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원로 영화조명감독 마용천 전 조명감독협회 이사장
[인터뷰] 원로 영화조명감독 마용천 전 조명감독협회 이사장
  • 김두호
  • 승인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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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마술사로 카메라 뒷전서 보낸 50여년 영화인생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민족상잔의 비애 온몸으로 체험
마용천 전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초대이사장은 생존한 한국영화 조명감독의 최고참으로, 한국영화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1955년 김성민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막란이 비사> 촬영팀에 보조기사로 영화판에 첫 발을 들인 후 50여년간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삼룡>, 김수용 감독의 <순애보>,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 등 300여편의 한국영화에서 조명 스태프로 제작에 참여했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생존한 한국영화 조명감독의 최고참 마용천(1927∼ ) 전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초대이사장은 겪고 지나간 그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였고 영화였다.

영화 조명감독(과거는 조명기사로 통칭)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 촬영팀과 역할을 달리해 독립된 기술팀으로 참여하지만 작품이 성공해 감독과 배우들이 떠들썩하게 화제를 모아도 그들은 저만치 인기의 시선밖에 있다. 영화의 엔딩 끝자락에 무수히 떠오르는 스태프 소개의 자막으로나 이름 석자를 남길 뿐 더 이상 조명을 받지 못하는 무명의 영화전사가 조명감독이다. 

마용천 감독이 조명 스태프로 제작에 참여한 영화가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삼룡> <이조여인잔혹사> 김수용 감독의 <순애보> 등 300편이 넘는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피사체를 따라 무거운 조명기를 이동해가며 빛의 밝기와 음영을 조절, 투사하는 빛의 기술로 배우의 표정과 감정의 섬세한 변화를 영상 효과로 살려내는 조명감독으로 보낸 세월이 50여년에 이른다. 일생을 영화 제작 현장에서 조명활동으로 보낸 마 감독은 '빛을 비춰주고 살았지만 빛이 안 들어오는 음지에서 일한 촬영장의 그림자 인생'이었다는 짤막한 한마디로 인생 소회의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조명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조명 감독의 인터뷰 과정에 뜻밖에 영화 밖의 인생 이야기에서 영화 드라마의 주인공보다 더 극적이고 굴곡진 아픈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6.25 때 북한군으로 남침에 참전했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면서 인공기를 태극기로 바꿔 들고 다시 국군으로 최전선에서 인민군과 격전을 벌인 민족상잔의 사선을 온 몸으로 겪고 통과한 비화를 담담한 표정으로 회고했다.

한국영화 조명감독의 최고참 마용천 전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초대이사장/사진=인터뷰365

-미수(米壽 88세)가 넘어셨는 데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입니다.

호적 나이가 1927년생이니 2017년에 만 90살을 넘어섰지만 실제 나이는 1930년생입니다. 호적나이보다 3살 어려요. 6.25 전쟁 후 어수선할 때 없던 호적을 새로 만들면서 잘못 기재가 된 거 같아요. 

-없던 호적을 새로 만들다니요?

아하, 나는 요즘 북한이 핵실험하는 지역과 가까운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이 고향입니다. 그런데 남북한 양쪽에서 6.25 참전을 했어요. 고향에서 인민군으로 입대했다가 다시 전쟁 중에 국군으로 참전하고 제대해 내가 겪고 살아온 과정이 좀 별납니다.

- 인민군과 국군이라면 맞싸우는 적군과 아군관계였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요?

좀 긴 이야기를 고백해야겠군요. 1950년 6.25가 일어난 그 해 추석 날 인민군에 징집되어 간단한 신체검사를 받고 무산에 집결했다가 바로 청진 부근 나남의 일제 강점기 일본군 주둔 사령부 지역에 있던 인민군 훈련소에 입소했었지요. 일주일간 총 다루는 사격 훈련만 받고 나남에 있는 인민군 동해안 방어부대에 배속되었어요.

그곳에서 미군기 B29의 폭격을 피해 사단 사령부가 청진 해안의 해령터널로 들어갔을 때 경계병으로 근무했지요. 미군 군함에서 쏘아대는 포탄도 무섭게 날아왔었지요. 그 후 팔로군(중공군)이 들어와 전세가 달라지면서 중공군과 합세해 남으로 진격해 내려갔습니다.

-참전 경험담을 인민군 출신의 당사자에게 직접 듣기는 처음입니다.

전쟁이라는 게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경계선에서 목숨을 주고받는 싸움이니 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처절한 얘기 밖에 없어요.

-어쩌다 북한 군복을 국군 군복으로 갈아입으셨나요?

남으로 진격하다가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을 받고 내가 소속된 인민군부대가 포위망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어요. 패잔병으로 투항해 백골부대로 알려진 23사단 18연대 소속 전투병으로 군복을 바꿔 입고 총구도 인민군 쪽으로 돌리게 된 겁니다. 백골부대는 반공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결집해 용맹을 떨친 부대였지요.

- 실제 인민군과도 싸웠겠군요.

