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김두호가 만난 민속학자 김명자 안동대 명예교수
[인터뷰365] 김두호가 만난 민속학자 김명자 안동대 명예교수
  • 김두호
  • 승인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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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하늘 정자’로 산 민속학자 김명자교수
- 인생 희로애락 함께 한 민속자료 답사여행
- 주목받는 북한 민속학 연구와 논문 해제활동
김명자 교수(안동대 명예교수)는 한 평생 민속학 교육과 연구에 바친 '민속학의 대가'다. 국내에 하나 뿐인 국립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북한 민속학 논문 해제와 연구, 저술 활동을 이어오며 민속학자의 남은 열정을 바치고 있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호정(昊亭) 김명자(金明子 1945∼안동대 명예교수) 교수는 ‘한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인생의 꿈과 사랑을 모두 민속학 교육과 연구에 바친 분이다.

국내에 하나 뿐인 국립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이하고 3년 전부터 북한 민속학 논문 해제와 연구, 저술 활동에 민속학자의 남은 열정을 바치고 있다. 

김 교수는 2003년부터 10여년을 두고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무형문화재를 중심으로 한 민속 역사 관련 각종 학술활동과 함께 민속자료 보존, 평가와 감정 등의 분야에서 대표적인 전문가 겸 학자로 참여해 왔다.

문화재청 규제개혁위원장도 역임하고 민속사와 관련해 저술한 단행본은 민속원에서 출간한 <한국민속학개론> <한국의 가정신앙> 등 공저까지 포함하면 50여권이 넘는다.

국내 전통문화기관이나 민속박물관 등의 행사, 조사 연구 활동에도 그의 역할이 빠지지 않았고 6년간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으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 시기도 있다. 지금도 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으로 지역 문화재의 학술적인 연구와 발굴, 보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반만년으로 일컫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의식주 풍속 문화 속에 면면이 전래되어 왔거나 또는 소멸되고 변모된 세시풍속의 민속사를 발로 뛰면서 찾아내고 비교, 연구하고 정리해온 민속학의 대가 김명자 교수를 만났다.

특히 해방이후 불행하게도 문화재 관련 학술 교류가 단절된 북한 민속학계의 연구 논문을 학술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정리, 공개하는 해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명자 교수의 역할이 민속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발로 뛴 민속학자의 길

- 민속학이라는 대학의 전공학과 얘기가 나오면 국립 안동대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국내에서 민속학과가 있는 유일의 대학인 탓으로 특별히 더 바쁘게 사셨을 것 같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민속 분야는 역사와 지역의 특성, 생활환경에 따라 접근하고 찾아내야할 대상이 워낙 다양하고 생활 속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서 도무지 부지런하지 않으면 연구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민간사회에 전승되어 온 풍습, 습관, 신앙 등 모든 인습의 내력을 더듬어 가며 구술 자료도 채집하고 물증사료를 비교 분석, 정리해야 하므로 교수가 연구실 안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민속학 교수의 답사와 현장조사를 ‘필드 워크'(Field work) 라고 하는데, 직업이 ‘필드 워크'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시는 동안 민속사료와 관련, 겪고 마주친 잊을 수 없는 비화부터 듣고 싶다.

“흔히 민속조사를 다닌다고 하면 우선 민속자료, 곧 유물자료를 우선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무형문화재 분야(분과)의 위원을 주로 맡아 유물 자료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무형문화재가 잘 전승되고 있는지 실사를 하거나 보유자 인정 문제, 이수자 등의 활동 등을 실사를 통해 결정하는 일도 따른다. 사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실사에 참가하는 것보다 회의를 통한 최종 심의기구의 임무와 역할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경상북도 문화재위원은 직접 문화재 실사를 하기 때문에 무척 바쁘게 다녀야했다.

한때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 위원과 민속문화재분과 위원을 겸직하기도 했다. 무형문화재 분과는 문화재전문위원이나 전공자들이 주로 조사를 하지만 민속문화재 분과는 문화재위원이 현장을 찾는 일이 잦았다. 그 때에는 고택, 마을 등을 찾아다녔는데 민속조사에 익숙했던 탓인지 역동적인 작업에 보람과 함께 무척 흥미를 느꼈다.

2013년 민속문화재 분과 위원을 겸직할 때, 350년의 역사를 간직한 외나무 다리가 마을을 지켜주는 영주 무섬마을이 그해 8월 23일 민속마을로 대한민국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던 일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민속마을이었던 경북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내가 민속문화재분과위원으로 있을 때였으니 기억이 남을 뿐 아니라 보람을 느낀다.”

