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인터뷰] 충무로시대의 명감독 '난쏘공'의 이원세
- 19일 향년 83세 일기로 별세 - '난쏘공', '엄마없는 하늘아래' 등 한국영화 중흥기 중심에서 활동 - 충무로 떠난 후 미국 뉴욕에서 살다 30년 만에 모습 드러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하 '난쏘공'), '엄마없는 하늘아래' 등을 연출한 이원세 감독이 19일 향년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40년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 이 감독은 한국영화 중흥기 중심에서 활약했다. 1971년 '잃어버린 계절'로 데뷔한 이 감독은 '난쏘공'(1981), '여왕벌'(1985) 등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연출했다. 또 '석양에 떠나라'(1973),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등의 장르영화와 '엄마없는 하늘아래'(1977)와 같은 멜로드라마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감독은 제10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제18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1986년 영화 '여왕벌'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지난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특별기획전에서 30년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영화인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당시 이 감독은 인터뷰365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미국으로 가는 날부터 영화를 등지고 살았지만 내 인생에서 영화를 빼거나 잊어버리고 살 수는 없다"며 "영화는 나의 운명과 같은 것인데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곳으로 옮겨 영화와 무관하게 살다보니 영화를 잊어버리고 산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본지는 '하늘의 별'이 된 이원세 감독을 떠올리며, 30년 간의 침묵을 깨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감독과의 그때 그 인터뷰(2017년 10월 5일자)일부를 공개한다. [편집자주]
스스로를 실종시킨 지 30년 만에 관객 앞에 서다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1971년 '잃어버린 계절'을 첫 작품으로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매일 죽는 남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으로 요약) 등 1980년대까지 34편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소외지역을 투영한 사회성 작품과 애정 멜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원세 감독이 오랜 세월 충무로를 등지고 살다가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이원세 감독 마스터클래스' 프로그램의 개막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원세 감독은 1986년 영화 '여왕벌'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함께 작품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증발되듯이 사라진 그의 신상 변화를 미스터리로 생각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전해진 근황이 미국 뉴욕에 이주해 살고 있다는 것인데 이 감독은 미국에 살면서도 영화인들과 안부를 나누지 않았다. 사실상 미국으로 떠나면서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살았던 이원세 감독이 관객 앞에서 30년 만에 무겁게 닫았던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공개 상영한 '목마와 숙녀' '엄마 없는 하늘아래' '이방인' '그 여름의 마지막 날' 등 12편의 연출 작품과 감회 깊게 재회하는 동안 눈시울이 마를 때가 없었다.
'난쏘공'을 볼 때는 촬영을 한 박성배 감독과 함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레디 고의 목청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충무로시대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온 이원세 감독이 긴 세월을 묻어두었다가 풀어놓은 지난 삶의 고백을 정리했다.
- '여왕벌'을 끝으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영화계를 떠난 과정부터 알고 싶다.
"나의 전부를 영화에 쏟아 넣었던 열정과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것 같은 지친 심리상태가 찾아왔을 때였다. 휴식이나 충전이 절실했다. 일과 삶의 방식이 다른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갈등과 압박감이 스스로의 인생에 변화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 먼 곳으로 떠나 국내 영화인들과 인연도 멀어졌다. 사실 국내에 머물렀다면 다시 영화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 당시 연출 작품이 영화심의(검열) 창구의 제재를 많이 받아 그 상처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다. 검열 강도가 심할 때도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은 관객들의 호평을 받는다. 실제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심의가 창작과 표현의 다양성에 제약을 가해도 그로 인해 활동을 포기한다거나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앞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그동안 오랫동안 영화계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지난 일이지만 사정을 밝힌다면 몸이 불편한 아내의 요양을 위해 돌아왔고 귀국 후 줄곧 부산 근교의 지방에서 조용히 보냈다. 결국 아내는 떠났지만, 아내가 오랜 지병으로 고생해 병상 곁을 떠나지 못하고 간병을 하느라 서울에 올 기회가 별로 없었고 또 수 십 년간 잊고 살던 분들에게 다시 연락한다는 것이 성격 탓인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김포시로 옮겼다."
-영상자료원에서 마련한 특별 기획전에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 '꽃과 뱀'(1975), '목마와 숙녀'(1976), '엄마 없는 하늘아래'(1977), '땅콩껍질 속의 연가'(1979), '매일 죽는 남자'(1980), '난쏘공'(1981), '하와의 행방'(1982), '이방인'(1984), '그 여름의 마지막 날'(1984), '여왕벌'(1985)을 비롯해 김수용 감독의 조연출 시절에 만든 '수전지대'(1968) 등 12편의 이 감독 작품이 선정, 상영됐다. 이 시대의 관객들과 다시 본 소감이나 느낀 감회를 얘기해 달라.
