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365칼럼] 월운 스님과 불경서당 그리고 월인석보대학

- 그리운 스승님, 봉선사 월운 스님을 추모하며

2023-06-21     정진원 칼럼니스트

인터뷰365 정진원 칼럼니스트 = 꿈을 꾸었다. 내가 무슨 불교 잡지처럼 보이는 표지에 사진이 실려 있었다. 멀리 봤을 때는 일상의 내 모습이었는데 가까이 보니 내가 머리를 깎은 옆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꿈이지. 생전 처음 본 꿈속의 내 모습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월운 스님 원적 소식이 들렸다.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국제학술대회 출장 중이었다. 나중에 해몽을 보니 나에게 큰 의지처인 분이 떠나는 꿈이라 쓰여있다.

그랬다. 나에게 한 스님이 계셨으니 처음 뵈었던 60대 중반 그 순간부터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나의 월운 스님이시다. 봉선사 조실도 대강백도 역경원장도 화엄종주도 아닌 그저 소탈하고 장난기 가득한 위트로 넘치던 젊은이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분.

2018년

월월산산(月月山山) 월운 스님

 2014년의 여든 중반이실 때 ‘월월산산(月月山山)’ 이야기부터 해볼까.

어느 여름날 동국대 일산병원에 입원 하셨다기에 불경서당 도반과 문안을 하러 갔다. ‘죄수복’을 입고 있으니 오지 말라고 특유의 조크를 하셨지만 그때부터 기억이 예전 같지 않다는 풍문이 돌고 있어 걱정이 되어 찾아갔다. 무슨 병으로 입원하신 건가 여쭈니 ‘남의 뒷골목 사정을 뭐하러 알려고 하냐’시며 전립선 수술을 넌지시 알리셨다. 매사가 이런 식이셨다.

병실에는 딱정떼 노보살과 악명높은 시자 스님이 엄호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 간 스님이 좋아하는 태극당 카스테라 한쪽을 달게 드신 걸 본 시자는 밀가루가 독인 줄 모르고 드렸냐며 우리에게 고래고래 큰소리를 쳤다. 종이호랑이가 되신 월운 스님께선 다만 시자에게 ‘볼륨’을 줄이라고. 60대나 70대시절이었으면 싸리 빗자루로 매타작감인데... 스님들께는 엄하고 야박하셨지만, 우리 재가불자 불교학자 그룹 불경 서당 학동들을 엄청 편애하셨다.

‘운허 스님 10년, 월운 스님 35년’ 시봉 경력을 자랑하는 정각심노보살은 한술 더 떠 당시 귀한 망고를 가져와 자꾸 드시라고 권하였다. 월운 스님 왈 ‘월월산산, 붕출(朋出), 곧 벗이 가거든’ 이라 말씀하며 이에 얽힌 옛날이야기를 해주며 재미있어하신다.

90이 되었을 적에 스님 연세를 묻자오니 ‘이것저것 다 팔구 구십이래’ 하시던... 늘 이렇게 유쾌하신 스님이 거짓말처럼 가셨다. 전날 저녁까지 성성히 계시다가 편히 가셨다고 한다.

불경 서당의 추억

필자가 불경 서당에 간 것은 1994년 10월 1일이었다. 그러구러 2000년 스님이 가르치시는 서당의 마지막 반장을 맡아 중국 태화산 청량징관 스님의 거처를 답사하던 기억까지가 1기 서당이었다. 이후 스님의 제자인 화광 스님, 반산 스님 등이 이끌던 2000년대 중반까지 불경 서당이 유지되었고 나는 틈틈이 드나들어 최장수 학생이 되었다.

현재 불교계에서 전문학자로 활동하는 이들 중 이곳을 한 번이라도 거쳐 가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창립멤버였던 연세대 신규탁 교수, 불경 번역가 이인혜 선생, 1990년대 나와 함께 공부했던 고려대 이병욱 교수, 진각대 김치 온 교수, 한성자 박사 등이 우선 떠오른다. 이 공부를 하다 국문학박사인 나와 독문학 박사 한성자 선생은 다시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님 덕분이다.

무엇보다 월운 스님 고희기념 논문집을 간행한다고 1996년 즈음 봉선사 인묵 스님, 철안 스님, 정원 스님, 현진 스님들과 한 시간 회의하고 밤새 친목을 도모하던 잊지 못할 젊은 시절이 있었다.

스님께서 나를 위해 ‘구결학회’ 특강을 하시던 그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내가 활동하고 있던 그 학회는 불경에 점을 찍은 고대 국어를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2006년 겨울 어느 날 대설 폭설이 내려 왕래가 쉽지 않던 돈암동 성신대학교에서 개최한 ‘구결학회’에 봉선사 스님들을 대거 이끌고 참석하신 것이다.

모인 청중에게 나를 웃음과 말이 동시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그런 줄 모르고 살았다. 모두 이구동성 맞다고 하였다. 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스님은 그렇게 굼뜨고 게으르고 모자란 재가 제자를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그해 가을에 봉선사 ‘능엄강설대법회’가 열렸다. 나는 월운 스님의 능엄경 강설 논평자로 참석하였다. 지금도 어렵기만한 능엄경을 읽고 또 읽고 머리에 쥐가 나게 공부했지만 논평과 질문할 일이 막막했을 때 스님께서 넌지시 이러이러한 질문을 하여라 시자 스님 통해 문제를 알려주셨다. 그분이 떠나셨다. 살가운 친정아버지같던 우리 스님.

월인석보 대학을 위하여

나는 현재 ‘봉선사 불교대학’에서 3년째 ‘월인석보반’을 맡아 강의하고 있다. 현 주지 초격 스님께서 어느 날 나를 불러 불경 서당에서 공짜로 공부하고 절밥을 축냈으니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소.’

기꺼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하며 월인석보를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그저 밥값을 한다는 뿌듯함과 스님께 배운 은혜를 일말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였으나 스님 원적에 드시고 108배를 하며 이게 다 스님의 뜻이었음을 알겠다.

운허 스님과 월운 스님은 ‘고려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바꾸시는 원력을 실천하셨다. 월인석보는 조선대장경의 시작이다. 나와 봉선사 불자들에게 ‘조선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바꾸라는 소임이었음을 이제사 알아차린다.

‘월인석보반’에서 ‘봉선사 월인석보대학’으로 승격되는 그날까지 세계만방에 훈민정음이 훌륭한 것은 새 글자로 세종이 쓴 ‘월인천강지곡’과 세조가 쓴 ‘석보상절’ 덕분이라고 널리 알리겠다. 알리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