- 지금도 배낭을 메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니 발로 뛰는 학자의 모습에 상상이 닿는다. 민속학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라면?

“현대인의 자동화 되고 기계화 된 디지털 생활문화가 우리의 전통 민속 문화를 대부분 사라지게 했지만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가시는 어머니의 주도로 세시풍속을 지키고 이어가는 전통 의식주 생활들을 보면서 궁금증이 많았다. 그런 다채로운 풍속들이 왜 어떻게 비롯됐는지 사실 어릴 때부터 그 유래에 대해 막연히나마 알고 싶었다.”

-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민속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얘기인가?

“아니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했지만 나는 양가감정(兩價勘定)을 가졌다고 할까. 마음속으로는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기도 했다. 생활의식이 구식인 집안이 은근히 불만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신식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식을 선택, 그야말로 당시 신 학문으로 알려진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선택했다. 평소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전공을 선택한 것인데, 나는 대학(이화여대)에서 신문학(新聞學, 그 후 신문방송학과로 과명이 변경 되는 등 변화가 있었으며 2015년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로 명칭이 바뀌었음)을 전공하고 한 때 기자로 활동했다. 실은 대학 1학년 때 나는 전공을 잘못 선택했다고 고민을 하면서 전과(轉科)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기자 시절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 민속학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민속학을 공부하면서 민속학회에 가입하고 거기서 민속학자 남강(南剛) 김태곤(金泰坤, 1936〜1995) 교수를 만나면서 다시 경희대학교로 옮겨 민속학 석·박사 학위까지 이어졌다.

이때에도 사연이 적지 않았다. 처음 사학과를 선택한 까닭은 언론생활을 하면서 보다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의식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타과에서 입학한 학생은 사학과의 학부과목 20학점을 이수해야하는 높은 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신문사 일, 그리고 밤에는 이수과목 리포트 작성으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과목마다 모두 강의를 들어야했지만 다행히도 매주 듣지 않은 대신 리포트로 대신하게끔 편의를 봐 주시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그 교수님께는 감사할 따름인데 당시만 해도 대학원생이 희소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말 그때는 밤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신문사의 조사부에서 책을 찾고 신문사 퇴근 후에는 고서가 많던 인사동을 누볐다. 학부 과목 20학점을 하기 위해 여러 강좌를 선택했는데 그 가운데 고인이 된 원로 민속학자 월산 임동권(月山 任東權)교수의 민속학 강좌가 있었다. 임교수께서는 타 대학에 근무하시면서 민속학 강의를 위해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하신 것인데 학부 강의에 들어온 대학원생이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민속학회에 가입을 권유하셨다. 그래서 민속학회에 가입하고 후에 세시풍속을 주제로 석사논문도 썼다.”

영원한 멘토 남강 김태곤 교수

- 민속학에 입문하던 시기의 학업과정을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사학과에서 민속학 관련 논문을 인정해준 것이 내 운명의 길을 열어 준 계기였다. 두고두고 감사하고 있다. 당시의 논문은 문헌자료를 기반으로 썼으며 필드워크라는 말도 몰랐다. 민속학은 문헌자료도 보아야했으나 답사, 현장조사(또는 현지조사) 등 ‘발로 쓰는 학문’이라는 점을 알게 해준 분이 민속학회에서 인연이 된 남강 김태곤(南剛 金泰坤)교수였다.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남강선생으로부터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운 난제에 부딪쳤다.

당시는 석사와 박사과정을 같은 과에서 해야 했는데, 나는 사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김태곤교수는 국문과 소속이었다.(우리나라에 민속학과가 국립안동대학교에 1979년에 처음 개설되었으며 당시 민속학자는 대부분 국문과 교수였다. 아주 드물게 민속학을 하는 역사학자가 있었다. 지금은 사학과나 인류학과에서도 민속학을 전공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국문과에서 석사를 다시 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학위를 취득했다. 석사를 할 때에도 국문과 학부 과목 10학점을 이수했다. 국문과이기에 민속학으로 학위를 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따랐다. 어떻든 민간 신앙인 샤머니즘 연구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 김태곤 교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민속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경희대에서 다시 석사를 하면서 서울 동덕여자대학에서 민속학 강의를 할 기회도 있었다.

남강선생은 샤머니즘의 원류를 찾아 시베리아를 최초로 답사한 학자인데 기온이 영하 30도가 된다는 그곳을 몇 차례에 걸친 현지조사의 과로 탓인지 병을 얻어 1996년 1월 타계하셨다.

