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초청받은 이장호 감독 ①
[인터뷰]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초청받은 이장호 감독 ①
  • 김시무
  • 승인 201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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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시대 영화로 청년문화의 신화를 연 주역
5일 부산 노보텔 엠배서더 그랜드볼룸에서 진행된 2018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에 주인공으로 초청된 이장호 감독./사진=박상훈 기자

[인터뷰365 편집자주]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뜨거운 청년기로 맞이한 젊은이들에게 영화감독 이장호(1945∼)는 청춘, 청년문화의 우상이었다. 그의 영화는 고루한 사회의 껍질을 벗겨 달라진 시대의 속살을 보여주고 새로운 몸짓과 언어를 만들어 내며 시끄러운 관객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다.  

1974년 <별들의 고향>이 단일극장 개봉시대에 46만명이 관람한 기록은 이 시대의 천만 명 관람 기록에 비견되는 놀라운 흥행 성과였다. 신상옥 영화연출팀의 막둥이로 잔심부름을 하다가 뛰쳐나와 첫 작품으로 새로운 신상옥시대의 깃발을 올린 후 <바람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어우동> <바보선언>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의 흥행영화를 쏟아내며 화려한 인기 감독의 이름을 떨쳐왔다.

2014년에 <시선>이라는 영화를 내놓기도 했지만 연출현장을 떠난 뒤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지자체 영상위원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을 하는 한편 중부대학, 전주대학을 거쳐 지금도 동양대의 영화영상학 석좌교수로 후진 양성에서 열정을 쏟고 있다.

2018년 10월 4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초청된 이장호 감독을 영화학 교수로 한국영화학회 회장을 역임한 김시무 영화평론가가 인터뷰 형식의 대담으로 정리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김시무= 영화라는 매체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이장호= 나의 직접적인 영화의 경험은 영화검열관이셨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 그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어린 시절에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수많은 영화들을 보게 되었다. 집안 어디서나 필름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어쩌다 필름을 들여다보면 똑같은 모습의 사진만 끝없이 지루하게 나열되어 있어서 다른 그림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풀어헤치다가 어느새 어지럽게 엉클어진 필름을 감당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무서운 것은 성냥불이 가까이 가기만해도 화르르 타버리는 그 성질 급한 당시의 셀룰로이드(celluloid) 필름 태워 먹기였다. 매우 아찔한 장난이어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절대 금기였다.

김시무=영화를 좋아한다고 모두 다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연출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에 대해서 말해 달라.

이장호=내가 영화판에 들어온 것은 1965년이었다. 당시는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TV의 컬러화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때였다. 한국은 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권이 나름대로 통치기반을 확립해가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천에 옮겨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한국영화계에서는 거목(巨木) 신상옥 감독이 주도하는 ‘신필름’에서 만들어낸 <성춘향>, <폭군 연산>, 그리고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같은 영화들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신상옥 감독과 아버지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나는 공연히 설렜다. 그래서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 선생의 저서인 ‘영화개론‘(An Introduction to Film)을 찾아 급히 읽어 내려갔다. 대감독을 만나서 혹시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생소한 영화의 모든 제작 시스템에서 촬영, 조명, 연출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배우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다. 사실 나도 배우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사정을 아셨는지 아버지께서는 그리 잘생기지 않은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돋보이도록 쌍꺼풀 성형수술을 시켜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나를 용산에 있던 신필름 스튜디오로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신감독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키가 크고 어떤 영화배우보다도 더 잘생긴 그분을 보면서 좀 혼란스러웠다. 저렇게 잘 생긴 외모로 영화배우를 하지 왜 영화감독을 할까? 하고 생각하니 내가 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에겐 시선을 주지 않았던 신감독님이 불쑥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뭘 하고 싶지? 영화에서 말이야.” 순간 당황한 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할까하다가 그만두고 연출이 하고 싶다고 말해버렸다. 잘생긴 신감독의 풍모에 주눅이 들어 그만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만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후 8년간 신필름에서 연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김시무=신상옥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으면서 무엇을 배웠나?

