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세계 지배를 막아라
영어의 세계 지배를 막아라
  • 김세원
  • 승인 20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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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권 국가들 위기의식, 공동 대응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모로코의 전통음식인 쿠스쿠스와 타진(반숙계란을 넣은 튀김요리), 루마니아가 자랑하는 사르말레(돼지고기와 야채를 양배추 잎에 싼 요리), 프랑스의 크레프, 베트남의 쌀국수...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음식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음식만이 아니다. 이집트 카이로와 룩소르, 흡혈귀 드라큘라의 무대인 루마니아 브란 성 관광안내 책자가 나란히 전시돼 있는가 하면 프랑스 유학안내 기관 캉퓌스 프랑스와 불어보급기관 알리앙스 프랑세즈, 주한프랑스문화원의 부스 앞에는 호기심어린 학생들이 기념품을 받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지난 3월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KT빌딩 1층 아트홀에서는 전 세계의 불어 사용 국가 중 한국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19개국 외교관들과 프랑스어권 유학 경험자, 불어를 공부하는 한국의 초 중 고 대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이색 행사가 열렸다. 국제 불어권의 날(Journee Internationale de la francophonie) 축제다. 중앙 무대에서는 루마니아 민속 음악 팬플룻 연주, 시낭송대회 수상자 대전외국어고등학교 김민경 양의 불어 시낭송과 샹송페스티벌 수상자 석채원양의 샹송리사이틀, 아아닌카 그룹의 코트디부아르 전통무용, 프랑스 극단 리그의 즉흥연극, 스위스 알프스 지방 요들송 연주, 스트롱 아프리카 그룹의 콩고 음악 연주 등이 오후6시까지 계속됐다. 한켠에서는 라로셸 프랑코폴리 페스티벌 수상작이 상영되고 프랑스 사진작가의 사진집과 샹송CD가 전시․판매되고 있었다. 2층에서는 'Toi(너)', 'Apprivoiser(길들이다)' 등 올해 불어 주간 조직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10 단어'를 주제로 한 교육 포스터와 사진 컨테스트 우수작 전시회가 펼쳐졌다.



일반적인 국제행사나 외교모임이 의례히 영어로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이날 행사에서는 주한 라오스 대사, 주한 콩고 대사, 주한 프랑스대사 등이 불어로 축사를 하고 친분이 있는 스위스 외교관과 이탈리아 외교관도 불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신정부가 영어 공교육 강화와 영어 몰입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영어교육에 대한 쏠림현상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는 가운데 '국제 불어권의 날'이라니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른다.





이날 행사처럼 3월 20일을 전후해 일주일동안 세계 각지에서 '국제 불어권의 날'이 열리게 된 배경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와 영어의 세계 지배를 막아야 한다는 프랑스와 불어권 국가들의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불어권 국가들은 1970년 3월 20일 아프리카 니제르의 니아메에서 블랙아프리카 국가들을 주축으로 18개국이 문화기술협력기구(ACCT. 후에 OIF로 바뀜)를 창설한 것을 기려 1990년부터 매년 3월 20일을 불어사용의 날로, 이날부터 일주일 동안을 불어권 주간으로 각각 정하고 각종 행사를 벌인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들의 독립이 본격화된 1960년대 초반 세네갈의 셍고르 대통령과 니제르의 디오리 대통령, 튀니지의 부르기바 대통령 등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의 지도자들이 프랑스와 구 식민지 불어권 국가들간의 문화 교류를 위해 프랑스어 국가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제안한 데서 태동했다.



과거 식민지와 본국간의 주종관계가 재현할 것을 경계하는 프랑스 공산당과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프랑스어 국가공동체(Francophonie)는 패권적 문화제국주의나 인종차별적 식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비정치적인 문화공동체임을 강조했다. 이후 198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불어권 국가 정상회담에서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회원국들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은 불어라는 공통의 중심축에 의해 결속된다"고 밝혔다.