애초 남강선생의 회갑기념 저서로 계획했던 『한국문화의 원본사고』라는 책은 타계 후 1년반만인 1997년 7월에 출간되었다. 원본사고(原本思考= Arche-Pattern)는 남강선생님이 한국의 민속, 특히 무속 현상을 분석하여 한국인의 존재에 대한 원질적 사고의 틀을 추출·정리한 이론이다. 원본사고에서는 만물 존재의 근원을 천지개벽 이전의 카오스(chaos)로 보고 존재가 카오스에서 현실세계인 코스모스(cosmos)로 갔다가 다시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순환이 반복되어 존재가 영원한 것으로 믿는 입체적 사고이다.

이 책에서 나는 전공이었던 세시풍속을 대상으로 그 순환체계를 주제로 논문을 썼으며 그밖에도 10여명의 제자들이 원본사고를 주제로 한 두 편의 논문을 썼다. 그 후 남강선생의 학문에 대한 조명이 지속되어 『민속문화의 조명과 새 지평, 남강 김태곤의 생애와 학문세계 조명』이라는 저서가 남강선생 10주기를 맞아 출간되었다. 추모의 글을 비롯하여 20명의 필자가 동원, 나는 그 때 「남강 김태곤교수의 생애와 민속학 연구라」는 논문을 썼다.

같은 해 출간된 『민속문학과 전통문화』에서는 「김태곤의 민속학연구 성과와 의의」라는 주제로 글을 썼으며 이후에도 「남강 김태곤 선생의 학문세계」 등 남강선생을 기리는 글은 계속 썼다.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가 담겼지만 그동안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가 속속 생각나거나 조사되어 몇 편의 글을 추가로 쓸 수 있었다.

지난 2014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문화의 원본을 찾아서』에 쓴 「학문세계를 통해 본 남강 김태곤 교수의 삶」이라는 글과 국외 무속조사를 쓴 「남강의 샤머니즘 조사, 한국문화의 시원을 찾아서」는 내가 안동대학교 민속학과를 정년퇴직 후 명예교수가 되어 쓴 글로서 남강에 대한 마무리 글이란 생각이 든다. 이 글을 보고 울었다는 나의 후배 교수도 있었으니 남강선생을 기리는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전해졌으리라는 위안을 가져본다.

이 책은 남강이 수집한 무신도와 신령의 유물, 그리고 남강 자필원고, 조사에 사용한 카메라 녹음기 등을 전시했던 “민속학자 김태곤이 본 한국무속”(2015. 4월 22일∽6월 22일)의 내용을 담은 도록을 겸해 방대한 2권의 저서로 출간되었다. 전시를 위하여 제자들의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찍기도 했는데 나는 무슨 말을 할까조차 생각나지 않았을 때 모대학에 근무하는 후배교수가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 나는 영원히 남강선생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보다는 남강 선생의 이야기가 길었던 것은 워낙 무수한 업적을 내놓은 데다 그에 비하면 나는 실로 보잘 것 없는 부끄러운 연구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속학 교수로 대학에서 보낸 내 생애도 남강 선생이 물려준 ‘필드 워크’ 정신이 저력이 됐고 대학에서 정년까지 무난히 임무를 다하게 한 원천이었다.

특히 필드 워크하는 방법은 직접 사례를 보여주셨다. 언젠가 정월 대보름을 앞둔 열나흗날 칼바람이 부는 저녁,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경기도 산촌을 찾았을 때 남강선생이 조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감동도 했지만 너무 추워서 솔직히 끝내기를 바래기도 했다. 얼마나 추웠는지 상당히 고가(高價)의 내 카메라 셔터가 잘 눌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종종 있었으며 어느새 나 역시 익숙해졌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산촌민속, 서산지역의 종합적인 민속조사, 한국의 점복, 서울의 무속 등 남강 선생 문하의 연구자들과 함께 조사하여 출간한 책은 지금도 나의 서재에 소박하게 꽂혀있다.

김태곤 은사가 별세하셨을 때 충격과 슬픔이 2,3년이 넘도록 이어진 것도 학문적 멘토로 영향을 많이 준 결과였다. 우리 문하가 모이면 우리 문중이라고 말씀 하시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며 한편으로는 마음이 울적해진다. 게다가 선생님처럼 학구열에만 집중하는게 아니라 종종 학문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고 흥미를 느끼며 사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북한의 민속학 연구 만만치 않아

- 지금 북한의 민속학 분야에 학문적으로 깊은 관심을 두고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는데.

