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체홉의 '세자매'가 왜 명작인지 확인시킨 전훈 연출

- 안톤체홉 전용극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관람하다

2022-12-19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안톤 체홉의 새로운 이해와 매력. 안톤 체홉의 '세자매'를 안톤 체홉학회 버전으로 안톤 체홉극장에서 한해의 끝자락에 관람할 수 있어 행복했고, 볼 때마다 이해되지 않던 '세자매'의 진면목을 체득할 수 있어 흐뭇했다.

내년까지 계속되는 이 공연의 편리한 예매 시스템은 입장의 번거로움이 없어 좋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푸근한 객석에 기대앉아 막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여유 또한 이 극장의 매력이자 공연문화의 진일보였다.

50석도 안 될 것 같은 객석이었지만 무대는 넓었고, 손으로 그린 듯한 자작나무 숲 배경은 자연의 멋이 느껴졌다. 1, 2막의 오밀조밀한 정제된 무대 구조, 잔잔한 배경음악, 몽환적인 조명…. 무엇보다 음울한 아우라 사이로 배우가 보였고, 그들의 움직임과 대사들에서 사람의 체취가 묻어났다.

'갈매기', '벚꽃동산', '바냐아저씨'와 더불어 유명 배우들의 '세자매'를 보았지만, 그때마다 체홉의 작품세계는 짙은 여운을 안겨주었을 뿐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0년 전후한 무렵에 안산의 서울예대에서 접한 전훈 연출의 '벚꽃동산'은 체홉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일깨워 주었다. 신축 건물에 블랙박스극장이 있었지만 전훈 연출은 로비와 야외 잔디광장으로 관객을 이동시키며 학생 공연의 새 경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건물 로비에서 진행된 파티 장면에서 유리로 된 외벽에 물차를 동원해 빗물을 재현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성대 앞 연습장을 오가면서 안톤 체홉극장을 발견하고 언젠가 꼭 한번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원로연극인 모임인 대학로연극인광장의 유태균 배우가 자리를 마련해주어 전훈 연출의 작품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80분간 진행된 1, 2막은 세자매와 오빠, 군인들과 하인들의 캐릭터를 통해 20세기로 들어서는 세기말의 변화와 인생 철학들을 부각하는 데 중점을 두어 다소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15분의 휴식을 거쳐 재개된 3, 4막은 85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을 정도로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세 자매의 내면이 보여 재미도 있었지만 이제야 '세자매'가 왜 명작인지를 이해한 것 같은 후련함을 안겨주었다.

연극에서 연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는데 특히 배우들의 구어체 대사들이 현실 언어로 들려 번역극 같은 생경함이 없어 좋았다.

10여 명에 달하는 배우들 또한 낯익은 얼굴들이 전혀 없는데도 각자의 캐릭터를 분명하게 살려내 우리의 현재 삶처럼 동화시키는 매력을 발산했다.

12월 17일 공연 당시 맏언니 올가 역의 서이주, 둘째 마샤 역의 서송희, 막내 아리나 역의 한소진이 보여준 감정의 교류와 호흡의 앙상블, 정감이 가는 미장셴으로 인해 필자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연민과 공감을 느꼈다. 속 깊게 핏줄들을 감싸 안는 올가, 이뤄지지 않는 사랑에 몸부림치는 마샤, 사랑 없이도 함께 새 출발 하려다 좌절하는 아리나의 상실감…. 그래도 이들은 다시 일어서고 일을 하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남자 배우들의 연기도 개성이 뚜렷했다.

안드레이 역 류종현, 중령 베르쉬닌 역 진남수, 선생 꿀르이긴 역 서준호, 대위 살료느이 역 노영신, 중위 뚜젠바흐남작 역 최장천….

특히 군의관 체부뜨긴 역을 맡은 유태균 배우의 달관한듯한 인생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필자는 그가 작가 체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톤 체홉을 학구적으로 접근하는 전문 단체를 이끌며 체홉 작품을 전문적으로 공연하는 연출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