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사막 속 '그들만의 공간'...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차가운 사막 속 '그들만의 공간'...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 주하영
  • 승인 20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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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장면/사진=악어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공간은 함께 공유한 사람과의 '관계'라는 그물망을 통해 그 의미를 구축한다.

공간은 그 안을 채웠던 경험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아름다움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워내야만 할 고통으로 기억된다. 공간 속에서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 마련이고, 관계는 공간을 따스함과 차가움이라는 감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생텍쥐페리는 "어떤 우연한 일로 사랑이 싹트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이 사랑에 의해 질서가 잡히고, 이 사랑은 그에게 공간의 넓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암흑 속에 불빛하나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속에서도 등을 맞대고 앉을 다른 누군가가 있어 두 사람이 '서로 이어진 존재'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 삭막한 사막에서도 어느 덧 '그들만의 공간'이 생겨 두 사람은 서로의 따스함에 기대어 잠을 청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문 라틴 아메리카 소설"로 유명한 마누엘 푸익은 동명소설을 각색한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를 통해 차갑고 외로운 감옥의 공간을 그들만의 '따스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을 그려낸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장면/사진=악어컴퍼니

동성애자와 정치범이라는 전혀 다른 두 인물이 고립된 공간에서 보여주는 대립과 화해, 소통의 과정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곳을 엿봄으로써 나를 발견하고, 너를 발견하고, 우리 둘을 발견하고, 인간 대 인간의 합일을 이루는 현장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인간은 '대인간적 결합', 즉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을 추구하며, 이는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갈망인 '사랑'을 통해 가능해진다...사랑이 없다면, 인간성은 단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빌라 데보토의 좁고 어두운 '감방'에는 정치적 철학이라는 '신념'을 추구하는 혁명가 '발렌틴'과 낭만적인 '환상'을 추구하는 쇼윈도 디자이너 '몰리나'가 각자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을 견디고 있다.

발렌틴은 감각적 즐거움이나 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욕구들은 착취당하는 나약한 개인을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혁명'이라는 더 큰 대의 명분을 위해 억제되어야 할 부차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한편, 성문란죄로 수감된 동성애자 몰리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실존적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영화'라는 환상 속으로 끊임없이 도피한다. 그는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 감정을 몰입하고 동일시하는 낭만적 '환상'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한다.

두 사람에게 상대방은 각자 자신을 지탱하는 가치를 폄하하고 방해하는 상당히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발렌틴은 영화 '표범여인의 이야기'의 장면들을 자세히 묘사하며 환상으로 빠져드는 몰리나를 '도피주의자'라 비난한다.

하지만 몰리나에게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육체적 고통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발렌틴이 오히려 환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이로 보일 뿐이다. 몰리나는 끔찍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장면/사진=악어컴퍼니

발렌틴이 말한다.

"나약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나의 이상은 마르크스주의야."

아이러니한 점은 발렌틴이 자신을 희생하며 투쟁하고 있는 가치들이 사실상 몰리나와 같이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계급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것임에도 몰리나는 발렌틴의 '정치적 이상'을 '환상'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발렌틴 역시 신념과 일치된 삶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성소수자인 몰리나를 멸시하고 무시하며 상처가 될 말들을 함부로 내뱉는 모순을 보인다.

두 사람은 모두 고립되어 있다. 발렌틴은 정치적 이상이라는 신념 속에, 몰리나는 환상이라는 거짓 속에 갇혀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다가와 키스를 하는 순간 표범으로 돌변해 모두를 파괴해버리는 영화 속 이야기가 실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상대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길 두려워한다.

어쩌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정치적 행동이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까봐 두려워 '감정적 친밀감'을 거부하고 고립된 속에서 투쟁을 이어나가는 발렌틴이 몰리나가 쏟아내는 '표범여인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표범일 수도 없고 인간일 수도 없는 표범여인 '이리나'는 남성임에도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은 몰리나의 자아가 투영된 '환상 속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이 키스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게 될까봐 두려워 마음껏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발렌틴과도 닮아있다. 또한, 자신이 표범여인이라는 사실을 사랑하는 이에게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감옥 소장과 내통하고 있는 몰리나의 상황과도 닮아있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장면/사진=악어컴퍼니

가석방을 조건으로 정보를 넘기기로 한 거래 때문에 발렌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몰리나는 굶주림과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을 좋게 바꾸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발렌틴의 모습에 점차 인간적인 존경과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복통을 일으키는 약을 넣은 음식을 먹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발렌틴은 의무실로 가라는 몰리나를 저지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치범은 절대 의무실에 가면 안 돼! 의지력이 약해져서 다 불어버린다고!"