“2016년과 2018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수집, 소장하고 있는 북한의 민속학 분야 연구자료를 분석하여 요약, 해제(解題)하는 활동을 했다. 나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북한 및 중국 동북지역 문화유산 종합학술연구”의 일환으로 북한 고고학 정기간행물인 『조선 고고연구』, 『문화유물』, 『문화유산』, 『고고민속』 등 폐간된 간행물에 수록되어 있는 민속학 분야의 자료와 논문을 요약하고 해제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2016년에 52편의 논문을 분석, 요약하고 해제했는데 이 자료는 2017년 『조선고고연구 해제집』 1권(46배판, 976쪽)과 2권(46배판 1167쪽)으로 출간되었다. 2018년에는 102편의 자료와 논문을 요약, 해제했으며 2019년 『력사제문제 · 문화유산· 문화유물·고고민속 해제집』 (46배판, 928쪽)이 출간되었다.

김명자 교수의 52편의 논문을 분석, 요약하고 해제한 자료를 담은 '조선고고연구 해제집'1, 2권과 (맨 오른쪽 사진) 2019년 출간된 '력사제문제 · 문화유산· 문화유물·고고민속 해제집'

2007년에 출간된 해제집 1권은 1986년부터 2000년까지 북한에서 발간한 정기간행물 중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기관지 『조선고고연구』에 수록된 논문을 요약하고 각 논문별로 해제한 것이다. 해제집 2권은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발간한 기관지에 수록된 각 논문을 요약하고 해제한 것이다.

2018년에 작업을 하여 2019년에 나온 『력사제문제 · 문화유산· 문화유물·고고민속 해제집』 은 1948년부터 1967년까지의 논문을 요약하고 해제한 책이다. 『력사제문제』와 『문화유물』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발간된 정기간행물로 당시 북한에 있던 중요한 역사연구자들이 대부분 참여,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했다. 『문화유산』은 1952년에 창설된 조선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발간한 기관지로 고고학과 민속학 관계의 새로운 이론적 성과와 자료를 소개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문화유산』이 『고고민속』으로 개칭되고, 조선과학원이 사회과학원으로 분리되면서 『고고민속』은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 발간되다가 1960년대 후반 『고고민속론문집』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고고학의 유물과 민속자료의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선지 간행물 명칭은 고고학이지만 민속학 논문이 항시 수록되어 있다가 후에 고고와 민속을 구별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민속』에 수록된 논문은 내가 대학에 있을 때 몇 편 본 적이 있었지만 사실상 당시 북한의 정기간행물을 보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한 여름 불볕더위와 씨름하며 내용 분석 작업에 혼신을 다했는데 지나고 나니 쏟은 땀방울이 많아서인지 보람만큼 허전함도 따랐다.”

- 북한의 민속학이라면 조사와 연구대상, 역사적 관점이나 저술활동의 지향점 등에서 우리와 비교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념을 떠난 순수한 학술적 의미와 가치가 인정되는가?

“물론 있다고 생각한다. 설사 사회주의 정책을 완성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미가 있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작성된 민속자료와 연구 내용들은 깊이 있고 세심한 학술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논문이 적지 않다. 물론 사회주의 이념이나 주체사상의 이념이 강하게 반영된 논문도 있고 수준에 못 미치는 논문 역시 적지 않다.

정치적으로 활용되거나 대입된 민속연구 논문이나 보고서의 성격을 배제하면 우리가 가보지 못한 북한 지역의 민속사료를 소중하게 비교 분석하고 참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선택적으로나마 북한조사를 했는데 민속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2017년 처음 작업을 할 때에는 솔직히 다소 거부감이 왔다. 너무 정책과 결부시키기 때문인데 북한의 사회주의 정책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 가령 전통문화 살리기를 화두로 활용했으며 결론에서 또는 서론 부분에서 000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등의 실명을 제시한 글은 불편했다. 그래선지 해제에서 너무 강성으로 썼다며 수정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2018년 새 작업을 할 때에는 조금 더 이해를 하게 되었는지 어렵잖게 받아드려졌다. 민속 조사방법과 범위 대상 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다만 정치적인 소양을 강조하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학술분야에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내용은 진지한데 결국 북한 정책과 연관을 시키니 솔직히 ‘어용’의 성격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2018년 작업한 논문 가운데 이미 60년대에,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 연암 박지원, 성호 이익을 대상으로, 이를테면 역사민속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은 기억에 남는다. 이들 실학자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역사학에서는 이미 연구 주제가 되었겠으나 우리 민속학계에서는 70년대가 되어서 실학자의 민속학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유물론적 시각 등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어용이든 정책 수립이든 부러운 것이 분명히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 정책 수립을 위해 민속학을 대상으로 했지만 사회과학원 내에 민속학연구소라는 국가적인 조직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통문화를 중시하여 문화재에 대한 각별한 제도 등이 있고 전국민속예술대회(현 한국민속예술축제)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도 있지만 민속학연구소와 같은 국가연구 기관은 없다. 그보다는 민속하면 탈춤을 추며 민중운동을 하거나 풍물(농악)과 같은 악기를 치면 데모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두드러진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특정 민요는 ‘데모곡’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는가.”

