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잔잔한 이야기로 차려낸 맛깔난 한 상, 연극 '내 웨딩 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
- 중진 배우들 진솔한 연기로 풀어낸 사랑과 결혼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 - 김나영 작가, 심영민 연출로 선보여 - 25년 만에 뭉친 극단 전망 멤버들...김종칠·홍윤희 배우 호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김광석의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감정의 일렁임, 그리고 달콤 쌉쌀한 디저트 한 스푼...
대학로 드림씨어터에서 7월 9일까지 공연하는 극단 전망의 ‘내 웨딩 케이크는 누가 먹어버렸나’(김나영 작, 심영민 연출)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편하고 정감있게 와닿아 담백한 뒷맛이 여운으로 남는 인생 연극이다.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이지만 재밌고 감동적이고 메시지도 남는,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런데 중년 부부와 노부부의 이야기를 한 세트로 묶어 친숙한 배우들이 펼쳐낸 이 연극은 마치 몸에 맞는 캐주얼을 입은 것처럼 편하고 느긋하면서도 아련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극단 전망(대표 심영민)의 멤버들이 25년 만에 다시 뭉쳐 공연한 ‘내 웨딩케이크...’는 우리 곁의 잔잔한 얘기를 맛깔나게 상으로 차려낸 김나영 작가의 희곡, 작은 시선과 몸짓으로도 잔잔한 감정을 일렁이게 한 심영민의 연출, 그리고 좋은 배우들의 진솔한 연기가 객석에 웃음과 눈물을 흘리게 한, 인간적 체취와 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내 웨딩케이크...’라는 제목이 상징하듯 이 연극은 사랑과 결혼, 삶에 관한 2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졌다. 박선신 조주현 배우가 펼친 중년의 이야기는 이혼한 부부의 좀 튄다 싶은 설정인데도 한 남자의 순애보가 진한 여운을 남겼다. 둘이 나누는 대사들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하게 느껴지도록 상큼하게 쓰고 애틋하게 연기했다.
낯이 익지 않은 박선신 조주현 배우가 대화를 나누는데 통통 튀는 대사들이 일상어처럼 객석을 파고들었다. 이혼했지만 철부지에 내상(內傷)이 있는 아내에게 자신의 모두를 아낌없이 주고 떠나려는 남편의 속 깊은 정을 조주현 배우가 일상처럼 차분하게 연기했는데 그게 더 아리게 느껴졌다. 극단 전망 초기에 활동했다는 박선신 배우는 복합적인 감정연기를 산뜻하게 해냈다.
김나영 작가의 저력은 노부부 에피소드에서 더 진하게 드러났다. 20여 년 전 30대에 쓴 노부부 이야기가 지금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체험에 우러나온 진솔한 이야기를 수식어로 꾸미지 않고 일상어로 자연스럽게 살려냈기에 가능했다.
평생 자식 키우며 아등바등 알뜰살뜰 살아온 부부가 소풍을 나와 나누는 얘기 속에 우리네 인생 애환이 녹아있고 티격태격하지만 보듬고 사는 노부부의 정이 묻어났다. 시부모를 모델로 이 희곡을 썼다는 김나영 작가는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가 파장을 일으키듯 삼빡한 러브스토리로 극적인 재미까지 선사했다.
좋은 배우란 어떤 것일까. 이 작품을 보면서 연극은 배우의 예술임을 실감했을 뿐 아니라 “연극은 인간의 감정과 이야기를 표현하는 힘 있는 매체”(손종환 기획)임에 공감이 갔다.
아내 역 홍윤희, 남편 역 김종칠은 케미도 잘 맞았고 앙상블도 최상인데다 개인기가 대단해 극의 재미를 넘어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대학로에서 평판이 좋은 홍윤희 배우는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듯 연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대하기가 아주 편했다.
남편 역 김종칠은 필자가 '최애'하는 배우 중의 한 분인데 심재찬 연출 ‘만선’에서 보여준 인정 넘치는 어부의 체취는 아직도 선하다. 그는 연륜이나 외모나 연기 스타일 등 어느 모로 보나 이 연극에 딱 맞는 캐릭터인데, 무대에서도 자신만의 아우라를 유감없이 표출했다.
노부부 에피소드의 미덕은 가부장 시대 우리네 노인들의 삶의 방식을 생생하게 살려냈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은데도 소통이 되고, 타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정 표현으로 귀결되고, 매사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알뜰하게 보살피는 ‘노인들이 사는 법’을 감나영 작가가 세밀하게 묘사했고, 김종칠 홍윤희 콤비가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특히 아내의 비밀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체격이 큰 김종칠 배우의 우락부락, 안절부절못하는 연기는 이 연극의 백미였다. 수명이 길어진 시대에 외롭게, 심심하게 살지 말고 활력 있게 살아보자는 노부부 소풍의 메시지에 공감이 갔다.
심플한 무대, 간결한 연출이 돋보였는데, 배우 출신의 심영민 연출은 부부가 허공에 손을 뻗어 하늘보다 먼 저승으로 간다는 암시(중년부부), 생전 아내 보살핌을 받던 남편이 소풍 나온 돗자리를 개는 모습(노부부) 등으로 연극을 맛깔나게 했다.
연극예술에도 다양성은 필요하지만, 우리 일상의 이처럼 소박한 작품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심재찬 연출이 1990년 극단 전망을 창단했을 당시, 필자는 그들의 열정과 실속있는 작품들을 열심히 알리는 데 일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