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9) 무가(武家) 시대를 연 가마쿠라 바쿠후
- 일본 최초 무가 정권 탄생지, 가마쿠라를 가다 - 12세기 말 최초의 바쿠후 수립...700년간 이어진 무가 시대 - 천혜의 요새 가마쿠라, 770여 년전 일본 최대 도시로 번영누려
▶(8) 이사일사(二社一寺)의 세계유산 도시 닛코 이어서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3월 24일 금요일이다. 도쿄역에서 JR 기차에 몸을 실었다. 행선지는 12세기 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일본의 무가 시대를 연 가마쿠라였다.
우선 에노시마(江島) 섬부터 보려고 오후나(大船) 역에서 내려 쇼난(湘南)모노레일로 갈아타고 종점인 쇼난에노시마역에 내렸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해안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가마쿠라로 가는 에노덴(江電) 전차를 탈 수 있는 에노시마 역이 보였고, 계속 내려가니 큰 길이 나오고 그 건너편으로 에노시마 섬이 보였다.
그런데 도쿄에서 은행에 들렀다가 늦게 출발하였기에 이미 12시가 되었다. 아무래도 에노시마 섬에는 들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에노시마 역으로 와서 에노덴 전차를 타고 가마쿠라로 향했다.
전차 타고 가마쿠라로...쓰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 신사
나는 아직 한 번도 모노레일을 타본 적은 없었는데, 오후나에서 탄 쇼난모노레일은 한번 타 볼 만한 것이었다. 완만하게 움직이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랄까, 좁고 기복이 심한 커브길이 많다 보니 공중에 매달아 움직이는 모노레일이 가장 적합한 교통수단이 되었을 것 같다.
에노시마 역에서 에노덴 전차를 타고 가마쿠라로 가는 길에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성지라는 고코마에(高校前) 역에서 내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시간이 없어 지나쳤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된 곳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가마쿠라에서 나의 우선순위는 쓰루가오카하치만구(鶴岡八幡宮) 신사와 고토쿠인(高德院)의 다이부츠(大佛)였다.
가마쿠라 역에서 내려 고마치도리 골목길을 지나 쓰루가오카하치만구까지 걸어갔다. 이 신사는 1185년 시모노세키의 단노우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겐페이 전쟁의 대세를 결정짓고 가마쿠라 바쿠후를 열었던 미나모토家를 기리는 곳이다. 당초 요리토모의 선조가 창건한 신사로서 그가 1191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지금은 진구 황후와 그의 아들 오진 천황, 그리고 그의 부인을 함께 모신다.
가마쿠라는 천혜의 요새다. 앞으로는 바다가, 뒤로는 산들이 연이어 에워싸고 있어 오직 7개의 인공 통로를 통해서만 이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리토모가 이곳을 본거지로 정하게 된 것도 자신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방어에 유리한 지형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마쿠라는 당시 교통 사정으로 교토로부터 열흘이 걸리는 곳이었다. 교토와 가마쿠라간 왕래가 잦아지면서 도로가 발달하게 되었고 교토 중심의 일본 문화가 가마쿠라로도 옮겨지면서 이원적인 구조를 만들어냈다.
가마쿠라 시대를 일본의 무가 정권의 시초로 보지만, 천황의 권력이 건재하였고 특히 관서지방 쪽으로는 무가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교토에서도 무가의 사신이나 관리들이 거주하였던 로쿠하라(六波羅) 지역 정도만 그 실권이 미쳤다 한다. 1250년 당시 가마쿠라는 인구 20만 명을 가진 일본 최대의 도시가 되어 교토를 능가했고, 세계적으로도 4번째 도시였다고 한다.
일본의 중세가 그렇듯 가마쿠라 시대도 피비린내 나는 역사로 점철되었다. 1192년 요리토모의 이복동생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가 고토바(後鳥羽)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칭호를 하사받자 이를 질투한 형 요리토모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요리토모는 요시츠네의 목을 따서 술에 담갔다 한다.
그 후 요리토모가 말에서 떨어져 죽은 후 그의 17살 난 아들 요시이에(義家)가 그 뒤를 이었으나 외할아버지인 호조 토키마사(北条時政)의 섭정으로 실권이 외가인 호조가(北条家)로 넘어가면서 쇼군은 꼭두각시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살육이 일어났다.
