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서울연극제] ④안톤 체홉을 위한 오마주...창작극 '공포' 리뷰
[제39회 서울연극제] ④안톤 체홉을 위한 오마주...창작극 '공포' 리뷰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8.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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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체홉의 희곡이 아닌데 체홉 작품 같은 느낌...극단 그린피그의 '공포'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극단 그린피그의 연극 '공포' 콘셉트컷/사진=서울연극제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연극은 대학로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제39회 서울연극제(Seoul Theater Festival)가 지난달 28일 개막해 5월 29일까지 대학로 일대에서 열리고 있다. 

1977년 대한민국연극제로 출범해 서울연극제, 서울공연예술축제(SPAF)로 개최되다가 2006년부터 서울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서울의 대표적 연극축제로 발돋움했다.

올해 서울연극제(집행위원장 송형종, 예술감독 최용훈)는 10편의 공식 선정작(재공연, 번역극 포함)이 메인 무대에 올라 한국 현대 연극의 흐름과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관람작에 대한 리뷰를 올려본다.

리뷰①창작공동체 아르케의 '툇마루가 있는 집'

리뷰②연극 '이혈'...연극으로 풀어낸 일제 만행 위안부의 상흔

리뷰③사형제도 놓고 벌이는 토론식 연극 '4 four'


◆ 제39회 서울연극제 공식선정작 그린피그 '공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무대에 오른 그린피그의 '공포'는 '상상력으로 그려낸 안톤 체홉을 위한 오마주'를 표방하고 있다.

고재귀의 극작을 박상현이 연출했고, 배우들도 낯익은 얼굴들은 아니다. 그래서 이 연극을 볼까말까 망설였다. 우리처럼 체홉 작품을 많이 공연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예술 대학에 있을 때도 실습 작품에 체홉이 빠진 적이 거의 없다. '벚꽃동산', '갈매기', '바냐아저씨' 등 체홉의 대표작들은 적게 잡아 서너 버전을 보았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감동에 빠져든 작품은 손꼽을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는 체홉을 위한 오마주, '한국산 체홉'이라니 좀 혼란스러우면서도 한편 호기심이 작동했다.

연극 '공포' 리허설 장면/사진=
연극 '공포' 리허설 장면/사진=서울연극제

무대부터 범상치 않았다. 체홉 하면 연상되는 자작나무 숲이 밀도 있게 펼쳐져 있었고, 벽난로와 피아노와 책상, 테이블과 의자들이 실내외 경계 없이 배치되어 안정감을 주었다. 여기에 조명을 활용한 러시아의 겨울 밤안개 분위기를 조성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고재귀 작가는 체홉이 사할린 섬을 여행한 후 발표한 단편소설 '공포'를 토대로 체홉의 주제인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화두를 상상력을 발휘해 창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래도 모자이크의 흔적이 묻어났다.

매우 문학적인 수사의 사할린 기행문, 신부를 통한 신의 존재와 기독교적 윤리관, 귀족과 하인을 통한 욕망과 윤리의 문제가 작품 속에 용해되지 못하고 따로 가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연극 '공포' 리허설 장면/사진=
연극 '공포' 리허설 장면/사진=서울연극제

초반 조시마 신부가 마리와 살린에게 쫒겨난 하인 가브릴라를 다시 맡아 달라는 장면이 길게 펼쳐져 작품의 향방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체홉의 사할린 여행문으로 채우던 중반까지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후반에는 마리에게 쫒겨 난 하녀 까쨔의 자살, 가브릴라의 절규, 체홉과 마리의 욕정까지 빠르게 치닫는다.

놀라운 점은 135분 분량을 주역 배우 몇의 대사로 풀어냈고, 이를 박상현 연출이 긴장감을 유지하며 끌어갔다는 것이다.

겨울 안개가 너울대는 몽롱한 조명에 심플한 음악과 음향, 피아노 연주에 보드카와 포도주 소품까지 분위기를 살려가며 이야기의 전개부터 클래이맥스까지 끌어간 연출의 힘은 대단했다. 국내에서 체홉을 많이 가르치고 공연한 저력이 뿜어 나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 영상까지 써서 너무 많은 교훈적 메시지를 주려는 시도는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초반 체홉 모방 같던 무대가 후반으로 갈수록 체홉 색깔을 내더니 종반에는 체홉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아우라에 빠져들게 했다. 인간의 고독과 불안 같은 체홉의 정수를 우리 정서에 맞게 살려낸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연극 '공포' 콘셉트 컷/사진=서울연극제

연출의 역량은 배우들에게서도 발휘됐다. 8명의 배우들은 화술도 다르고 연기 패턴도 서로 달랐다. 교향악이라면 앙상블이 맞지 않았을 텐데도 배우 각자가 자기 스타일로 연기를 펼치며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체홉 역 이상홍은 캐릭터 설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나름 객관적 위상을 조절해냈다. 실린 역 이동영은 화술과 연기가 좀 튀어 보이긴 했어도 그 나름의 매력으로 끌어나갔다. 마리 역 김수안은 대사 전달이 좋고 연기도 안정됐으나 복잡한 심리 묘사가 좀 버거워 보였다.

조시마 신부 역 김은석은 초반의 상당 시간을 거의 독백으로 이끄는 저력을 보였다. 요제프 신부 역 김동휘는 분량은 많지 않으나 "신은 자신을 만끽할 뿐"이라는 대사로 조시마 신부와 대비를 이루었다.

연극 '공포'가 끝난 후 커튼콜 장면/사진=정중헌

이번 작품에서 필자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는 가브릴라 역 신재환이었다. 술주정뱅이에다 카쨔와의 정숙하지 못한 행동으로 쫒겨났으나 갈 곳이 없어 다시 주인에게 애걸하는 비굴하고 천박한 캐릭터지만 가슴 속에 인간적 욕망과 삶에 대한 의지가 불타는, 그래서 동정과 연민 이상의 인간적 체취를 느끼게 하는, 눈빛이 강렬한 생생한 연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체홉의 인기가 대단했다. 대극장에 젊은 관객들이 만원을 이루어 진지하게 관극을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