김명자 교수가 민속사와 관련해 저술한 단행본은 민속원에서 출간한 '한국민속학개론', '한국의 가정신앙' 등 공저까지 포함하면 50여권이 넘는다.

- 현장 조사나 확인이 안 되는 상황에서 북한 학자들의 논문만 읽고 분석 해제를 쓰는 작업도 수월하지 않을 텐데.

“물론이다. 나중에 연출된 민속(놀이의 경우)도 있지만 대단히 치밀한 현지조사 자료도 있다.

학술적 분석 작업은 팩트와 역사에 근거한 확신이 따라야 한다.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 단순한 종목의 조사 자료는 발표된 논문 내용을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전승 되어온 풍속을 이념이나 정치적인 선전과 결부시킨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료나 논문만 보는 것이지 현장을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쓰여져 있는 글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 자료 뿐 아니라 옛 소련과 루마니아, 알바니아, 우크라이나 등 주변 국가의 민속문화를 소개한 글은 더욱 익숙하지 않았다. 소련의 민속학 이론 역시 쉽게 접해보지 못한 나에게는 생소한 면도 많았다. 그러나 조사방법과 연구방법은 나에게도 익숙한 것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민속학의 대상 범위가 우리 역시 광포하지만 그쪽은 애초 더욱 광포하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노동자의 업무장소, 말하자면 산업체를 대상으로 한 초창기 연구는, 우리가 미처 접근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특히 나에게는 생소한 이론도 있어서 “이 논문은 잘못 왔구나.”라며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게다가 2018년에는 2016년도의 두 배나 되는 논문 편수가 나를 옥죄어 그 해에는 나에게 여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기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쪽에서도 민속학의 다양한 분야를 일일이 나누어 청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

- 역사학의 부분 지류로 민속학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민속문화라면 꽹과리 치고 북치는 옛날 놀이 문화 정도로 생각한다. 민속학자로 평생을 살면서 느낀 소회나 불만이라면?

“반만년이라는 긴 역사를 이끌어 온 우리 민족사에서 삶의 숨결인 전래 민속문화와 민속학의 학문적 연구는 결코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사라진 것을 찾아내 기록으로 보존하고 현존하는 것을 현대문화에 맞게 계승발전시키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한동안 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 무형문화재 평가 심의에 참여해 많은 분들과 거북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나는 그들과 업무 이외에는 개인적으로 만나지도 않고 대충 넘어가지도 않으니 원칙주의 고집이 환영 받을 리가 없다. 그러나 국가가 검증하고 인정하는 전수자라면 반듯하게 전통 기량을 갖추어야 당당한 것 아닌가. 민속문화는 시대에 맞게 변해도 타고난 골격의 품격은 유전인자처럼 제대로 이어져야 한다.”

‘하늘 위의 정자’가 호정(昊亭)

- 아호(雅號)가 호정(昊亭)인데 작명 유래가 있을 것이다.

“아호는 원래 스스로 짓는 것보다 주변의 스승이나 선배, 고전이나 한문학에 조예가 있으신 분들이 작명을 해주는 별호인데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작명가에게 평범한 절차를 거쳐서 받았다. 평소 내 이름이 불만이었던 나는 개명을 여러 차례 생각했었는데 여러가지 걸려 있는 것이 있어서 결국 포기하고 호를 받기로 했다. 그 작명가는 국내의 유명한 사람들은 물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람들의 이름을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있게 분석하는 분인데 내 이름이 ‘잘 타고난 내 사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호정(昊亭)이란 뜻은 여름 하늘 호(昊), 정자 정(亭), 여름 하늘 아래의 정자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이는 남들처럼 형제가 많은 곳에서 자라지 못한 외로움을 메워주는 호(號)로서 학문적인 담화는 물론 여러 사람들과 담화를 할 수 있으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 했다.

