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단독공개] 국화 옆에선 정형모 화백과 정진미 화가를 그리다

- 정형모 화백 장녀 정진원 교수, 생전 아버지를 생각하며 본지로 보내온 글

2023-02-03     정진원
2019년

'인물화의 대가' 서양화가 정형모(鄭炯謨) 화백이 3일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박정희·전두환·김대중 등 국내의 역대 대통령 초상화를 비롯해 미국의 카터·클린턴·부시 대통령, 오바마 부처, 처칠, 프란치스코 교황, 헤밍웨이, 대기업의 창업주인 삼성의 이병철, 한진의 조중훈, 코오롱의 이동찬 회장 등 정치인, 종교·경제인 등을 망라하는 당 시대의 유명인사 인물화의 독보적인 경지를 열어온 미술계 거목이다. 본지는 정 화백이 병실에서 투병 중일 때 장녀인 정진원 튀르키예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가 부녀화가전 당시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글을 독점, 공개한다.[편집자주] 

정진원(동국대학교 세계불교학연구소 교수) = 조각가 백문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형모화백, 그는 인물화가로서 대상 인물의 성품을 파악하고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여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인물화가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이 아닌 한국의 대표 조각가 백문기 제삼자의 이 한 문장으로 정형모 화백의 평가는 더 이상의 사족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필자는 정 화백의 큰딸이자 정진미 화가의 언니로 두 사람의 화필인생의 에피소드를 기억해보려 한다. 1960년대 초 아주 어린 시절 ‘아빠 정화백’은 순화동 집에서도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초상화부에 다니셨다. 엄마는 단칸방 수업 때면 연년생인 남동생 진철을 업고 나를 데리고 나오곤 하셨다고 한다. 분명히 생각나는 것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퇴근하는 아빠를 엄마와 두 남매가 장난치며 서소문으로 마중 나갔던 기억들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67년 가세가 기울어 산꼭대기 염리동으로 이사한 시절, 부엌 천장 위 다락방에서 열두 명의 음악가를 그리시던 아빠를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범상치 않은 눈빛의 베토벤을 필두로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모자가 인상적이던 와그너, 영민하고 귀엽던 모차르트, 긴 수염이 무서워 보였던 브람스, 여성스럽던 쇼팽, 동그란 안경의 슈베르트, 후덕한 슈만, 잘생긴 할아버지 차이코프스키, 우리나라 음악가로는 홍난파가 있었다. 음악은 모르는 채 나는 그들의 얼굴로 음악을 배운 셈이다. 그중에서도 단발머리 미남이었던 리스트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걸어 놓고 태교를 한 때문인지 나는 엄마 아빠를 닮은 게 아니라 종종 리스트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하였다. 삼복더위에 골방에서 땀 흘리며 모셔낸 열두 분의 음악가 음덕으로 우리는 아현동 중턱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도 인상적인 그림이 있었다. 실물 크기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만의 장개석 총통이 악수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계셨는데 그것이 그림인 줄 알면서도 매번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특히 어둘 녁 집에 들어올 때마다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아무리 그림이라고 다음엔 놀라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어김없이 놀랐던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아빠의 그림엔 혼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

2004년 작고하신 엄마(박연희 여사)께서 아빠가 그린 음악가 그림을 서울 시내 화방마다 팔러 다니고 또 다재다능하여 꽃 그림 유화 소품을 직접 그리셔서 납품하는 등 고생 끝에 우리는 좀 더 아현동 아랫동네 집으로 이사했는데 아빠는 거기서 광복절날 서거한 육영수 여사를 그리시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정형모 화백이라는 호칭을 자필로 써주시는 등 그림에 대한 인정과 신뢰를 얻게 되었다.