90년대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정치, 경제 분야의 차원을 넘어 언어, 문화 분야로까지 확산되고 미국이 주도하는 정보통신혁명이 인터넷의 보편화와 함께 영어의 세계 공용어화 현상을 가속화시키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1997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7차 불어권 정상회담에서 불어권 국가들의 결속과 협력을 한층 더 강화시킬 새로운 불어권 국제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미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영을 우려하는 세계 불어권 지역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문화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프랑스어권 국가연합을 일종의 정치 경제협력체로 전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던 터였다.



이에 따라 당시 회담에 참석한 46개 국가들은 불어권 국가들 사이의 협력의 범주를 종전의 언어, 문화 분야에서 정치, 경제 분야로까지 확대해 나간다는 목표 아래 불어권 국가연합기구(OIF)를 창설하고 초대 사무총장으로 UN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갈리를 선출했다.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은 "불어권 국가연합은 더 이상 문화와 기술협력에 치중하는 단순 언어공동체가 아니며 좀 더 강력한 지정학적 연합체로의 성장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OIF의 정치적 비중 확대에 총력을 경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영어의 세계 지배 및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OIF의 불어사용과 불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 보존 노력은 유네스코의 문화다양성협약 채택이라는 결실을 거뒀다. 불어권 국가연합(OIF)이 창설된 다음해인 1998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제1차 세계문화장관회의(INCP)가 개최됐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문화부 장관들은 급증하는 무역협정이 개별국가의 문화정책을 위협하고 이로 인해 문화 획일화와 문화산업의 독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공동의 대안 마련에 나섰다.



이후 정부간, 비정부기구간 협의를 거쳐 2005년 제3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참가국 154개국 중 미국과 이스라엘이 반대하고 4개국이 기권한 가운데 148개국의 압도적 지지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 협약’(문화다양성협약)'이 채택됐다. 문화다양성협약은 각 나라가 자국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지난해 3월 18일 비준국가가 30개국을 넘으면서 협약이 공식 발효됐고 지금까지 70여 개국이 협약을 비준했다. 제12차 불어권 정상회담은 오늘 10월 17~19일 올해로 설립 400주년을 맞은 캐나다 퀘벡시에서 개최된다.





■ 불어권 국가연합(OIF)이란

불어권 국가연합(OIF)은 55개 불어권 국가들의 수반으로 구성돼 2년마다 열리는 불어권 국가정상회담을 상층부로 하여 산하에 파리의 사무국을 중심으로 불어권 외무장관 협의체, 불어권 상설자문이사회를 두고 있다. 2002년 10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제8차 불어권 정상회담에서 부트로스갈리의 후임으로 OIF 사무총장에 선출된 아부두 디우프 세네갈 전 대통령은 2006년 9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제 10차 불어권 정상회담에서 재선돼 2010년까지 OIF를 이끌어가게 된다. OIF 사무국 부속기구로는 문화기술협력기구(ACCT)의 후신으로 실질적 정책을 집행하는 불어권 집행위원회(AIF)와 불어권 대학연합기구, 위성TV 불어방송 채널인 TV5, 친프랑스 성향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된 셍고르대학, 불어권 대도시 시장들의 모임인 불어권 시장협회 등이 있다.



■ 불어 사용 관련 통계

전 세계 언어 7000여 개 중 모국어 사용자 수로 본 언어 순위에서 불어는 7200만 명으로 14위를 기록했다. 1위의 중국어(8억8500만 명)나 2위의 영어(4억200만 명), 3위의 스페인어(3억3200만 명), 9위의 독일어(1억2000만 명)은 물론 13위를 차지한 한국어(7500만 명)보다도 뒤진다. 그러나 공용어나 외국어로 습득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불어의 위상은 수직상승한다. 불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가 29개국이고 35개국 1억3천5백만 명이 불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으며 모국어가 따로 있으면서 불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나라까지 합하면 불어권은 세계 인구의 9%에 해당하는 55개국 약 4억550만 명에 이른다. 불어는 루이 14세 시절부터 1차 세계대전 말까지 유럽의 유일한 외교어였으나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이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상실했다. 유럽의 벨기에 스위스 루마니아, 중남미의 아이티,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중동의 레바논, 블랙아프리카의 콩고 카메룬 아이보리코스트,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대표적 불어권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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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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