발렌틴은 심지어 아픈 걸 들킬까봐 화장실에 갈 수 있게 감방 문을 열어달라는 말도 못한다. 의지를 꺾어 비밀을 발설케 하려는 계략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통증에 몸부림치던 발렌틴은 결국 생리적 현상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옷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위엄조차 지킬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며 울부짖는다.

"...난 화가 나... 내 인생이란 것이 고작 이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난 그 누구도 이용한 적 없는데.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된 후부터, 난 착취에 대항해 투쟁해 왔는데. 내 손 끝에서는 죽음의 싸늘한 공포만 느껴져. 희망을 잃는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런데 그게 바로 지금 나한테 일어나는 일이야."

생텍쥐페리는 '아라스로의 비행'에서 "육체가 쓰러지면 그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인간은 관계의 덩어리라는 것을, 오직 관계만이 인간을 살게 한다는 것을"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육체를 넘어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마음의 치유를 위해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존재임을 받아들인 발렌틴은 치욕스러운 순간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따뜻한 배려와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몰리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열기 시작한다. 이제 몰리나는 몸도 마음도 모두 황폐해진 발렌틴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 사랑을 지키기 위한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몰리나, 염치없이 받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미안함에 도리어 화를 내는 발렌틴.

몰리나는 목과 가슴에 고여 '매듭처럼 내리누르는 슬픔'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다. 그를 위로하며 따스하게 안아주는 발렌틴. 어둡고 차가운 공간을 따스함으로 채우는 그들의 사랑은 '참을 수 없는 상대'를 '참을 수 있는 상대'로 받아들이며 연민하고 포용한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공연 장면/사진=악어컴퍼니

몰리나는 말한다.

"아주 잠시 동안, 난 여기 없었던 것 같아...너만 있었어...나는 너였던 것 같아."

소장은 몰리나를 가석방하고 그 뒤를 쫓아 아지트를 덮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사실을 모르는 몰리나는 발렌틴을 위해 조직에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약속한다. 몰리나를 떠나보내며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를 하는 발렌틴은 말한다.

"넌 거미여인이야. 남자를 거미줄로 얽어매는. 이제 네가 나한테 약속해! 사람들이 너를 존중하게 하겠다고. 약속해! 너 자신을 폄하하지 않겠다고."

이제 몰리나가 처음 자신과 동일시했던 표범여인은 발렌틴에 의해 '거미여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 속 '거미여인'은 상대를 옭아매는 무서운 여인이 아니다. 홍수에 떠밀려가는 인간들을 탄탄한 거미줄로 얽어매어 구원하는 모성이자 지혜의 수호신이다. 그들의 키스는 고독했던 두 개인의 고립된 영혼을 보듬는 포용이며, '서로 이어진 존재'임을 확인하는 마음의 약속이다.

몰리나와 발렌틴의 사랑은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고, 두 사람이 바라던 꿈은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암흑 속 사막 같았던 빌라 데보토의 '감방'에서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연민하고, 보듬었던 기억은 '짧지만 감미로운 꿈'이 되어 발렌틴의 환상 속에 '거미여인'을 남긴다.

배고픈 발렌틴에게 음식을 건넸던 외로운 정글 속 거미여인은 투쟁을 위해 떠나는 발렌틴을 붙잡지 않는다. 발렌틴은 섬을 떠나 동지들과 합류한다.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바로 그 '환상' 속에서 말이다.

어둡고 차갑기만 한 '감옥'을 따스한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사랑, 상대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있는 용기와 희생을 갖춘 사랑이 궁금하다면,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를 통해 '그들만의 공간'을 확인해 봄이 어떨지. 2월 25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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