이장호= 내가 초기에 만든 멜로드라마들은 사실상 신상옥 감독의 영향 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별들의 고향>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연출을 했다는 기분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가 지금 촬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신상옥 감독이 없으니까 내가 대신하여 연출을 한다는 것뿐이지 내가 영화를 만든다는 의식은 전혀 없었다. 아마 요즘 대학생들이 영화를 만든다면 <바보선언>이나 <나그네는 길에도 쉬지 않는다>처럼 만들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니고 있었던 일종의 순수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스스로 찾아낸 방식에 따라서 만든 영화들일 것이다. 그 밖의 영화들은 그때 배운 드라마 연출법에 따라 만든 것이다.

5일 부산 노보텔 엠배서더 그랜드볼룸에서 진행된 2018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에 초청된 이장호 감독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영화인들. 배우 신성일과 김수용 감독, 임권택 감독, 이명세 감독, 정지영 감독 등 선후배 감독들이 함께 자리했다. 

김시무= 감독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즉흥연출을 선호한다고 말해왔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이장호= 나의 영화작업 스타일은 다분히 감성적이다. 여전히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월간 ‘스크린‘이라는 잡지에서도 발표했듯이, “나는 연출론이 없다”라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내 성격 자체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는 아마도 선천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별자리로 보았을 때도 나는 다분히 다혈질이다. 부모님의 교육에 의해서도 감성적인 아이로 자랐다. 이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 내가 감동을 받고 산지식을 얻는 것도 이론서나 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설이나 다른 창작물을 통해서였다.

그러다보니 영화연출을 함에 있어서도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된 콘티에 의하기보다는 직접 현장에 가서 부닥치면서 떠오른 즉흥연출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찍을 때 오랫동안 영화촬영을 기다려 왔기 때문에 사전 콘티도 꼼꼼하게 작성했다. 즉흥성이 강한 내가 장면 하나하나부터 논리적으로 접근한 유일한 작품이다.

김시무= 데뷔작 <별들의 고향>이 흥행대박을 터뜨렸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이장호= 처음 관객이 10만 명을 넘었을 때 역시 최인호의 원작이 좋긴 좋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관객이 20만 명을 넘으니까 이장희의 음악이 보통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만 명이 드니까 그때서야 영화도 잘 만든 편이 아닌가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워낙 고생하고 자신감 없이 그냥 젊은 혈기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 영화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파악을 못 했었으니까. 그러나 40만 명을 넘기니까 “이건 아니다”싶었다. 이제부터 영화는 내 손아귀를 떠나 혼자 달려가는 작품이 되었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내 능력 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잔치는 잔치인데, 주인은 저기 구석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영화 '별들의 고향'(1974) 스틸 컷/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별들의 고향'(1974) 스틸 컷/사진출처=네이버

김시무= <별들의 고향>이 개봉되었을 때 당시 많은 평론가들이 ‘청년문화’ 혹은 ‘청년영화’의 탄생을 반기며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이장호= <별들의 고향>을 찍을 때, 사실 나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었을 때였다. 영화공부도 제대로 안했고, 영화이론도 없는 내가 감히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 거라고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설령 공부를 했다고 해도 데뷔작을 만드는 입장에서 이러저러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 영화를 만들면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의식을 하지 못했다. 단지 촬영장에 나가서 하루의 작업량을 끝내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이렇게 해서 과연 영화가 될까 하는 불안감뿐이었다. <별들의 고향>이 흥행되기 시작하자마자 많은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신문에도 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아! 내가 정말 영화감독이 되었구나”하는 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김시무= 겸손의 말씀이다. 어쨌든 감독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영화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첫 작품에 뛰어들었다는 바로 그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별들의 고향>이 당시 왜 그토록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이해 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감독님은 신상옥 감독 밑에서 8년간 연출수업을 받으면서 멜로드라마 연출법 등을 전수 받았지만, 그때 배운 것을 곧이곧대로 답습하는 관행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감성까지 보태져서 작품 연출에 새로움을 불어넣었다고 본다. 감독은 부지불식간에 새로운 내용을 새로운 형식에 담아냈다는 것이다. 데뷔작 성공이후 최인호와 한차례 더 작업을 한 후 약간 방향 선회를 했다.