사실상 정자는 자연풍치가 좋고 경관이 수려한 곳에 세우는 쉼터인데 ‘여름하늘의 시원한 정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후배 연구자는 남자 호 같다고 하고 또는 너무 크다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끝없는 하늘이라는 뜻을 지닌 호천만극(昊天罔極)이 있고 천제(天帝)라는 뜻의 호천상제(昊天上帝)도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올만 하다. 하지만 나는 호를 받은지 이미 30여년이 되어 이름 대신 호를 편안하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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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의 대가' 김명자 교수

- 일생을 두고 현장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겪은 일화도 책 몇권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머리와 가슴과 발바닥에 묻어있고 새겨지고 쌓여 있는 온갖 일들을 잠시 필설로 풀어내기에는 벅차다. 옛 동네, 옛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아직도 남아 있는 의식주 전래 생활 속의 민속 조사를 하다가 보면 세월 따라 인정 풍물이 변하는 허전함과 함께 향수를 달래주는 듯한 따뜻한 정감도 맞이한다.

20여년 만에 다시 찾아간 마을에 그 옛날 반겨주신 어른이 다시 손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노환으로 힘든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70년대 필드워크를 처음 시작할 때 찾아갔던 송파(지금의 송파구) 지역은 “산천도 인걸도 간데없는 곳”이 되었다. 주 제보자였던 송파산대놀이(한국무형문화재 제 49호)의 보유자 한유성(韓有星, 1908-1994)선생은 벌써 타계하셨고 농사짓던 송파 마을은 사라지고 대도시의 중심가로 바뀌었다.

민속음식과 일생의례, 민속신앙, 세시풍속 등 자료와 증언이 많아 즐겨 찾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의 산촌, 지금은 원주시에 포함된 강원도 원성군 판부면 금대리도 그런 추억의 마을이다. 1980년대 초 조사한 후 10년 후에 갔을 때 금대리는 완전히 달라졌으나 옛 조사자의 한 분이었던 이장님을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마을의 변화로 인해 농사 대신 다른 생업을 하고 있었다.

경기도 중부면 엄미리는 7년 전엔가 찾았는데 마을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옛 조사자도 있으나 우리가 가족처럼 지냈던 이장댁의 이장님은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여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나만 보면 “저 양반 웃는 모습이 난 정말 좋더라”고 말씀하셨던 이장의 모친도 돌아가셔서 나의 웃음을 보여드릴 기회도 사라졌다. 터주 단지를 극진이 모셨던 강씨 아주머니 집에 가보니 그 터주단지는 그대로 있었으나 아주머니는 깊은 노환으로 누워계셔서 만날 수 없다는 이웃의 말에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문득 집안에 성주, 터주, 조왕 등 가신(家神)의 신주단지를 모셨던 나의 어머니가 생각나서 더욱 허전했다.

경북 영덕군 괴시리 마을에 조사를 다녀온지 10년이 넘었건만, 그 후 우리 학과 학생이 민속조사갔을 때 그곳 어른이 나의 소식을 물었다는 말을 듣고 잠시 묘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 민속학 교수가 되기 전 먼저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셨다는데.

“대학 시절 학과 출판잡지부장으로 활동한 경력으로 졸업을 앞두고 방학 기간에 정부(당시 체신부)가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의 편집제작 공무원으로 잠시 사회활동을 시작하다가 1968년 공채과정을 거쳐 서울신문사에 입사했다. 당시 매체문화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던 시절 대중문화 잡지 붐을 주도한 선데이서울, 소년서울, 주간스포츠, TV가이드 등 히트 매거진에서 주로 문화전문 기자로 활동하던 시기가 있었다.

13년간 정신없이 보낸 나의 청년기였다. 그 13년 사이, 좀 늦게 다시 책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공부를 계속한 셈이다. 시간에 쪼들려 많이 힘들었지만 보람은 느꼈다. 지금도 공부할 기회를 주신 서울신문사에 대단히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초창기 수습 때 아침마다 코피를 쏟을만큼 몸과 마음을 바쳐 일했던 기자시절도 보람 있던 시기였다.”

-그 시절 가장 잊을 수 없는 비화가 있다면?

기자라는 게 사건을 독점 발굴해 터뜨리는 희열에 나이 들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는 직업인이다. 가끔 미담 발굴 기사의 주인공들이 이쁜 추억으로 떠오른다. 어느 땐가 새를 기르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미담기사를 보도했는데 그 기사 덕분에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의 표창을 받고 교무처장으로 승진을 한 교사가 진심어린 감사 인사를 해온 일이 있다. 그 활짝 웃으며 다가온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내 마음속에 기쁨의 선물처럼 감동을 준다.