18연대 4중대 중화기 부대원으로 북진하면서 인민군이나 중공군과 싸우는 동안 진격과 퇴각 대열에서 엄동설한 죽을 고비도 무수히 넘겼지요. 흥남 철수작전 때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18연대가 재편성 되자 당시 정일권 참모총장이 인제 양양 지역으로 출전 명령을 내려 최전선에서 다시 중공군과 싸우다가 포위당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장일호감독의 홍콩 합작영화 <검은 야광주>(1974)촬영당시 현장에서 (왼쪽부터)배우 남석훈, 마용천 조명감독, 홍콩배우 리칭/사진=마용천 제공

-전후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제대하면서 국군 18연대 시절 상사로 모셨던 북한 고향 선배를 따라 충주로 내려가 살았어요. 함경도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집안에서 가족처럼 지내며 한 2년 쯤 머물다가 신문에서 극작가 유치진 선생이 종로 5가에 연기학원을 만들어 배우모집을 한 광고를 보고 지원을 했어요. 그게 남산에 있던 드라마센터(현 서울예술대)의 전신이었을 겁니다. 

-조명 기술 쪽보다 배우 지망이 먼저군요

내가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지금의 중고교 과정인 5년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악극(초기의 연극)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교회 크리스마스 기념 공연으로 제작된 성극을 연출한 경험도 있어요. 6개월 정도 다닌 유치진 학원에는 이해랑·김동원 씨 등의 연극인들이 강사로 나왔고 함께 학원에 다닌 입학 동기생이 뒤에 한국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만추>의 고 이만희 감독, 방송 프로듀서로 활동한 전세권 씨 등입니다. 그 학원에서 연줄이 이어져 1955년 김성민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막란이 비사> 촬영팀에 보조기사로 영화판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보조기사라고 했지만 실제는 무거운 촬영기재를 운반하는 인부였어요. 그 작품에는 그때 최고의 배우인 전택이·노경희·이경희 씨가 출연했던 작품이지요. 임권택 감독과 <서편제>를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촬영한 정일성 촬영 감독도 당시 촬영팀 조수였어요.

신상옥감독의 홍콩합작영화 <반혼녀>(1973)의 마용천 조명감독과 배우 리칭. 당시 리칭은 제18회 아시아영화제에서 김수용 감독의 홍콩 진출작 <와와부인>(1972)으로 인기여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마용천 제공

-조명 쪽으로 일을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

1956년 역시 김성민 감독이 연출한 이향·김석훈·주증녀 주연의 <인생 역마차> 촬영 현장에서는 연출팀 보조멤버로 일을 했어요. 그때 이한찬 조명기사가 조명기술을 배우라고 권하면서 서울 상도동에 있는 자택의 방 한 칸까지 내주고 조수 일을 시켜 평생의 업이 된 거지요.  

-참여한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1959년 신필름의 신상옥 감독 조감독으로 있다가 독립 작품을 낸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김승호·최은희·허장강·김희갑 출연)을 시작으로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삼룡>(최은희·김진규·박노식·도금봉 출연)과 <이조여인잔혹사>(김지미·신영균·남정임 출연), 김수용 감독의 <순애보>(신성일·태현실·윤정희 출연),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 (안성기·유지인 출연) 등 수없이 떠오릅니다.

박영환감독의 <해녀>(1964)의 촬영현장에서 배우 최지희와 함께한 마용천 조명감독/사진=마용천 제공

-기술로 당대의 정상급 주연배우들의 얼굴과 표정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은막으로 옮겨 놓으셨군요.

영화 촬영에서 조명의 역할은 '빛의 예술'이나 '빛의 마술'로 살아나야합니다. 조명은 배우의 얼굴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쪽으로만 빛을 만들지 않습니다. 조명의 대상은 배우가 아닌 배역 인물이지요. 드라마 상의 희로애락 감정에 따라 표정을 밝게 하거나 어둡게 조절해주면서 빛으로 느낌을 살려내야 합니다.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도 괴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 수 있고 밝은 얼굴도 순간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효과를 나타낼 수 있어요. 조명은 피부색까지 바꾸게 합니다.

-기술의 변화도 조명기재의 발전에 따라 많이 달라졌지요?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는 컴퓨터그래픽이 조명의 영역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만 내가 초기 작업할 때는 성능이 좋은 소련제(현 러시아) 조명 라이트를 주로 사용했어요. 전쟁 통에 노획된 소련제 라이트가 영화 촬영장의 조명기재로 쓰이다가 을지로 국도극장 앞의 화양제작소라는 업체가 조명용 라이트를 생산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지요. 그러다가 충무로 스카라극장 계열사인 수도영화사가 안양에 스튜디오를 건립하면서 미국산 최신 조명기자재를 도입해 조명의 새 역사가 열렸지요.

한국영화 조명감독의 최고참 마용천 전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초대이사장은 "영화와 더불어 보낸 내 인생이 그래도 헛되지 않았구나"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사진=인터뷰365

-작업이 줄어들면서 주로 영화인단체 일을 많이 하셨지요?

1980년 사단법인 한국조명감독협회가 독립된 영화인단체로 출범하면서 초대 이사장을 맡아 우리 조명 기술 분야 후배들의 친목활동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어요. 현장에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는 스태프로 살아 무슨 상을 받는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았는데 떠난 뒤에 대종상을 비롯한 여러 영화제와 단체에서 공로상을 많이 주더군요. 영화와 더불어 보낸 내 인생이 그래도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보람을 느끼며 90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의 현대사를 몸전체로 기록하면서 영화 발전에 기여해온 노 조명감독은 인터뷰를 끝내는 마지막 한마디를 “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으로 대신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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