이장호=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알게 된 성격 중에 하나가 권태감이 무척 빠르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같은 장면을 과거에 찍었다거나 혹은 비슷하다고 할 때는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어제 내린 비>이후에는 멜로드라마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귀신을 무서워하고 공포감이 많았는데, 이 두려움을 살려서 공포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영화가 바로 <너 또한 별이 되어>라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미 1973년 비슷한 소재의 <엑소시스트>라는 공포영화가 외국에서 만들어졌고, 불행하게도 내 영화가 개봉 될 때쯤 그 영화도 수입되는 바람에 내 영화가 흥행에 참패를 했다. 실제로 나는 <엑소시스트>를 본 적도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똑같아져 버린 것이었다.

김시무= 데뷔작 이후 4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차츰 충무로에 적응해 가던 감독은 대마초 사건에 휘말려 감독직을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래서 4년 여 간의 공백기를 갖게 되는데, 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오히려 그것이 약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장호= 1975년 말에 대마초 사건에 걸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6년 신정 프로였던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이라는 영화마저도 흥행에서 실패를 했다. 실형은 안 받았지만 벌금형을 받았고, 영화인협회에서 제명을 당하고 안기부에서 작품 활동을 못하게 관리를 했다. 나로서는 최초의 시련(試鍊)이었고 그 파장은 매우 컸다. 너무 자학적으로 받아들여지니까 나중에 나도 모르게 자기 방어적으로 되면서 심성이 비뚤어져서는 안 된다는 자구책까지 만들 정도였다.

경제적으로도 물론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래 문화영화 내지 광고도 찍으면서 한편으로 시나리오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사건에 걸리기 전에 두 작품을 계약했었는데, 해금(解禁)이후 그 계약을 이행하느라 고생을 좀 했다. 1981년에 만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가 그 후유증의 산물이랄까. 아무튼 대마초 사건으로 쉬고 있는 동안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의 본령 자체도 서민적인 생활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5일 부산 노보텔 엠배서더 그랜드볼룸에서 진행된 2018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의 주인공 이장호 감독이 증정받은 '디렉터스 체어'에 앉았다. 이 감독의 뒤에는 그와 작품을 함께한 여배우들이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사진=박상훈 기자

김시무= 1980년 감독님은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재기에 성공을 했고, 이후 일련의 작품을 통해 사회파 감독으로써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또한 감독님은 일련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문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을 하고 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과부춤> <바보선언> <무릎과 무릎사이> 등을 보면 국악과 서양음악에 대한 대비가 드러나고 게다가 특정 캐릭터에 의하여 우리문화(음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무릎과 무릎사이>에서 조민(안성기)과 수일(임성민)의 대비는 대단히 의도적인 듯 보인다. 80년대 시대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고 본다. 당시 입장과 오늘날 입장의 차이는?

이장호= 솔직하게 얘기해서 나는 도시에서만 자랐다.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뺀질뺀질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늘 철든 다음부터는 농촌에서, 자연 속에서, 말하자면 민중적인 정서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성향의 사람들에 대해서 열등감, 이기심 등 콤플렉스가 있다. 은근히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서울에서 자랐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가 어떤 결정적인 문학이라든가 예술 같은 데에서 우리정서에 부딪히면 난 왠지 잘못 자랐고 잘못 길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쪽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자란 것 같아 왠지 괴리감이 있었는데, 그것이 영화를 하면서 조금씩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 같다.

