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재미동포 사업가 레지나 손..."광고업계서 파란만장한 ‘용띠 인생’ 살았죠"
- [인터뷰365] 레지나 손, 광고업 프로듀서에서 국제 예술교류 전문 아트디렉터로 활동 - 중1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 아버지에 이어 광고인으로 활동...광고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클리오(CLIO)상’ 수상 - 아트 디렉터로 활동영역 넓혀 활약...모든 예술인 돈 벌어주는 마케팅이 목표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출생연도에 주어지는 12지지(地支) 중 용띠나 범띠, 말띠 여자는 남성 기질이 있어서 사업을 하면 잘 풀리고 팔자도 세다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속설이지만 자신에게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는 레지나 손(1964∼, Regina Sohn, 한국명 손정애) 대표는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날아다니는 용띠 인생’을 살고 있다.
거주하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아시안 소사이어티 아츠 앤 컬쳐’(‘Asian Society Arts & Culture’)를 운영하는 CEO인데, 회사 이름 그대로 아시아지역과 미국 사이에서 예술 문화 콘텐츠와 관련된 프로그램 개발, 공연 전시 사업 분야에서 비즈니스 마케팅을 하는 워킹우먼이다.
서울에서 예일여중 1학년을 마치고 가족 이민으로 미국에 이주한 그는 아버지가 JTBC의 전신인 동양방송(TBC)에서 광고영업을 담당한 뒤 LA에서도 광고회사 ‘Q 스튜디오’를 창업해 이름을 날렸던 손정철(91) 전문 광고인이다. 딸만 넷인 집안의 둘째로 대학 시절부터 아버지의 회사에서 광고 제작 프로듀서로 참여해 광고업계의 아카데미상으로 일컫는 ‘클리오(CLIO)상’ 수상작품을 이끌어내는 등 아버지로부터 일찍 대물림 광고인으로 인정을 받아냈다.
캘리포니아의 명문 사립대 USC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화와 국제법도 부전공으로 선택, 다방면의 지식을 습득한 뒤 영화제작에도 참여하고 컴퓨터 애니메이션 광고를 개척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광고업과 함께 아트 디렉터로 활동영역을 넓혀 한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문화 예술 작품의 교류, 전시 및 판매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타계한 한국영화의 거목 신상옥 감독이 탈북 후 한동안 미국에 살며 영화제작 활동을 할 때는 특수효과 등을 전담하는 BMI(비쥬얼 매직 이미지) 사업을 전담한 이력도 있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신 감독이 필생을 두고 준비하던 미완성 대작 ‘징기스칸’ 영화 기획 작업에도 참여한 일화도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 오면 에너지가 솟고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른다는 그를 최근 서울에서 만났다.
CF도 표현 예술의 세계다
- 광고제작 프로듀서와 아트 디렉터라는 직종의 전문가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일을 하고 있는가?
“소비자를 타켓으로 한 광고 한편도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영화 한편과 같은 맥락의 창작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광고 제작 프로듀서도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 겸 제작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소비자(관객)를 감동시킬 수 있는 제품의 마케팅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해 기획, 콘티 구성과 카메라 워크 등을 포함해 촬영 제작 전반을 지휘 연출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의 주요 활동은 아트디렉터다. 다양한 분야 예술인들의 작품을 발굴하거나 기존 작품을 선정, 각종 프로그램의 교류 전시 공연 판매와 관련된 행사를 주관하고 구매자를 찾아주는 비즈니스 역할까지 포함하고 있다.”
- 이번 서울 방문도 아트 비즈니스와 관련된 업무 때문인가?
“그렇다. 미국에서 전시할 그림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작품을 선정, 초청하기 위해 왔다. 우선 골프클럽의 풍광을 판타지 수채화로 담아내는 신정무 화백의 작품을 초청 대상으로 선정했다. 아름다운 필드의 원색 풍경을 배경으로 골프채를 휘두르는 골퍼와 갤러리들의 동작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신 화백의 작품세계를 미국에 소개할 예정이다.”
- 광고계의 ‘오스카상’으로 일컫는 미국 클리오 광고제 시상식에서 클리오 본상을 여러 번 수상한 화려한 경력의 광고 제작으로 알고 있다.
“1980년대 LA에 사무실을 둔 광고회사 ‘Q 스튜디오’를 아버지가 창립했을 때 나는 16살 무렵이었다. 자식 중 내가 아버지의 직업적 DNA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 광고 제작 현장을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아버지의 요청이 아니고 내가 자발적으로 흥미를 느껴 끼어들었고 아버지로부터 직업적 자질도 인정받아 쉽게 진로가 열렸다.
