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벤트', 극한 상황 속 예리하게 파헤친 심리... 스토리텔링 돋보여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 '벤트', 극한 상황 속 예리하게 파헤친 심리... 스토리텔링 돋보여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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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BENT'/사진=극단ETS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한번 봐야지 별렸던 연극 'BENT(벤트)'를 8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관람했다. 극작가 마틴 셔먼의 희곡을 극단 ETS(Eye to Soul)가 2013년 국내 초연한 후 2014, 2015년에 앵콜공연했고 올 연초에 재공연한 기회를 잡은 것이다.

소극장에 관객이 꽉 찬데다 작품을 보니 화제를 모을 요소들이 다분했다. 무엇보다 영국 작가 마틴 셔먼의 희곡이 20세기 최고의 연극 100편에 꼽힐만큼 충격적 소재에다 극한 상황 속의 인간 속성을 예리하게 파헤쳐냈다. 특히 탄탄한 구성과 본능이 뿜어내는 대사, 빠른 전개로 촘촘하게 엮어낸 스토리텔링이 일품이었다.

1막의 자유로운 삶과 2막의 수용소 내 극한 상황의 대비가 명료했고, 손끝 하나 접촉없이 서로를 더듬고 느끼는 성적인 묘사가 관객의 숨을 죽여놓았다. 동성 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연극은 자칫 외설이나 혐오를 주기 십상인데 이 작품에도 그런 상황이 여러 번 나오지만 연출이 깔끔하게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남성 심리를 그린 이 연극을 김혜리 연출가가 계속 다듬어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도 색다르다. 미국 컬럼비아대 연기 석사를 하고 배우 훈련과 발성에 주력해온 김혜리 연출은 관객과의 새로운 소통과 표현 방식을 추구하는 극단 ETS 레퍼터리로 'BENT' 를 내보인 것이다.

특별한 무대장치도 없는 공간에서 두 남자가 시지프스 신화처럼 돌을 나르며 주고 받는 대사로 감정 교류를 하는 장면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은 이 연극의 압권이다.

연극 'BENT'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서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특히 배우들의 폭발적인 연기를 끌어낸 역량이 뛰어났다.

맥스 역의 배우 김승기는 시종 무대를 지키며 뚝심있게 상황에 대처하는 연기를 하면서도 캐릭터의 중심을 잃지않았다. 맥스 못지않게 홀스트 역 김정훈에게 연민과 진정성을 느꼈다. 그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 간의 소통과 복합적인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해 냈다.

다만 두 남자가 내면의 심리와 감성을 대사로만 하다보니 소리 지르는 장면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그게 거슬리기 보다는 절규로 들리는 것도 이 연극의 매력이다.

루디 역 허진도 제 역할을 잘 소화했고 그레타 역 최우석 역시 개성있는 캐릭터로 그들만의 세계를 잘 드러냈다.

타인의 평에 별로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배우의 뜨거운 에너지' '이야기의 강렬한 힘' '캐릭터가 잔상에 남는 작품' '별다른 무대장치가 없음에도 두 캐릭터의 대화만으로 극의 긴장감이 밀도 있게 유지된다' '살기를 원했던 두 인물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배우들의 열연이 극의 몰입도를 더했다' 등에 공감을 표하고 싶다.

인권까지 내세우지 않더라도 생존 본능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갈구하는 간절함,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반전을 보여주는 라스트의 배우 눈빛은 조명이 꺼져도 자리를 뜨기 어렵게 했다.

영혼의 눈처럼 자신들만의 색깔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극단 ETS의 역작을 본 느낌이 아직도 강렬하기만 하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