<별들의 고향>을 촬영할 때는 전혀 그런 열등감 없이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최인호가 쓴 소설에서도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때는 유럽문화라든가 외국 문학에 대한 선망이 있었던 때였다. 그 후 대마초 때문에 4년간 휴식기간이 있었고 그 때 염무웅 작가의 ‘민중시대의 문학‘이란 평론집을 읽으면서 의식의 변화가 생겼다. 그때부터 향토적 정서가 전무한 것 등에 대한 열등감을 갖기 시작했고 영화에서의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미국식 소비문화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다. 코카콜라니 팝이니 하는 이런 데만 감흥을 할 줄 알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족정서라든가 국악 같은 것에는 적응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로 인해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고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잘못 길들여졌으므로 락을 처음 들을 때는 왠지 좋은데 의식적으로 국악을 좋아하려고 하면 쉽지가 않았다. 억지로 국악을 들어야 하고 또 판소리를 선망하려고 했지만, 이런 음악은 서양의 락 음악처럼 나를 쉽게 흥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갔다. 이처럼 서양음악과 우리 음악 사이에서 내가 느꼈던 갈등을 영화에서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무릎과 무릎사이>를 기획하면서 내가 느꼈던 갈등을 일종의 외래문화에 의해 강간을 당한 상태라고 설정을 하고 그것을 한번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해보자고 해서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게 성적이고 에로틱한 부분으로 확대되면서 자칫 내 메시지가 왜곡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게다가 <무릎과 무릎사이>라는 제목 자체를 문제 삼는 평자들도 있었다.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아마도 못마땅했을 것이다.

김시무= 일부 평론가들은 그런 점을 비판했지만 나는 그 영화의 에로티시즘(eroticism)이 무척 마음에 든다. 특히 우리악기인 대금 연주자와 성악가의 대비는 그러한 감독의 의도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 준다고 생각된다.

이장호= 평론가들은 흔히 간과하지만, 나는 <무릎과 무릎사이>에서 특히 제사(祭祀)지내는 장면에 신경을 써서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처럼 아주 세밀하게 차곡차곡 촬영을 했는데, 내가 잃어버린 정서 중 하나가 바로 그 같은 우리 전통의 제사문화였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자면 <축제>(Festival)같은 장례식(葬禮式)을 다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임권택 감독은 상대적으로 그 같은 우리 문화와 전통에 익숙해있으므로 아주 자연스럽게 제사 장면들을 연출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런 점에 약해서 의도적으로 에로티시즘을 다룬 <무릎과 무릎사이>에서 그 같은 시도를 감행했던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시골 출신이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그러한 정서가 밑바탕이 되어 그러한 연출력에 탁월하다는 것이다. 임 감독은 제사를 보여주어도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데 도시 출신인 나는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문화에 대해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김시무= 이에 덧붙여서 감독님은 자신의 작품에 카메오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무릎과 무릎사이>에서는 정신과의사로 출연하여 서양문화에 찌들어 우리 정신이 황폐화되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나그네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는 살짝 회사의 사장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바보선언>에서는 대단히 비중 있게 등장한다. 옥상에서 투신하는 감독 자신으로 출연한다. 나는 옥상에서 떨어지는 신문지 한 장을 언론에 대한 사망선고로 해석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이장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는 고향을 북쪽에다 두었지만 남쪽에서 자수성가한 노회장의 아들로 나왔다.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그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 출세로만 신경 쓰는 아들이다. 그는 국회에 출마하기 위해서 자기 주변의 모든 나쁜 이미지를 거세해버리려는 인물로 나온다. <무릎과 무릎사이>에서는 정신과의사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너무 직설적으로 내 생각을 뱉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보선언>은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 있다. 그 당시에는 사전 검열과 사후 검열 등이 제일 심할 때였다. 그래서 모종의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는 희망에 들떴다가 전두환 정권이 안정되어 가면서 오히려 더 절망적이 되었다.

그 때 화천공사라는 곳이 제작사였는데 그곳에서 <어둠의 자식들> 3부작을 계약했었다. 그런데 제2부를 원작자 이동철의 이야기부터 주변 기둥서방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썼는데 검열에서 통과해주지 않았다. 또 제작사인 화천공사에서는 이 사태를 감독인 이장호가 책임져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우리는 이미 계약을 다했고, 이런 식으로 문제가 불거졌다.