그밖에도, 직장에 나가면서 집에서는 돼지를 길러 거기서 나온 비용을 봉사활동에 쓰던 한 여성분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기억도 새롭다. 취재하러 갔던 날 낮에는 멀쩡하던 날씨가 오후부터 굵은 비가 내려 온몸이 젖은 채 돼지우리를 찾았다. 그 날 따라 구매한지 얼마 안 된 새 구두를 신고 갔다가 완전히 망가졌지만 보람은 있었다.”

민속학의 첫 스승은 어머니

- 가족 얘기도 들려줄 수 있는가?

“한의사였던 나의 선친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같은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의 2녀 6남의 형제 집안에서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는 만주를 오르내리며 독립운동하는 분들과도 교류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나는 서울에서 출생해 아버지 형제를 다 알지 못한다.

6. 25한국전쟁 전에 다섯째와 여섯째 작은 아버지 가족을 만난 적이 있지만 월남한 가족은 다섯째 작은 아버지 가족뿐이었다. 선친은 워낙 엄하고 가부장적인 한학자여서 다정한 정감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히 선친과 다정다감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다.

딸에게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만주 시절 무용담을 제대로 들려주신 적이 없는데 내가 좀 깊이 들어두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시기는 초등학교 3, 4학년 때로, 일요일이면 선친, 그리고 사촌오빠들과 종로에 있는 천도교 중앙교당에 갔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선친은 당신이 천도교 신도라는 것에 당당한 자긍심을 가지신 분이었다.

나는 마흔이 넘은 어머니가 늦둥이로 낳아 자랐다. 그런데 성장해서 숙모로부터 내 위로 2남 3녀가 있었으나 모두 조기에 잃었다는 충격적인 가족사를 전해 들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그런 사실을 감추었다. 민속적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그러한 가족사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면 부정(不淨)타는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항시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늘 해주신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가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고 외지로 다니시던 일제 강점기에 황해도에서 일찍 서울로 오신 어머니는 공부가 하고 싶어서 야학교에 다니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불과 몇 달 전까지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시며 독학하셨던 것도 기억한다. 어머니가 평생 집안 경제를 맡았던 까닭인지 ‘셈본’은 어머니가 나보다 월등했던 걸로 알고 있다. 평소 과묵하고 웃음소리도 내지 않을 만큼 조신했지만, 생활면에서는 이를테면 여장부였다. 명절이나 김장할 때 등 무슨 특별한 때가 되면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친가, 외가 등 친척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어머니 손은 대단히 커서 늘 베풀면서 사셨다.

나에게 민속학의 뿌리를 심어준 분은 어머니였다. 철저히 명절을 지키면서 ‘정성’을 들이시던 어머니는 민속의 반듯한 전승자였으며 나의 첫 스승이었다. 나는 손이 귀한 집안 탓인지 직계 가족이 모두 곁을 떠나 불행하게도 오순도순 가정적인 분위기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자랐다. 그래선지 지금도 형제들이 많은 친지들과 어울리면 분위기를 맞추지 못하고 어색해 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내 인생은 결국 신문사, 또는 학교와 같은 사회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인연관계나 친구 또는 마음 편한 친지들과의 관계가 주를 이루었다.”

'민속학의 대가' 김명자 교수(안동대 명예교수)는 "나에게 민속학의 뿌리를 심어준 분은 어머니였다"고 말했다.

- 대학에 계실 때 박물관장, 민속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 등을 두루 거치셨다. 저서로 『한국세시풍속』1∼2권을 비롯해 민속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 동화적인 민속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연아 연아 날아라』 등 여러 권이 있다. 다양한 활동 기록 중에 보람을 느끼는 대표적인 활동 내용을 선뜻 소개한다면.

“전쟁터에서 어쩌다 오랜만에 잠시 집을 찾게 된 김유신 장군이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손가락으로 장을 찍어서 맛을 보며 “변함이 없구나”하고 안심을 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 “되는(흥하는) 집안은 장맛이 달다”는 말이 유래된다. 우리의 전래 고사 중에 민속 문화와 관련된 얘기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여성신문에 한 3년간 민속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지만 고리타분한 고전으로 버려진 민속여화를 수집하는 재미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모든 미션이 만족스러웠다.

인문대학장은 교수들의 투표로 선임하던 시절에 선출이 되어 나름대로 보람을 안겨준 시기였지만 아쉬움도 있다. 당시 학부제를 실시할 때여서 학과 단위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학부제가 부담스러웠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당시 내가 소속되어 있는 학부는 국학부로서 나는 민속학과 교수가 아니라 민속학 전공 교수였다. 학부제 문제는 해마다 그 당시 인문대학장협의회에서도 회의 주제가 되었지만 명쾌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가에서 지정한 것이기에 특히 국립대학교에서는 사립대학교와는 달리 그 제도를 마음대로 해체할 수가 없었다.