‘Q 스튜디오’는 1987년 ‘삼성 휴먼테크 1’로 클리오 본상을 수상하기 시작해, 1989년 ‘휴먼테크Ⅱ’, 1990년부터 ‘골덴텍스’ ‘맥콜’ ‘엘란트라’ ‘삼성카메라’ ‘메르꼴레디’ 등이 연거푸 화이널리스트상을 수상했다. 제일모직의 ‘골덴텍스’와 현대자동차의 ‘엘란트라’ 광고 등 크게 주목을 받은 광고들이 내가 참여해 시도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품들이다. 이성적이고 미래 과학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는 호평을 받아냈다.”
- 1990년대 초 대기업 광고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것은 획기적이었다.
“CF모델 중심의 상품이나 기업광고가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하는 모험적인 시도에는 광고주인 기업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광고주가 실험성 광고로 생각하거나 새로운 광고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기계적이고 드라이하다는 통념을 깨고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복지CF’의 새장을 개척했다는 호평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광고 제작작업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계기가 클리오상이었다.”
- 라디오 시대는 CM송, TV시대는 CF가 시대적 유행문화를 선도하는 창구가 되었다. CF가 제품의 판촉을 돕는 홍보물이지만 반짝 영상을 통한 촌철살인의 표현 연출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광고 전문가라는데.
“1979년 기업광고를 통해 ‘우리 서로 인사합시다’라는 캠페인을 히트시켜 유행어를 만들어낸 분이다. 아버지는 서울대 음대에 진학해 피아노 연주 음악을 전공했으나 2학년을 마치고 공군사관학교를 거쳐 청년기를 공군 장교로 보내고 중년기에 동양방송(TBC)에서 광고업무로 활동을 시작하셨다. 미국 이주 후에도 광고인으로 한국 기업의 글로벌화에 역량을 평가받았다.
딸만 네 자매를 두셨지만 내가 아들 몫으로 아버지 후계자가 되었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결코 평온하고 평탄하지 않았다. 임기응변에 강해야 하고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앞서야 하면서 거칠고 냉혹하게 충돌하는 전쟁터 같은 광고업계에서 파란만장의 ‘용띠 인생’을 살아왔다.”
-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니 짐작이 간다. 1991년 미국 교민신문에서 인터뷰로 소개한 당신의 기사와 사진을 보았다. 나이 지긋한 스태프들이 작업하는 광고 영상 촬영현장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현장을 지휘하는 소녀티의 젊은 여성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20대 시절이었다. 나는 한때 세계적인 온라인 기업 ‘아마존’ 계열의 기술교육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 엔씨소프트와 카카오의 젊은이들의 미국 기술연수 교류에도 관심을 두고 참여했지만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확장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해 안타까웠다.”
- 신상옥 최은희 커플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며 탈북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영화사를 운영할 때 제작작업을 함께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국에 들어와 영화 제작 활동을 시작했을 때 2년 6개월 정도 VMI(비주얼 매직 이미지) 특수효과 분야 작업에 참여했다. 그 무렵 신상옥 감독의 영화 제작 활동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선택받기가 쉽지 않을 때였다.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영화제작과 기획 등 영화공부를 많이 했다.”
- 신상옥 감독과 함께 일하는 동안 잊을 수 없는 비화가 있다면?
“그분이 일생을 두고 구상하고 연출 및 제작 준비 작업을 꾸준히 하던 작품은 세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정복한 ‘칭기즈칸’ 영화였다. 끝내 미완성으로 한을 안고 눈을 감았지만 아마도 천국에서도 그 작업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상상을 한다. 기마 대군을 이끌고 그 말굽 아래 아시아와 유럽대륙을 정복한 영웅이었으니 카메라가 담아낼 광활한 전쟁터의 전경 스케일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 가끔 신 감독이 꿈꾸던 블록버스터 영화의 규모가 궁금해진다.”
- 가족은?
“남편은 엔지니어로 활동하고 있고 95년생 아들과 99년생 딸이 있다.”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다면?
“나는 미국 시민으로 미국에서 살지만, 어머니의 나라를 뜻하는 모국은 역시 한국이다. 서울에 오면 포근해지고 힘이 솟는다. 서울 연시내(은평구 불광동)에 살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들, 다정하게 웃고 즐기며 놀고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과 동네 골목길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는 지금 광고인으로 보다 아트 디렉터의 사업으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먼저 한국의 예술인들이 돈을 벌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착실하게 찾아내고 주관하는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겠다. 지금은 가난한 예술가의 창작시대가 아니라 여유롭게 즐기면서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인의 시대인데 그 에너지를 열어주고 지원하는 아트 비즈니스 사업을 멋지게 추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