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일본 개호(介護) 소설 2편 극화한 신춘 역작 '장녀들'
- 치매와 당뇨로 위험한 어머니 돌보는 장녀들 통해 고령화 사회 가족문제 조명 - 서지혜 연출의 섬세한 각색, 치밀하게 계산된 동선으로 소설 무대화 - 김화영 이도유재, 강애심 김나연 배우의 모녀 역 앙상블 빛나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소설 같은 연극, 연극으로 투영시킨 고령화 사회 가족 문제. 새해 첫 작품으로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1월 3~15일)에서 관람한 ‘장녀들’은 일본 작가 시노다 세츠코(1955~ )의 소설집 『장녀들』에 수록된 3편의 중장편 중 ‘집 지키는 딸’과 ‘퍼스트 레이디’ 2편을 극단 프로젝트아일랜드 서지혜 대표가 각색 연출해 무대에 올렸다.
1부 ‘집 지키는 딸’과 2부 ‘퍼스트 레이디’는 내용은 다르지만 서지혜 연출은 같은 무대 세트를 썼고, 극 중 한 장면에 양쪽의 장녀를 대비해 볼 수 있도록 연출해 관통의 효과를 시도했다.
한 편인 줄 알고 갔는데 두 편을 보게 되어 보너스를 받은 기분도 들었지만 좁은 공간에서 세 시간을 몰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연초에 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 : 물의 길’과 연극 ‘장녀들’을 보면서 올해의 주제는 ‘가족’임을 확신하게 됐다.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 징후도 공포지만 사회 변화에 따른 가족 붕괴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아바타 2’와 ‘장녀들’은 가족 위기의 시대에 역할과 복원에 대한 근원적 문제를 다루고 있어 호감이 갔다.
서지혜 연출의 ‘장녀들’을 보며 장편 소설 한 편을 읽는 아우라를 느꼈다. 유명 소설을 무대에 올린 작품도 여럿 보았지만, 원작의 감흥을 살려내지 못해 실망을 금치 못하곤 했다.
이번에는 시노다 세츠코의 소설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접한 연극인데 ‘소설이 읽혀지듯’ 잘게 이어진 장면 장면의 디테일한 감정과 묘사가 잔잔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비슷하면서도 문화가 다른 일본인의 정서와 감정과 상황을 우리 현실에 와닿도록 각색하고 연출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장녀(長女)와 개호(介護)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가족시대에 우리도 장녀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강했지만 출가외인이 되면 약화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동생들을 돌보며 희생하는 장녀라기보다는 이 작품에서처럼 부모를 부양하고 돌봐야 하는 책임이 강한 캐릭터로 인식됐다. ‘개호’란 부모의 노환, 질병으로 인해 그 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말하는데, 세츠코의 소설은 장녀에 의한 노인부양 문제를 다루고 있다.
1부 ‘집 지키는 딸’은 장녀 중에서도 비혼(非婚)이며 직장생활을 하는 나오미(이도유재)와 치매에 걸린 어머니(김화영)가 주인공인데 소설인 만큼 상상도 풍부하고 구성도 다채롭다.
어머니의 증세가 심해지자 나오미는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에 전념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오가와 준(최무인)과 데이트를 하는데 하필이면 그의 집에 불이 나고, 어머니가 방화범임이 밝혀지면서 중년의 장녀는 심신이 지쳐버린다. 여동생과 제부는 요런조런 핑계로 빠져나가고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많지만, 관객은 딸(이도유재)과 엄마(김화영)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이며 감정이다. 외모로도 적역인 이도유재와 지난해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개성을 보인 김화영 배우는 모녀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감정의 교류뿐 아니라 현실적 다툼과 부딪힘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딸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휘어잡으려 하지만 어머니의 방어도 만만치 않다. 일본 소설이 원작이지만 객석을 꽉 채운 여성 관객 상당수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극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설을 읽지 않아 이해가 되진 않지만 어머니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소녀 유키(김혜윤)는 어머니의 감정 배출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였고 이 작품의 묘한 매력이었다.
1부는 지친 나오미가 유키에 기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필자는 소설 같은 무대를 따라잡기에 힘은 들었지만, 모녀 사이에 흐르는 애잔한 정서에 연민을 느꼈다.
우리도 부양과 치매를 다룬 연극이 적지 않지만 ‘장녀들’은 가부장제, 종교, 비혼과 여성 직업 등 조명하는 스펙트럼이 넓었고, 특히 현실처럼 다가오는 디테일한 상황과 감정이 묻어나는 대화는 흡수하기가 편했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도 많았다. 대학로의 주목받는 중견 서지혜 연출이 왜 이 작품에 천착해 중장기 창작지원사업으로 했는지는 1부만 보고도 이해가 갔고, 공감도도 충분했다.
20분을 쉬고 다시 2부 ‘퍼스트 레이디’가 같은 무대에서 공연됐다. 낮에는 당뇨가 심하고 신장이 문제인 엄마의 간병인, 밤에는 의사인 아버지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 30대의 게이코(김나연)와 엄마(강애심), 아버지(김귀선)가 주요 배역이다.
딸과 엄마는 첫 장면부터 부딪힌다. 평생 병원집 위압 속에서 무시당하고 시어머니 간병하느라 병을 얻은 엄마는 청량음료와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데 딸은 엄마의 기호식품을 가차없이 폐기한다. 서로를 위한다는 것이 상처가 되는 경우는 우리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 공감은 갔지만 그 빈도가 좀 많아지면서 신경이 자극되기도 했다. 모녀간에 골이 깊은 것 같지만 엄마는 딸에게만 자기주장이 강하고, 딸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체 간병에 매달리게 된다.
노역을 잘하는 연기파 강애심 배우가 다소 선병질적인 어머니 역을 잘 보여주었고, 딸 역의 김나연은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하는 딸 역에 내키지 않는 퍼스트레이디 역까지 양면의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모녀의 부딪힘이 있을 때마다 해결사처럼 등장하는 아버지 역 김귀선 배우의 연기에 공감이 갔다.
2부에서 상공회의소 회장 역을 맡은 남동진 배우의 에지 있는 연기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아날로그로 공간을 분할하며 기능을 높인 무대 디자인도 칭찬하고 싶다. 특히 서지혜 연출은 인물 배치와 동선 구성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 배우들이 직접 문을 여닫고 벽을 움직여 일사불란하게 장면 특유의 미장셴을 만들어냈다.
원작에 충실하고, 소설을 극화하다 보니 ‘장녀들’에는 1, 2부에 23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프로그램을 참고해도 누가 어떤 역할인지 헤아리기 쉽지 않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서지혜 대표는 이 작품을 통해 고령화 사회, 사회보장제도, 아직도 존재하는 가부장적 사고와 습관 등을 부각하면서 남의 일 같지 않은 ‘부모 돌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는 화두를 던졌다. 관극을 하고 나면 ‘장녀들’이라는 제목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소설처럼 평면으로 펼치기보다는 연극으로 입체화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각색 과정에서 압축했다면 시간도 배역도 줄일 수 있고, 모녀간 특히 장녀들의 현실적 아픔이 승화되어 관객의 심금을 울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구상은 필자만의 과욕일까.
2026년 한국의 고령화 인구 비율은 20%를 넘는다고 한다. 정초에 부모 돌봄을 화두로 던진 ‘장녀들’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 영상과 공연에서도 올 한해 ‘가족’에 역점을 둔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