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남동진·최무인 배우가 엮어내는 열정의 무대 '아일랜드'
- 2022년 버전의 '아일랜드', 서지혜 연출의 2인극 향연 - 반세기전 정치적 상황을 따뜻한 인간애로 풀어낸 웰메이드 연극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숨소리, 동작 하나에서 소품들과 효과까지 정제되어 빚어지는 아우라 속에 두 남자가 뿜어내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인간적인 몸부림…열정 연기와 다부진 앙상블의 2인극 향연. 서지혜 연출에 최무인·남동진 배우가 열연하는 '아일랜드'는 완벽을 기하려한 팀워크의 완성도 높은 역작이었다.
전석 매진에 어렵게 표를 구매, 10일 아르코 소극장에서 관람한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아일랜드'는 시대의 변화와 인권의 신장을 체감케 해주었다. 1977년 11월 실험극장에 의해 국내 초연된 구희서 역, 윤호진 연출, 서인석 이승호 배우의 '아일랜드'를 기사화한 필자에게 서지혜 연출과 남동진 배우의 2022버전 '아일랜드'는 큰 호기심으로 다가왔고, 꼭 보고 싶었다.
통제와 검열의 유신 시대에 남아공 작가 아돌 후가드의 '아일랜드'는 정치,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인종차별은 생소했지만, 진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두 흑인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메시지는 암울했던 그 시대에 한 줄기 빛 같았다.
당시 신예였던 서인석 이승호 배우가 온몸을 검게 칠한 반라의 흑인으로 열연한 '아일랜드'는 극의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없고, 길다는 느낌이었지만 이제까지 국내에서 접하지 못했던 아프리카 인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고, 무엇보다 억압의 시대에 자유와 인권에 대한 메시지를 짜릿하게 체험할 수 있어 관객이 운집했다. 200회 공연에 2만3500여 명이 관람했고 전국 순회에 나선다는 기사를 필자가 보도했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 다시 접한 '아일랜드'는 작품 해석도, 관극 분위기도 그때와 많이 달랐다. 윤호진의 '아일랜드'는 충격적인 소재와 배우들의 이색 연기에 대학생 관객들이 몰렸다면, 서지혜의 '아일랜드'는 극한 상황 속에서 서로 아끼고 보듬는 따뜻한 인간애로 주제를 승화시켰다.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섬세하면서도 앙상블에 심혈을 기울여 연극 연기 특유의 아우라로 2인극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관객 역시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당한 젊은 마니아층이 주를 이뤘다.
공간의 제약을 받는 무대에서 관객들은 이 작품의 배경인 로벤섬을 체험했다. 모래로 채운 바닥에 파도의 거품이 밀려드는 첫 장면은 압권이었다. 무대감독 서지훈은 무대 중앙에 모래 뚝을 쌓아 감옥의 공간을 명징하게 확보, 죽음의 섬을 강조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펼치는 두 죄수의 암울한 일상은 소품 활용으로 단조로움을 벗어났으며, 여기에 조명(김성태)과 음향(김종현)이 극한의 상황들을 시청각으로 체험케 해주었다. 그 느낌이 바람처럼 자장가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제 연기를 말할 차례다. 연기는 배우들이 하지만 '아일랜드'에는 배우들 뒤에 연출이 있어 컴퓨터로 계산하듯 거의 초(秒) 단위로 분석한 디테일이 감지되었다. 공간의 채움과 비움, 강과 약, 호흡과 침묵, 움직임과 정지, 명과 암의 콘트라스트가 악보의 리듬처럼 변주를 하며 실내악처럼 무대 전체를 감쌌다. 여기에는 오래 함께 작업한 팀워크에서만 가능한 묵시적인 교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3자의 교류는 무대가 열리면 최무인 남동진 2인의 꽉 짜인 앙상블로 표출된다. 앞서 배우들의 연기 뒤에 연출이 보였다고 했지만, 이것은 필자의 주관일 뿐 무대에서는 오롯이 배우들의 호흡만이 들렸고 몸짓만이 보였다.
존 역의 최무인과 윈스턴 역 남동진은 2012년 서주희 연출의 '아일랜드'에 출연한 콤비로, 이날 이들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110분의 무대를 꽉 채웠다. 최고조로 열정을 끌어올렸다가 밑바닥 나락으로 떨어지는 곡예 같은 이들의 연기는 매 순간 멋지고 강렬한 미장센을 만들어 냈다. 단조로운 감옥의 일상이 지루함을 줄 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관객들이 한 시도 눈길을 뗄 수 없게 연기의 파노라마를 펼쳐냈다.
2인극은 너른 무대를 배우 둘이 채워야 하는 중압감도 있지만, 주고받는 둘만의 연기로 최고의 앙상블을 이뤄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여러 작품에서 2인의 명연을 보아왔지만 최무인-남동진의 감옥 대결도 기억에 남을 명연으로 꼽힐 만하다.
관록 있는 연기자 최무인은 극을 이끄는 역할이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유연한 연기를 보였다. 믿고 보는 배우 남동진은 초반 수동적인 듯하지만, 중반 이후 흐트러지기 쉬운 분위기를 다잡으며 극에 에너지를 충전시켰다. 항소심 결과를 듣고 쾌재를 부르는 존의 들뜬 감정을 보며 출구 없는 나락에 빠지는 윈스턴 역 남동진의 억제되어 터질듯한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요즘 반클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실황 영상을 보면서 초절정 기교와 신들린듯한 몰입 경지에 매료됐는데, 최무인 남동진의 수인 연기를 보며 개인기의 절정과 연기의 화합이 주는 현장의 생동하는 아우라를 새삼 실감했다.
라스트의 극중극 '안티고네'는 이 작가의 주제를 각인시키는 촉매로 나비효과를 주었을 뿐 아니라 두 배우의 연기가 총화를 이룬 명연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3년 지원을 받아 사회적 인간 연구 3부작의 하나로 '아일랜드'를 발표한 서지혜 팀은 단체 이름을 '프로젝트 아일랜드'로 바꿔 장인이 꼼꼼히 작품을 빚어내듯 모든 아이디어를 짜내고 반복 연습으로 최상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너무 완벽을 기해 숨이 막히고 지루한 틈이 있다고 해도 관객은 이 공들이고 땀 흘린 연극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에 접한 역작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