"기획전 개최를 요청받았을 때 문득 1970년대 작품 활동을 함께 했던 하길종 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우린 다 피고야"라는 말을 곧잘 했는데 흘러간 나의 작품을 공개한다는 것이 발가벗겨진 피고가 되어 관객들의 심판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스승인 김수용 감독님의 격려를 받고 용기를 냈다. 나는 늘 아마추어 수준에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준비할 때는 의욕이 넘쳐도 만들고 나면 당당한 자신감보다 아쉬운 구석이 많아 불만이나 부족감이 따랐다."
- 이 감독의 작품을 통해 연기역량을 인정받은 배우도 많이 나왔다. 가수 나훈아도 '3일 낮 3일 밤'을 통해 멋진 배우가 되기도 했다. 또 연출 작품 중 많은 관객들을 불러들인 흥행 영화도 많았다. 특히 암울하고 가난한 소외지대의 삶을 투영한 사회성 작품들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와 '난쏘공'은 염전의 삭막하고 음울한 배경들이 인상적이었다. 염전에서 찍은 작품들이 원작과 다른 배경들이다. 굳이 카메라를 염전으로 가져간 이유가 있는가?
"염전은 나에게 친숙하고 자신 있는 드라마의 배경이며 앵글이다. 나는 고향이 평안남도 평원이다. 1946년 해방 이듬해 부모님은 4남매 자식들의 손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한 시절 염전이 있는 경기도 해안지역인 군자에서 사셨다. 내 어릴 때 본 염전은 소금이 쌀보다 귀한 금값으로 취급받아 동내도, 일하는 사람들도 활기가 넘쳤다. 그 염전지대가 산업화의 물결로 뒷전에 밀려나고 황폐화 되어가면서 가장 고달프고 가난한 인생들이 남아있는 막장 세상으로 변해갔다. 춥고 어둡고 쓸쓸한 염전의 변화와 생태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살았던 나는 카메라에 무엇을 어떻게 담아야 하는 지를 잘 알아 원작의 농촌 무대를 염전으로 바꾸기도 했는데 그로인해 평론가나 기자들의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 ‘난쏘공’ 촬영기사인 박성배 감독이 이 감독과 그 영화를 다시 보면서 함께 손잡고 흐느꼈다는데 서로가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혼자 옛 생각이 나서 언젠가 한번 촬영지인 그곳에 찾아가 봤다. 과거의 정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도시화된 낯선 풍경이 들어 서 있었다.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영화를 찍을 때의 생각보다 내가 어릴 때 살며 지켜 본 쓸쓸한 추억들이 떠올라 더 가슴을 아프게 자극했다."
- 다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은 미련을 없었는가?
"미국으로 가는 날부터 영화를 등지고 살았지만 내 인생에서 영화를 빼거나 잊어버리고 살 수는 없다. 영화는 나의 운명과 같은 것인데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곳으로 옮겨 영화와 무관하게 살다보니 영화를 잊어버리고 산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꿈속에서도 작품을 찾고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되돌아갈 수 없는 건너편의 세상으로 멀어져갔다."
- 한국영화에서 뉴 웨이브의 분기점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영상시대의 멤버가 이 감독과 하길종(작고) 변인식(작고 영화평론가) 이장호 김호선 홍파 감독 등으로 1970년대부터 모두 영화 활동을 활발하게 한 분들이다. 지금은 모두 은퇴세대가 되어 현장을 떠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장호 감독이 대학교수로 꾸준히 후진을 양성하며 3년 전까지 연출활동을 했고 지금도 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영화를 이끌어 가는 후배 감독들을 어떻게 보는가?
"감독은 그 시대의 관객들과 문화와 언어가 통하고 감정과 감각을 주고받는 데서 작품이 만들어진다. 죽을 때까지 감독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젊은 세대와 겨루며 시대의 변화를 극복해가기가 쉽지 않다. 지금 후배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역시 놀라운 감각의 변화와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봉준호 감독 같은 후배의 작품을 좋아해 나의 오랜 친구인 이장호 감독에게 함께 술 한 잔 나누며 젊은 후배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 다시 헤어졌던 옛 친구와 영화인들을 만나며 살아가는 요즘 심경을 얘기해 달라.
"30년 만에 자리를 함께 하는 충무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쌓이고 묻혀있던 정분이 말문을 막히게 하고 덧없이 지나간 세월과 늙어버린 회한들이 울컥울컥 가슴 밑에서 치밀어 오른다. 다시 사는 기분이다. 남아 있는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