인문대학장 임기 2년을 마치고 이번에는 국학부장 차례가 되었다. 이는 학과장과 마찬가지로 로테이션으로 하는 것인데, 바로 내 차례가 된 것이다.

인문대학 국학부학부제는 1990년대부터 시작하여 10년간 유지되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 학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쉽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안동 대학교는 국립대학교여서 국가에서 승인을 해야 학부제를 풀고 종전대로 학과로 돌아올 수 있다. 학부제 체제 10년이 되어 다행히 새 정부에서 학부제는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주었다. 그러나 체제를 바꾸는 일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학부제에 소속되어 있는 3개 전공학과의 교수들 간에 첨예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내 성격상 서로 생각이 너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큰 마음 먹고 학부제를 해체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교수들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모아 투표하여 학부제를 해체하고 학과 체제로 돌아왔다. 학부제가 학과체제로 개편되면서 나는 국학부 소속 민속학 전공교수가 아닌 인문대학 민속학과 교수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내가 진정 바라던 것이었다.

인문대학장 전에 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안동의 특산물이자 자랑인 삼베를 주제로 “안동 삼베, 그 얼과 멋”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을 개최하고 안동삼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여러 연구자들이 집필한 저서 『안동 삼베연구』를 발간한 것은 자랑하고 싶다. 삼베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최초일 것이다.

안동대학교 내에는 역동서원이 있다. 이는 고려 후기 학자 우탁(禹倬)선생을 모신 서원인데 여기 원감은 박물관장이 겸해 남자교수가 맡았었다. 나는 박물관장을 하면서 여교수로는 처음으로 역동서원 원감도 맡았다. 일년에 두 번씩 행하는 서원의 향사(享祀)에 꼭 참석하고 학생들도 참관을 권했다. 유일한 여자 참석자였지만 서원 측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려 시대의 변화를 새삼 실감했다.”

- ‘김명자’란 이름의 동명이인이 많다. 김지미 배우의 본명도 김명자이고, 전직 장관에서 연극배우, 음악인, 기업인, 시인 등 인명검색을 하면 수없이 다른 분들이 함께 떠오른다. 그로인해 겪은 일화도 재미있을 것이다.

“박물관장을 할 때 동료 교수가 “서울에서는 김명자(당시 보사부 장관)가 장관을 하고 안동에서는 김명자가 관장(박물관장)을 한다”며 우스개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 미스코리아(63년도) 가운데 같은 이름이 있어서 친구 집에 놀러가면 미스코리아 왔다고 온 가족이 반가와 한 적도 있지만 사실 나는 내 이름에 늘 불만이었다. 동명이인 속에 항상 내 이름이 등장하니 불편을 겪은 일도 적지 않다.”

- 민속학 분야에서 해소되어야 할 당면 문제와 민속자산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해 달라.

“민속학 연구자는 많은데 학과는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하나뿐이다. 안동대 교수 이외에 국문학과, 역사학과, 인류학과 등지에 민속학을 연구하는 분이 많지만 독립된 학과가 하나뿐이라는 것은 취약점이다. 반면 민속학회는 많다. 그러다 보니 제도권 안에 소속되어있지 못한 연구자가 많다. 게다가 요즘은 민속학의 조사방법이나 학사 등 원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정년퇴직을 하고서도 철저하게 필드하는 연구자도 있다. 남는 것은 자료라는 말이 있다. 이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여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민속학은 궁극적으로 전통문화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통이 멀어져 간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그렇다면 민속학의 존재성이나 필요성 유무가 논쟁에 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은 불변성과 가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를 지속과 변화라는 말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자료를 통해서 중요 화두가 되는 민속의 지속과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미래를 조망할 수도 있다. 민속은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과 변화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사는 주거지는 시대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라지지만 주거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현대를 사는 이들도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민속자산이라 생각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 지속되지만 그 모양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관심을 갖는 까닭은, 막연히 ‘전통문화는 중요한 것이라는 고답적인 생각’에서가 아니다. “전통문화를 이해함으로써 오늘의 문화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단하며, 미래의 우리 문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려는데 있다. 전통문화는 단순히 어제의 문화가 아니라, 오늘날도 생명력을 지니고 오늘의 문화 창조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살아있는 문화다. 곧 전통문화는 역사의 전개에 적응하여 각 시대마다 새로운 문화창조의 토대가 되는 역할을 한다.”는 한남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정년퇴직한 이필영 명예교수의 글은 내가 자주 인용하는 내용이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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