그리고 1333년 천황파인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난공불락이라는 가마쿠라를 해안가 쪽으로 우회, 공략하여 가마쿠라 바쿠후가 종말을 맞았을 때 900여 명의 호조가사무라이들이 집단 자결하였고 그 뒤를 따라 6천여 명의 주민들도 자결하게 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조각의 황금기, 가마쿠라 시대를 엿보다
신사 경내의 가마쿠라 고쿠호칸(國寶館)에서 마침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의 우키요에(浮世繪)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곳은 조각의 황금기였던 가마쿠라 시대의 국보급 목조각품들을 상시 전시하고 있어 꼭 들러 볼 만한 곳이다.
약사여래좌상, 지장보살좌상, 천수관음보살좌상 등 불교 목공예품 외에도 호조 도키요리(北条時賴) 좌상 같은 당대의 권력자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열 명의 지옥왕 중 한 명인 초강왕(草江王) 좌상은 2점의 사하데바(俱生神) 좌상과 같이 그 얼굴 표정이 무섭기도 하고 코믹하기도 하다. 이것은 당대의 대표적 작가인 운케이(運慶)의 제자인 코유(Koyu)의 작품이다. 당시에는 사실적 작품 경향의 경파(慶派)가 대세였다고 한다.
작품 마다의 얼굴 표정이나 동작이 매우 풍부하고 역동적이다. 도다이지(東大寺) 남대문의 금강역사상도 이들 경파의 작품이다. 분노한 얼굴 표정이나 근육의 생동감이 압권이다.
가마쿠라 대불 '아미타여래좌상'
다시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 다이부츠(大佛)를 보러 하세역으로 갔다. 가마쿠라 대불은 고도쿠인(高德院) 경내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이다. 1252년에 만들기 시작해서 10년 정도가 걸려 완성했는데, 대좌를 포함한 총고(總高)가 13.4m, 무게가 121t으로서 일본에서는 도다이지 대불 다음으로 큰 것이다.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불상 내부로 들어가 대불의 텅 빈속을 볼 수 있었다. 원래는 대불이 안치되었던 건물이 있었지만 1498년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로 쓸려나간 후부터 대불이 야외로 노출되었다.
100년도 더 전에 이곳을 방문한 영국의 휴버트 제닝햄 경은, 결코 쉽지 않았을 이 거대한 대불의 온화한 얼굴 표정을 만들어 낸 일본의 금속 예술을 극찬했다. 그는 16세기 피렌체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도 이 가마쿠라 대불은 생각조차 못 했을 거라고 했다.
무사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9세기 경이다. 율령 제도가 붕괴되고 장원이 난립하면서 영주는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장집단을 조직하는데, 이것이 무사단의 시작이다. 무사는 조정 귀족의 신변도 경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귀족 주위에서 대기한다는 의미의 '사부라우'에서 '사무라이'라는 말이 나왔다.
헤이안 시대에 천황의 외척이 권력을 잡은 셋칸(攝官) 정치를 거쳐 11세기 말부터는 천황의 친아버지(상황)나 친할아버지(법황)가 실권을 장악한 원정(院政)이 시작된다. 원정 시기에 중용된 무사들이 점점 더 강력해진데다, 조정 내 불륜으로 빚어진 내분 해결에 무사들이 동원되면서 정권이 무사들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12세기 말 최초의 바쿠후(幕府)가 수립되었다. 당초 귀족은 무사를 인간이 아니라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여겼다는데, 어쨋거나 무가 시대는 그후 약 700년간 이어졌다. 무사가 자신의 힘을 자각한 결과일 것이다.
일본학의 황제라는 에드윈 오 라이샤워 교수는 그의 "일본, 과거 그리고 현재"에서 무가 정치가 일본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 봉건 무사의 태도나 관념이 자연스레 일본인의 의식에 깊숙히 스며들어갔다며, 근대에 들어와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군인의 지도력을 따르고, 군인은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믿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했다. 이것은 일본의 무가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다.
군대의 전통이 강했던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이 되어 제1차, 2차 대전을 일으킨 역사적 경로에 대하여 "독일의 특수한 길" 이라는 분석틀이 나왔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특수한 길"도 바로 무가 정치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