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영월행 일기'의 질박한 무대...극작 묘미와 연극적 재미의 조화

- 이강백 작, 김성노 연출...늘푸른연극제 초청작 '영월행 일기' - 작가의 상상력과 주제와 형식 등 독보적인 수작 - 영상과 트릭 없는 담백한 연극의 진미...배우들의 앙상블 돋보여

2023-01-29     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제7회 늘푸른연극제 극작가로 초청된 이강백 작가의 '영월행 일기'를 개막 첫날인 1월 28일 원로연극인 20여 명과 함께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관람했다.

극단 동양레퍼터리 김성노 대표가 연출하고,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해온 문경민·최승일·배상돈·이성원·임솔지 배우가 앙상블을 이룬 무대는 영상과 트릭이 없이 무대미술(민병구)과 조명(이인연), 음악(서상완)으로만 맛을 내 담백한 연극의 진미를 느끼게 했다.

연극은 상상력과 놀이가 어우러진 배우들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영월행 일기'는 작가 이강백 특유의 극작술과 김성노의 정석 연출,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가 합을 이뤄 컬러플 시대에 흑백의 심도있는 아우라를 안겨준 점이 좋았다.

필자는 이강백이 40여 편의 주옥같은 희곡을 발표한 한국의 대표적 극작가의 한 분이고, 권력의 위선과 억압을 상징과 희화로 창작한 우화적인 작품세계도 높이 평가하지만, 솔직히 예민한 주제가 버거워 많이 접하지는 못했다.

이번 원로 초청 연극제에 내놓은 '영월행 일기'는 1995년 서울연극제 희곡상과 이듬해 대산문학상 수상으로 평가받은 작품으로 주제와 형식, 표현 방법 등이 독보적인 수작이다.

영월은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있고, 이 희곡은 신숙주 한명회의 종들이 그곳을 세 번이나 다녀온 일기(허구)를 통해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했다. 여기서 번득이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이다.

이강백은 신숙주의 하인 조당전이 5백 년 전에 쓴 ‘영월행 일기’라는 서책을 고서점에 산 이성원이 고서동호회 회원(문경민, 최승일, 배상돈)과 진품 감정을 하던 중 고서를 판 임솔지가 나타나 되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일기 내용을 체험해 본다는 발상으로 희곡을 구성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겹 시간을 극 중 극 형식으로 대입시켰다. 현실의 배우들이 모형으로 만든 당나귀 수레를 타고 전생을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데 이를 놀이형식으로 표현하니 재미가 있는 것이다.

작가 이강백은 이번 공연에서도 상상력을 강조했다. 작가가 상상해 낸 이야기를 무대의 배우가 좀 더 크게 상상해 보고, 관객들은 배우의 그것을 더욱 크게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김성노 연출은 하나의 무대 세트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작가의 주제인 ‘인간 본성’을 조명했는데 그 매개체는 모형 당나귀였다. 고서 때문에 만난 이성원과 임솔지가 일기 속 종 신분의 조당전과 김시향이 되고, 고서동호회 회원인 이동기(문경민), 부천필(최승일), 염문지(배상돈)가 조선왕조의 한명회, 신숙주, 세조가 되는 역할 변신은 연극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고서를 응용한 민병구의 무대미술은 묵직한 아우라를 빚어낸 점은 좋았으나, 영월행 여행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서가가 열리며 단종의 처소가 드러나는 서프라이즈로 보상해주는 미덕을 보였다.

이번 무대의 강점은 배우들의 앙상블이었다. 일본 스즈키 연극에도 적극 참여해 온 이성원 배우의 안정감 있는 연기와 '로물루스 대제'에 선을 보였던 신예 임솔지 배우의 풋풋한 연기가 잘 어우러져 역할 변신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여행이라도 세 번을 반복하면 지루하고 따분할 수 밖에 없다. 필자도 두 번째 여행부터 흥미가 감소함을 체감했다.

그런데 연기파 세 배우의 찰떡 호흡이 숨통을 터주면서 극적 재미를 더해 주었다. 노경식 작가의 '두영웅'부터 함께 무대에 서온 세 배우는 무대 밖 술자리서도 연출과 생체 리듬을 맞춰와 앙상블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문제는 이들의 연극놀이에 관객이 적극 반응하지 않아서 웃음이 인색했고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 늘푸른연극제 대표 극작가로 초청된 이강백이 이 작품을 통해 주고자 하는 주제와 메시지는 잘 전달되었다고 본다. 작가는 역사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정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 본래는 네 가지 맛(단맛, 신맛, 쓴맛, 매운맛)으로 표현하고 싶었으나, 수정 끝에 표정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폐위된 단종의 표정을 무표정, 슬픈 표정, 기쁜 표정으로 그려냈다. 무표정과 슬픈 표정을 보고 받았을 때는 세조가 조카를 살려두지만, 기쁜 표정이 보고되자 사약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트레이드 마크인 권력자의 횡포와 계층의 갈등을 보여주고자 했다.

묵직한 주제와 역사의 교훈을 극 중 극으로 표현한 이강백의 희곡, 단일 무대에서 미니멀하게 이를 형상화한 김성노의 연출, 그리고 어려운 주제를 연극놀이로 잘 풀어낸 연기자들의 배우술이 어우러져 모처럼 조미료 치지 않은 담백한 맛을 이 연극에서 맛볼 수 있었다. 2월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