그때는 시한부 제작을 해야 했는데 1년을 4번으로 나눠서 1,3분기에 두 편 2,4분기에 두 편 그런 식으로 영화제작사가 의무적으로 4편을 만들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제작사 측은 전적으로 감독이 책임져야한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들고 싶어도 문광부에서 제작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제출하면 반려하고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제목의 사용도 불허했다. 심지어 이동철, 황석영이라는 원작자의 이름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시나리오도 받아주지 않았고 제작사인 화천공사와 정부(문광부) 사이에 껴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살(自殺)을 하는 심정으로 어쩔 수없이 만든 것이 바로 <바보선언>이었다.

영화 '바보선언'(1983) 포스터/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바보선언'(1983) 포스터/사진출처=네이버

그 때 영화 한편의 평균 제작비가 1억5천만 원이었을 때인데, <바보선언>은 겨우 5천만 원의 제작비로 만들었다. 시나리오도 엉터리로 써서 일부러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교훈을 담아 정부가 좋아할 내용으로 꾸몄다. 사실 <바보선언>이란 제목도 내가 정한 것이 아니었다. 제목도 내가 짓기 싫어서 문광부에서 알아서 고르라고 했다. 그래서 제작자가 제목을 이것, 저것 붙여서 문광부에 가져갔는데, 나는 그때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었었다.

그런데 문광부 담당직원이 화천공사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을 만든 제작사니까 <바보선언>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멋대로 정해버렸다.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이 없었다. 난 영화 하나 망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촬영에 들어갔다. 그때는 정말 무엇을 찍어야할지 아득했다. 그러다 나중에 다큐멘터리 식으로 찍자 해서 그냥 막 찍다가 조금씩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요컨대 무조건 내가 알고 있는 영화상식의 정반대로만 찍자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보통 1초에 24프레임이라면 나는 비정상적으로 12프레임, 어떤 때는 8프레임 등으로 찍었고, 조감독이 의상의 연속성에 신경을 쓰면 나는 낮과 밤 그런 것의 연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뭐든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상식을 거스르면서 개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이 영화의 감독으로서 전적인 책임을 질 수도 없었으니까 영화 첫 부분에 영화감독이 자살하는 부분을 삽입한 것이었고, 영화감독 혼자 죽기는 억울하니까 동반자살로 언론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그때는 언론이 언론다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언론하고 같이 죽자”라는 의도로 신문지 한 장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삽입했던 것이다.

김시무= 영화제작 과정 자체가 지극히 반영화적(anti-cinematic)인 방식으로 진행되었기에 그처럼 파격적이고 신선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어쨌든 <바보선언>은 그 당시 굉장히 파격적인 작품이 되었다. 나도 그때 이 영화를 보고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았다. 제목도 매우 적절한 것 같다. 비록 우연적이긴 해도 말이다.

이장호= <바보선언>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내용에 걸 맞는 적절한 제목이 된 셈이다. 처음에는 내레이션도 없었다. 그러다 영화를 편집하고 정리하다 보니 내레이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야기 전개가 안 되니까. 그래서 당시 우리 첫째아들 누리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가 한글을 익힌 상태였는데, 그 아이를 데려다가 내레이션을 녹음해주게 되었다. 그 애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면서 그걸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영화에는 관심 없고 스포츠에만 관심이 있었다”라고 떠들면서 얘기하고 그랬다.

이 영화는 198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내레이션은 20세기가 끝날 무렵의 이야기라고 시작을 한다. 그러니까 내레이터(화자)인 아이가 21세기에 살면서 마치 옛날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내레이션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크레딧의 그림에 우주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온다. 내 딸 보람이가 그린 것이다. 밝은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 암울했던 시절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였다. 이것도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이어서 ▶ 1970-80년대 청춘, 청년문화의 우상 영화감독 이장호 ②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 이장호 감독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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