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 고연옥·한태숙·박정자 3인이 입체화한 사도세자의 비극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 고연옥·한태숙·박정자 3인이 입체화한 사도세자의 비극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9.05.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자의 절절한 화술과 섬세한 연기가 조화된 명품

[인터뷰365 정중헌기획자문위원] 관록의 목소리와 농익은 몸짓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명품 공연이었다.  

2일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관람한 연극배우 박정자의 드라마 콘서트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부제:혜경궁 홍씨)는 잘 빚어낸 달항아리처럼 단아하고 우아하며서도 그 내면은 아리고 한스러웠다. 

고연옥 작가가 시어(詩語)로 직조한 한중록을 한태숙 연출이 정갈하고 품격 있게 입체화한 '꿈 속에선...'은 박정자의 연기관록, 박정자의 목소리, 박정자의 열정으로 표출되었기에 극적인 드라마가 되어 관객을 몰아의 경지로 이끌었다.

이 공연은 낭독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희곡을 소리 내어 읽는 낭독극은 아니다. 박정자 배우는 통치마를 입고 한그루 고목처럼 무대에 뿌리를 내리고 80분을 눈빛으로, 손끝으로, 풍상에 벼려진 목소리로 왕조시대 궁중 여인의 한 서린 질곡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해냈다.

아홉 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열다섯에 경모궁과 부부가 되었으나 사랑한번 받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 눈 밖에 나 28세에 뒤주에 갇혀 생을 접은 사도세자. 그 참변의 목격자인 혜경궁은 침묵 속에 아들(정조)을 지켜내기 위해 비수로 가슴을 찢는 고통을 인내한다.

배우 박정자는 18세기 혜경궁의 모습으로 그 시절의 사건들을 절절하게 토해낸다. 특히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살았던 사람, 한 번도 보낸 적 없이 이별한 사람”과의 야속함과 회한에 역점을 두어 연극 제목처럼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라고 나직하게 되뇌인다.

자칫 역사 강의나 서간 낭독이 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박정자는 '소리극'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일찍이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로 자신의 캐릭터를 형성했지만 특히 이번 공연에선 누군가 표현했듯 '검고 아득하고 긁히고 그을린' 목소리로 음습한 역사의 비극적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 커튼 콜 무대에 오른 혜경궁 홍씨 역을 맡은 연극배우 박정자(사진 오른쪽)와 복례 역의 배우 박수진./사진=정중헌

치마폭이 울림통이 되어 뱃심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 자체가 드라마틱한데 여기에 박정자의 농익은 연기가 가해지면 그 체감 온도는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의자에 앉아 반경 1미터 안에서 펼쳐내는 박정자의 모노드라마는 연륜과 신체적 조건(목소리)을 갖춘 박정자만이 해낼 수 있는 독자 영역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작가 고연옥은 이 작품을 ‘사랑에 대한 환상이자 언젠가 도달하게 될 믿음’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한중록'을 그대로 옮기면 역사가 되지만 문학성 짙은 ‘사부가’로 풀어냄으로서 박정자 배우에 의해 드라마가 되고 연극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작가는 도입부에 손님맞이라는 상황을 설정, 관객들을 18세기로 자연스레 이끌고 있다.

이 작품이 낭독극의 한계를 넘어 장르적 특성을 확보한 것은 연출의 힘이라고 본다. 군더더기 없는 세련미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연출가 한태숙은 혜경궁 홍씨의 3자적 입장이 강화된 시종 복례(박수진)를 등장시킴으로써 1인 낭독극이 아닌, 2인 연극으로 확장시켰다.

그래도 단조로울수 있는 무대를 한태숙 연출은 스탭들과의 앙상블로 입체화해했다. 특히 돋보인 오브제는 무대 뒤에 휘장처럼 늘어뜨린 투명한 흰 천의 변주였다.

바람으로 펄럭이게 하여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리면서 때로는 그사이를 배우가 누벼 역사의 소용돌이처럼 분위기를 고조시킨 섬세함은 이 작품의 백미였다.

조명(김창기)이 작품의 아우라와 배우 박정자를 잘 살려냈다. 직접 보다 간접 조명에 따른 깊이와 은은함이 오묘했다. 현대적이면서도 옛 품격을 살린 의상(이유숙), 연극배우의 이미지를 극중 캐릭터로 활용한 영상(이지송)이 조화롭게 어우려져 몰입도를 더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분분할 수 있다. 필자는 혜경궁 홍씨가 화자가 된 이 작품의 역사적 진실을 잘 알지 못하지만 연극성은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소재를 한국 연극의 최고봉에 오른 박정자라는 배우의 장점을 살려 낭독 연극으로 무대화했다는 것은 평가할 만하다.

특히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으로 콘서트 같은 드라마로 승화시켜 박정자를 사랑하는 팬들과 만나게 해주는 이같은 시도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번 작품을 함께 관람한 생활연극 배우들은 비극적 서사를 냉철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때로는 여인의 한숨처럼 가녀리게 연기하는 배우 박정자, 무엇보다 호흡을 자유자재로 뿜어내며 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림으로 터져 나오는 박정자의 화술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번 작품이 연기파 배우들에 의한 정극으로 공연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보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이 그동안 정들었던 설치극장 정미소에서의 마지막 공연이라니 아쉬움 그 이상의 허전함이 밀려온다. 5월2일부터 12일까지 설치극장 정미소.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관련기사

관심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