꿈이요 환영이로다, 한번 태어나 죽지 않는 자 그 어디 있으랴"
교토역에서 신칸센으로 20분 만에 신오사카역에 도착, 숙소로 돌아왔다. 이 날 만보기는 3만보에 조금 못미치는 2만 8,800보 였다. 다음날 아침 신오사카역에서 메트로로 난바역까지 와서 다시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왔고, 귀국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올랐다. 나의 13박 14일 맨 땅에 헤딩하기식 일본 수학여행이 끝났다. Amazing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