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스마트폰 시대에 관객 감성 울린 편지의 추억...박정자·오영수 배우의 '러브레터'
- 두 배우의 성숙한 연기 앙상블, 그리고 긴장감 유지한 연출력 돋보여 - 아날로그 매력에 푹 빠진 관객들...‘소통’과 ‘복고’에 주목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편지는 살아있다. 남녀가 47년간 주고받은 333통의 편지가 원숙한 배우들에 의해 육성으로 살아나 관객에게 추억과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울림을 주는 연극.
박정자·오영수 배우의 ‘러브레터'(10월 6~11월 1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극작가 A. R. 거니의 대표작으로 1988년 뉴욕에 초연된 이 작품은 ‘두 배우가 서로 쳐다보지 않고 관객을 향해 나란히 앉아 대본을 읽는’ 낭독공연인데 만석의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작품에 몰입했다. 간간 공감의 탄식과 웃음이 터졌지만 움직임이 거의 없는 목소리 연기임에도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기립해 박수를 쳤다.
첫 날 첫 공연을 보면서 첫 의문은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왜 이 작품에 관객이 호응하는 것인가였다.
서로의 안부나 가족 간 대화조차 카톡으로 하고, AI가 미래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읽고 듣는 공연에 관객이 반응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소통’과 ‘복고’의 심리였다.
3년 가까이 일상을 옥죄던 코로나가 풀리자 사람들은 허탈해졌다.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무너졌고, 인생을 어떻게 리셋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최근 연극 동네에 손톤 와일더의 ‘우리읍내’ 공연이 느는 것도 일상의 소중함을 다뤘기 때문 아닐까. ‘러브레터’ 또한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주변의 사소한 사건들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주는 매력이 있고, 아날로그적으로 주고받는 방식에서 인간적 친근감을 갖게 하는 감성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 편지를 누가 어떻게 읽어주느냐다.
80대에도 열정이 넘치는 박정자와 ‘오징어게임’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오영수의 조합은 인기 그 이상의 성숙한 연기의 앙상블이란 점에서 관객에게 어필한다. 여기에 오경택의 연출력도 작용했다.
연출의 요체는 ‘팽팽한 긴장감’이라고 본다. 오경택 연출은 거니의 ‘작가노트’에 충실했다.
“두 배우가 서로 쳐다보지 않고 관객을 향해 나란히 의자에 앉아서 대본을 소리 내어 읽고, 공연 중에는 두 배우가 서로 쳐다보지 않는 것이 좋아요. 서로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를 듣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들어주세요.”
무대에서 두 배우는 칸막이 없이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 보지 않고 목소리 만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한다.
여기서 탁월한 선택은 ‘육성(肉聲)’이다.
요즘 대다수 공연이 무선마이크로 음성을 증폭 시키지만 박정자 오영수 배우는 자신의 목소리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언플러그드한 생생한 라이브의 아우라, 필자는 그게 좋았다. 그리고 가까이 있지만 벽이 있는 것처럼 긴장감을 유지한 연출력에 끌렸다.
박정자 오영수의 연기를 이야기하기 전에 ‘러브레터’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편지로만 이뤄진 독특한 희곡이지만 듣기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이 연극의 강점이다.
편지의 당사자인 멜리사는 적극적이고 솔직한 성격의 자유분방한 예술가이고, 앤디는 모범생 캐릭터다. 미국 백인사회 중산층인 이들은 1929년 미국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을 거쳐 오일쇼크 시대까지 함께 한다.
멜리사는 대학 졸업 후 미술공부를 위해 피렌체 유학을 마치고 26세에 결혼, 두 딸을 낳지만 이혼 후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예일대를 나온 앤디는 해군장교로 복무하고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법원에 다니며 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변호사를 거쳐 상원의원이 된다.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면서도 각자의 길을 걸었던 멜리사와 앤디. 이들은 서로 다른 궤적의 삶을 살지만 편지를 주고받는 오랜 교류를 통해 서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 편지란 무엇일까? 작가는 여러 가지로 편지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편지는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앤디)
“편지는 점점 사라져가는 예술이야. 편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앤디)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를 먼 곳에서 너에게 보내는 거야. 나에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내 전부를 다 보내는 거야.”(앤디)
편지 쓰기 싫어하는 멜리사는 솔직하게 반응한다.
“난 편지만 쓰고 싶지 않아. 정말 싫어. 난 네가 보고 싶단 말이야.”(멜리사)
텍스트만 보면 타인의 사생활 엿보기 같은 이 작품을 연출은 어떻게 입체화했을까.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디자이너 김미경의 극장 천정까지 닿은 거대한 편지 조형물이 압도한다.
여타 공연은 대본을 펼쳐놓고 낭독하는데 오경택 연출은 배우들이 멜리사와 앤디가 주고받은 333통의 편지를 그림엽서로 만들어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연출했고, 여기에 어린 시절 주고받은 그림들이 동화책 속 그림처럼 무대 곳곳에서 튀어나와 관객들에게 예전의 향수와 추억을 되새기게 했다. 소품디자인 권미경의 개와 고양이 그림이 재밌다.
‘러브레터’는 제목 그대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자 삶의 이야기다. 편지를 통해 서로의 진심을 전하며 관계를 맺고 진정한 소통을 갈구하는...
그래서 배우들의 섬세한 읽기와 표현력을 요한다. 텍스트만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시켜야 하는 것이다.
‘라스트세션’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로 작품의 고유한 색깔을 살렸다는 평을 얻은 오경택 연출은 “주인공들이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편지를 썼는지를 분석, 한 단어 한 음절 한 문장을 다듬는 데 공을 들였다”고 했다.
낭독공연 형식이지만 배우들도 이 작품을 소화하기가 녹록지 않다. 편지는 평면적이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고, 엄청난 감정이 축약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우들은 그 어려운 감정들을 목소리와 표정으로 소화해냈다.
멜리사 역 박정자는 편지라는 매개체로 한 인물의 평생을 표현해야 하는 이 작품에서 탁월한 목소리 연기를 노련하게 구사해냈다. 시대의 흐름과 감정 상태를 목소리의 톤과 억양, 뉘앙스로 변별시킨 것이다. 이 같은 연기는 정확한 딕션은 기본이고, 관객을 무대에 끌어들이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수인데, 80대의 박 배우는 힘을 뺀 자유자재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반면 오영수는 인물의 심리적 감정표현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낭독같지만 온몸으로 연극성을 살려낸 것이다.
이 원숙한 두 배우가 생성해내는 현장의 아우라에 관객이 몰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전자매체와 시각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편지가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편지가 지닌 힘과 역할이 소멸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빛바랜 편지에는 누군가의 삶의 궤적과 비밀이 서려 있고, 공간의 거리를 이어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러브레터’의 작가는 남녀가 평생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에 스민 사랑의 감정, 생의 격변 속에서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절절한 대사로 펼쳐냈다. 특히 소울메이트로 성숙해가는 남녀의 감정을 미화만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백인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풍자도 그려내 좀 더 진실되게 하고 때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알랭 들롱, 톰 행크스 등 명배우들이 출연했다. 국내서도 여러차례 공연되었지만 농익은 배우 박정자 오영수 버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