아빠는 늘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나서 어린 우리에게 어떤지 의견을 물어보셨다. 그때만큼은 정말 우리의 말을 경청하고 전문가처럼 대해주셨다. 그러므로 필자는 국문학과 철학을 전공하면서도 그림에 대해 나름대로 ‘귀명창’ 소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딸로서 문학자로서 아버지 정형모 화백과 동생 정진미 화가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도 이러한 존중의 힘이 컸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는 오 남매인데 맏딸인 필자 정진원과 화가이자 시인인 남동생 정진철, 여동생 정진미, 수학 선생 정진영, 카메라 감독 정진석이 모두 미술대회에 나가면 입상해 와서 우리끼리 미술상은 상으로 치지 않고 우등상만 쳐주기로 약속한 기억이 난다. 그만큼 우리는 그림 속에서 성장하였다. 삼 남매는 그림과 사진 등 결국 예술로 부모님의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 집에서 육영수 여사의 초상과 남산 어린이 회관 개관식, 사랑의 열매를 달아주는 모습 등 영부인의 활동을 그림으로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아버지의 영혼을 표현하는 듯한 인물화의 가치가 차차 알려져,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다시 염리동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언덕이었지만 번듯한 양옥집이었다. 거기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1979년 10월 26일을 맞게 되고 아버지는 국장에 쓰일 대형 영정을 의뢰받고 밤을 새워 몇 날 며칠 그리시는 시절 인연을 이어간다. 필자는 저 그림을 어떻게 집 밖으로 나오게 할까 걱정하였다. 그만큼 그림이 커서 아빠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작업하셨다.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처럼 이 두 분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키운 팔 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인물화를 실력으로 인정받고 예술로 승화시킨 원동력이었고 필자 또한 가난한 화가의 딸이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인문학자가 된 데에는 엄마의 헌신과 그 영향도 컸다고 생각한다.

이제 화가 정진미의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화가 정진미는 오 남매 중 셋째로 착하고 명랑 온화한 성격으로 누구와도 친화력 있는 면이 엄마 박연희 여사와 닮았다. 게다가 글과 그림 노래에도 다재다능해 엄마를 제일 많이 닮은 딸이라는 것을 찬찬히 자기 길을 가며 입증하고 있다.

사실 어릴 적에는 언니와 오빠에 이은 서열과 기대치 않은 딸이라는 남아선호사상 편견으로 집안에서 그림 실력이 저평가되어온 면이 있었다. 그러나 노래 잘하고 당시 인기가수 김추자의 춤도 잘 추어 아빠 친구들이 오시면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다재다능한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글과 그림도 빠지지 않아 그의 능력은 교회 성가대와 시화전에서 빛을 발하며 대학도 일본어를 전공하는 등 미술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의 화가 인생의 고단함을 지켜보며 자란 우리였기에 그림은 미대생인 아들 정진철에게만 계승되는 것으로 우리는 암묵적으로 합의하였다. 자칫 정진미의 재능을 취미생활로만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의 화가로의 길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오빠 정진철은 그림과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 대학 재학 중 대한민국 미술대전과 동아미술대전에 입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지만, 오히려 정신적인 세계가 깊어진 시로 돌아서 시인이 되었다.

21일

아빠를 이을 계승자는 이제 명실상부 정진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빠 정형모 화백 화실 동호갤러리에 다니며 고운 마음씨로 살펴드리고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자 발군의 실력이 일취월장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공모전에 입상하며 자신감이 생기자 그 실력으로 홍익대 미술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바로 취득하였다. 늦은 나이에 딸 같은 학생들도 하기 힘든 작업을 해내고 전시회를 여는 것을 지켜보면서 ‘신사임당’ 같던 엄마의 선물이로구나 싶다.

착한 딸 정진미는 엄마가 오래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할 때도 함께 모시고 살더니 이제 그림밖에 모르는 아버지를 잇는 후계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도 엄마는 남편이 마음 쓰이고 자식들이 여전히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딸 정진미가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제 2004년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 한 이 두 부녀의 전시회가 열린다. 아버지의 대를 잇는 재능적 유전자와 자신의 노력으로 청출어람의 역사를 쓰는 내 동생 정진미 화가. 정형모 화백과 정진미 화가의 작품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필자의 기도가 합해져 대한민국 인물화의 도도한 화풍을 이루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