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정 대사의 일본 역사기행](8) 이사일사(二社一寺)의 세계유산 도시 닛코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묘가 있는 닛코를 가다 -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인터뷰365 장시정 칼럼니스트 = 도쿄를 하루 반나절 돌아본 다음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묘가 있는 닛코를 방문했다. 아사쿠사(淺草)에서 기차를 타고 갔다.
도쿄 근교 목적지로는 원래 가마쿠라만 계획에 넣었다가 닛코는 도쿄 현지에서 급작스레 결정하여 가게 되었는데, 준비가 부족하여 허둥댄 적이 많았다.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역시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다행히도 큰 실수 없이 볼 건 다 봤고, 안 보면 후회할 뻔했다.
닛코는 도쿄에서 동북쪽으로 140㎞, 가마쿠라는 정반대인 남서쪽으로 50㎞ 떨어져 있다. 만약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닛코를 택할 것 같다. 닛코에서 차로 이로하자카라는 48구비 도로를 돌아 산 위로 올라가면 놀랍게도 산 정상에 큰 호수가 있는데, 바로 주젠지(中禪寺) 호수다. 여기에서는 케곤(華嚴) 폭포를 볼 수 있다.
닛코는 이사일사(二社一寺)의 도시라고도 하는데 이 이사일사가 모두 1999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닛코산나이(日光山內)라는 닛코산 일대를 세계유산으로 포괄 등재한 첫 사례라 한다.
이사(二社)라 함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도쇼쿠(東照宮) 신사(神社)와 고대로부터 내려온 산악신앙의 중심지로서 후타라산(二荒山)을 신체로 하는 후타라산 신사를 말하며, 일사(一寺)는 848년에 창건된 린노지(輪王寺)를 지칭한다.
린노지 본당은 1647년 건축되었고, 3개의 대불상(천수관음상, 아미타여래상, 미륵관음상)이 있어 삼불당(三佛堂)이라고도 한다.
400년 세월에도 옛모습 그대로...섬세함과 화려함의 극치 도쇼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를 마지막으로 통일하고 도쿠가와 바쿠후를 세워 메이지 혁명 전까지의 260년간 일본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면서 오늘날 일본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도쇼쿠는 그를 기리는 신사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으면서 그 이듬해에 그의 아들인 히데타다가 시즈오카로부터 그의 유해를 가져와 영묘를 만들면서 창건하였고,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츠(家光)가 연인원 180만 명을 동원, 확장, 재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사일사가 위치한 닛코산나이 입구에 세워진 신교(神橋)는 붉은색 주칠로 단장한 목교로서 인간의 세계를 넘어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현관임을 알리고 있다. 우선 린노지와 부속 정원인 소요원을 둘러본 후 도쇼쿠로 올라갔다.
입구에 세워진 1번 도리이는 일본 최대의 석조 도리이다. 국보 8개, 중요문화재 34개를 갖고 있으며, 당시 최고 기술을 동원한 옻칠과 극채색이 구사된 화려한 조각이 뛰어나다. 그 건축 양식은 일본 신사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서 본전과 배전이 연결된 곤겐즈쿠리(權現造)다.
세 마리의 원숭이가 눈, 귀, 입을 가리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산자루(三猿)나 잠자는 고양이를 조각해 놓은 네무리네코(眠猫)는 눈여겨볼 만하다. 네무리네꼬는 평화를 기원하며, 산자루는 나쁜(惡)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훈을 형상화 한 것이라 한다.
도쇼쿠의 정문 격인 요메이몬(陽明門)의 흰색 기둥, 황금색 단청 그리고 검은색 기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용, 기린, 공자, 맹자, 새, 물고기, 식물 등이 다채롭게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히구라시몬(日暮門)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이 문 하나를 하루 종일 해가 저물 때까지 볼만하다는 것이다. 본전 앞의 카라몬(唐門)과 함께 마치 서양 교회의 정문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을 연상시켰다.
1643년 조선통신사의 발자취, 조선종...안내판은 찾을 수 없었다
요메이몬으로 올라가는 마당에는 1643년 당시 인조가 조선통신사 편에 보낸 조선종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1636년 기증했다는 오란다 도로(燈籠)라는 회전 랜턴과 함께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삼구족(三具足)도 함께 가져갔다는데, 이 삼구족(향로, 촛대, 화병)은 여기서 볼 수 없었다. 이 중 조선 청동촛대 한 쌍은 이에미츠를 기리는 다이유인(大猷院)에 일본의 영주들이 보낸 다른 촛대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다이유인은 이에미츠의 무덤인데 도쇼쿠를 바라보는 동북쪽 방향으로 지어졌다. 그는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도쇼쿠를 확장, 재건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했고 그 옆에 묻혔다. 그의 효심이 기특하다.
이 조선종의 성격에 대하여는 일본과 한국 간에 견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상한 것은 조선종 건너편에 있는 네덜란드의 랜턴 앞에는 이것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지만 조선종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나도 주변 일본인에게 물어봐서 이것이 조선종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왜 일본은 이것에 대한 안내판을 만들지 않았을까? 네덜란드의 랜턴은 일본과 상업 거래를 원활히 하기 위한 일종의 선물일 것이다.
1643년 다섯 번째의 조선통신사가 도쇼쿠가 완공되면서 에도로부터 이곳 산중까지 조선종을 갖고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던 통신사가 끊어진데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전쟁의 피해를 봤던 당사자인 선조가 통신사의 파견을 재개한 것이나 주로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축하 사절로 통신사가 파견되었던 의미도 생각해 볼만 하다. 결국 일종의 조공 사절과도 같은 성격을 띤 것은 아닐까? 내가 만난 빈(Wien) 대학의 일본사 전공 제프 린하르트(Sepp Linhart) 교수는 당시 막부가 주민에게 과시할 목적으로 조선에 제철 재료를 보내서 조선에서 주조한 종을 가져오게 한 것이라고 했다.
삼나무 절경에 자리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영묘
네무리네꼬를 지나 긴 계단길을 올라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잠들고 있는 그의 묘소다. 5m 높이의 청동 보탑(寶塔, pagoda) 아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잠들고 있다.
1906년 봄 일본 방문 후 기행문을 남긴 영국의 휴버트 제닝햄(Hurbert Jerningham) 경은 도쇼쿠가 교토나 나라의 쟁쟁한 신사나 사찰에 견주어도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뛰어난 건축술이나 화려한 단청과 조각보다는 40마일에 걸친 아름드리 삼나무(cryptomeria) 숲으로 둘러싸인 빼어난 자연 경관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바로 닛코가 도쿠가와 왕자들의 영묘로 간택된 주된 이유라는 것이다.
도쇼쿠를 보고 느낀 것은 일본 고건축이 상당히 섬세하고 화려하며 보존이 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도쇼쿠는 400년 가까운 세월에도 그 섬세하고 화려한 색채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일본 사람은 유지, 보수, 관리의 달인이다. 독일 사람과 매우 유사한 특징이다. 일본은 문화재를 크게 보아서 대략 50년 단위로 보수, 관리한다고 한다. 수시로 단청을 하고 옻칠을 덧입힌다. 이것에 비하면 우리의 문화재는 세월과 함께 빛 바래고 퇴색해져 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