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에세이] 불혹에 ‘업’의 본질과 마주한 찬실이, “복도 많아”
[씨네에세이] 불혹에 ‘업’의 본질과 마주한 찬실이, “복도 많아”
  • 이상현 기자
  • 승인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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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 나이 마흔에 이르도록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찬실은 열정적으로 해오던 영화일을 못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자기 ‘업’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사진=영화사 찬란

지난 6월 20일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경내 국보 48호 9층 석탑 옆 야외 무대 스크린에 오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고 그예 불가(佛家)의 ‘업(業)’을 떠올렸다. 몸과 입, 마음으로 선이든 악이든 짓는 소행, 바로 그 ‘업’이다.

공교롭게 이 영화의 이해관계자들은 죄다 여성들이다.

먼저 앞자리 중년의 비구 스님 3분이 나란히 앉아 주인공 찬실이가 가난한 영화감독을 짝사랑하며 ‘번뇌’하는 장면을 간혹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상하시었다. 영가(靈駕)의 속세 이름이 빼곡히 적힌 처마, 켜켜이 얹은 기와마다 빗물을 흠뻑 쏟아내더니, 어느덧 비가 그쳐 하늘과 맞닿은 오대산 능선 실루엣을 물안개가 더욱 몽환적으로 자아냈다. 

이런 밤 풍경에 인공 조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절간 마당에서 속세 영화를 감상하는 비구니들의 표정을 훔쳐보다니. 특종을 예감했다.

영화 시작 전 노래를 불러준 웅산도 여자다. 그의 노래는 9층석탑을 병풍처럼 둘러싼 오대산 정기를 제압할 정도로 강한 아름다움이었다. 열입곱에 승려가 돼 받은 법명이 ‘웅장한 산’, 웅산. 환속 후 가수가 된 지금도 법명을 사용하는 그녀의 총천연색 목소리에 절간 승려들은 물론이고 오대산 산신령까지 오금이 저렸으리다.

오로지 영화만, 프로듀싱(producing)만 생각하며 나이 마흔에 이르도록 그 흔한 연애 한 번 못해본 노처녀(시대착오적 표현이되, 성별 구분에 의미를 두다) 찬실. 새 작품 제작을 기념한 술자리에서 무지막지한 폭탄주에 피습당해 감독이 죽자 영화일을 중단한다.

멈춰야 보인다고. 열정적으로 해오던 영화일을 못하게 되면서 역설적으로 자기 ‘업’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사진=영화사 찬란

김초희 감독(여자다!)은 이 깨달음의 과정을 짐짓 지루한 이야기선으로 풀어갔다.

김 감독은 찬실이를 통해 자기 얘기를 했다. 영화상영 직전 배우 출신 방은진 감독(여자!)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김 감독은 “예상치 못한 이유로 하던 일을 멈춘 뒤 반찬가게를 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방 감독은 “마흔 넘어 영화감독을 시작했다”며 김감독과의 교감을 강조했다. 김 감독도 10년간 홍상수 감독의 영화PD를 하다가 5년전 실직, 이번 찬실이 영화가 처녀작이다. 극중 찬실이는 조금 각색된 자기 얘기인 셈이다.

부산 사는 찬실이 아버지가 찬실이에게 편지를 썼다. “솔직히 니네 영화 지루했다.” 그게 요지인 편지.

김 감독에게 ‘지루함’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행동철학이다. 김 감독은 여전히 그 ‘지루함’의 미학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김 감독이 극중 귀신으로 등장시켜 찬실이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홍콩배우 고 장국영이 극장 객석에서 하염없이 설원을 달리는 기차의 운전석에서 찍은 장면을 보면서 손뼉을 치는 장면이 영화의 끝(ending) 장면이다. ‘지루함’은 찬실의, 그러니까 김초희 감독의 숙명적 모토다.

찬실이가 짝사랑하는 연하의 영화감독 ‘영’씨와 나눴던 토론도 ‘지루함의 미학’을 부연하는 좋은 단서다. 극중 찬실이는 일본 영화감독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는데 ‘영’씨가 ‘지루하다’고 했다. 찬실은 “엄마가 죽었는데 뭐가 지루하냐”고 되물었다. 인생의 격정(Pathos)을 묵묵히 담아내고 있는 데, 좀 지루하면 어떠냐고. 그걸 꼭 극적으로 그려내야 영화다운 것이냐고 찬실은 항변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사진=영화사 찬란

찬실은 아끼는 동생 여배우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영화 만들 때와 전혀 새로운 각도로 돈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게다가 영화 속 주인공 이외에는 단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실존하는 남자’의 향기도 맡아봤다. 

일련의 체험을 통해 찬실은 운명처럼 다가온 ‘업’은 진짜가 아님을 깨닫는다.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찬 운명적 ’업’은 자신을 늘 환타지속에 가뒀다. 가난마저 감미로운, 그런 건 ‘업’의 본질이 아니었던 셈이다. 결론에 이른 찬실이의 눈이 한결 더 반짝였다.

차갑고 냉정한 돈, 너절한 인관관계, 독설과 편견이 가득한 여론, 무의식 속에 무능을 감추기 위해 필요한 선민의식,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한 동생 여배우’는 ‘여자라서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주인집 할머니’와 대조됐다.

그렇게 영화 스크린을 벗어나 두루 경험하고 잠재의식 속 비겁한 자아까지 모두 드러날 무렵, 찬실은 그제야 진짜 ‘업’의 본질을 마주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 컷/사진=영화사 찬란

불꺼진 찬실의 방을 밝힐 전구를 사러 영화제작팀이 다 함께 산비탈길을 내려가는 장면은 ‘브나로드 운동’을 그린 흑백영화를 연상시켰다. 보름달, 그것도 엄청나게 큰 달(Full Moon)이 떴지만, 찬실은 산밑 만물상에 전구를 사러 굳이 떼를 지어 산길을 내려간다. 후배들을 앞세운 찬실이 맨 뒤에서 손전등을 비춘다.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만들고 싶은 것들을 위해 조금 먼저 깨달은 선배가 후배들의 시행착오를 조금은 줄여줄 수 있다는, 약간은 ‘오팔육’ 꼰대의 설정이다. 이 장면에서 차라리 심훈 선생의 '상록수'를 패러디 했다면, 경쾌하게 지루했던 이 영화가 더 기억에 남았을 법하다.

누구나 ‘업’을 말할 때 사뭇 비장하다. 반면 김 감독이 그려 낸 방법론으로서의 ‘업의 본질’은 유쾌하고 정감 넘친다.  ‘쎈척’, ‘잘난 척’하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삶과 사람을 소구로 ‘업’을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일관성이자,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

찬실역으로 분한 강말금 배우는 부산 사투리의 단호한 여운을 잘 구사했다. 영화 내내 오래, 가까이서 보니 예뻤다. 불혹에 업의 본질을 발견한 찬실이는, 초희는 좋겠다. 복도 많다.

이상현 기자/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사 서울 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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