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의 소리, 트로이의 여인들을 만나다...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한(恨)의 소리, 트로이의 여인들을 만나다...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 주하영
  • 승인 20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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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장면/사진=국립극장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우(愚)여! 매(昧)여! 우매라, 우매로구나! 한 바람에 노여움이 한 바람에 설움 일어, 설움이 원이 되어 노여움이 한이 되어...천지는 무정(無情)이요, 목숨은 유정(有情)이라! 무정한데 유정하니 어리석고 어두워라! 모이고 흩어짐도 꿈결 같은데 욕(慾)이여, 망(望)이여, 일어나는 바람이여!"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함께한다는 말이 있다. 도대체 인간은 언제부터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학자들에 의하면 이미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원시 인간들조차 자원 획득과 영역 확보를 위해 집단 대 집단의 전쟁을 벌인 흔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휩쓸고 간 자리엔 폭력과 권력, 고통과 원한, 그리고 무수히 스러져 간 무고한 사람들의 주검만이 남는다는 것인가?

누구나 전쟁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누구나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인류는 전쟁을 멈춘 적이 없다. 세계 어디에선가 어느 지역에선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이어져 왔고, 누군가는 계속 전쟁을 일으켜왔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단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은 국가를 찾는 일이 가능할까?

'전쟁 반전쟁'의 저자 앨빈 토플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1990년까지 지구상에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기간은 오직 3주뿐"이라고 말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전쟁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그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전쟁이 야비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 그것은 인기를 잃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지난 3일 국립극장에서 막을 내린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야비한 전쟁에 상처입고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인들의 울부짖음과 한스러움으로 500석이 넘는 달오름극장을 가득 채웠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아시아와 유럽의 예술 교환을 장려하고 동양과 서양의 퍼포먼스 전통을 결합하는 세계적인 연출가 옹켕센이 컨셉을 맡은 작품이다.

'트랜스컬처 씨어터'로 주목받는 연출가 옹켕센은 '보존'과 '혁신'이라는 국립창극단의 기획의도 아래 '판소리의 미니멀리즘'을 강조하면서도 창극의 세계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현실화했다.

연출가 옹켕센/사진=국립극장
연출가 옹켕센/사진=국립극장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2017년 9월 싱가포르예술축제에서 전석 매진과 긴 박수갈채로 큰 호응을 얻었으며, 무형문화재인 명창 안숙선의 작창을 더해 제대로 된 '판소리의 정수'를 구현하면서도 '전통'으로 인식되는 창극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기원전 4세기 삼촌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젊은 청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내들의 목을 베고, 적들을 동물 사냥하듯 산채로 개에게 물려죽도록 했다는 페라이의 왕 알렉산더가 인간에 대한 연민을 되찾았다는 극이다.

그는 헤큐바와 안드로마케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한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엄청난 감정적 영역이 선사하는 '파토스'가 연민을 느낄 수 없다고 알려진 비인간적인 압제자마저 굴복시킨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잔인한 폭력과 전쟁 영웅주의를 부추기며 '전사'들만을 주인공으로 삼던 시대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복자가 아닌 희생자의 관점에서 전쟁을 서술했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이후 많은 작품이 무대에 오르며 현대인들의 관심을 모아왔다.

영국의 고전학자인 프랭크 로렌스 루카스는 "입센도, 볼테르도, 톨스토이도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미신에 저항하며, 전쟁을 맹렬히 비난하는 점에 있어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 '이온', '트로이의 여인들' 만큼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라고 평했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장면/사진=국립극장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1965년 장 폴 사르트르가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을 비판하기 위해 각색한 희곡을 기반으로 배삼식 작가가 창극에 맞게 새롭게 쓴 대본에 기초하고 있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우스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를 데려온 파리스 왕자로 인해 시작된 전쟁은 율리시스의 '트로이의 목마'라는 술책으로 인해 10년을 버텨온 트로이를 패망토록 만든다.

극은 트로이의 모든 사내들이 죽임을 당하고, 전리품으로 첩과 노예로 끌려가게 된 여왕 헤큐바를 비롯해 트로이의 여인들이 흰 소복을 입고 자신들의 운명의 실을 감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에 등장하는 포세이돈은 전쟁 통에 죽임을 당해 의지할 곳 없이 떠돌고 있는 외로운 넋, '고혼'으로 대체되고, 극의 시작과 마지막에 등장한 고혼은 필멸임을 알면서도 전쟁을 향해 나아가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난한다.

"허, 허, 폐허로다. 흐르는 피의 강물, 검은 재가 된 사랑...트로이 사내들은 모두 죽으니 여기에 남은 것은 여인들 뿐. 뼈다귀에 아직 남은 살점처럼 우리는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이제 남은 딸과 며느리마저 적국의 첩으로 보내야 하는 불행한 여인 헤큐바는 심장을 쥐어뜯는 슬픔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참혹함은 '언젠가 반역의 씨앗이 될지 모를 트로이 왕가의 핏줄'을 단 하나도 남겨둘 수 없는 그리스인들이 '아직 피지도 못한 고사리 손을 움직이는 아이'일 뿐인 손자 아스티아낙스를 빼앗아갈 때 그 절정에 달한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장면/사진=국립극장

코러스 역할을 하는 트로이의 여인들은 묻는다.

"이것이 구원인가, 해방인가? 너희들이 말하던 문명이요, 진보인가?...냄새나는 주둥이로 구원이란 말을 마라! 해방을, 문명을, 진보를 말하지 마라!"

한 명의 소리꾼이 한 명의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이야기를 엮어가는 '판소리'는 보통 '한'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일컬어진다.

이는 판소리가 대부분 피지배층인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현실을 생생하게 그리는 ‘서민들의 목소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은 몹시 억울함에도 어찌할 수 없는, 원망스럽고 안타깝고 슬픈 '응어리진 마음'을 의미한다. 판소리의 핵심인 '창'이 '한'의 소리라 읽혀지는 것은 소리를 하는 창자가 고통스러운 수련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터득한 예술적 경지와 '삭임'의 깊이를 고스란히 소리로 터트리며, 가슴 깊이 맺혀있던 분한 마음을 피토하듯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공연장면/사진=국립극장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도 저항할 수 없는 가장 연약한 존재들의 피 끓는 분노와 억울함, 고통과 절망, 그 한스러움을 '우리의 소리'로 너무도 절절하게 전달한다.

'우리의 소리'는 전쟁의 발단이 된 헬레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이국적이고 이색적인 피아노 선율과 충돌하며 낯설음과 괴리, 갈등을 노출한다.

소리의 괴리는 남자가 연기하는 아름다운 헬레네를 당면하는 순간 증폭되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 '의미'를 탐색하도록 만든다.

에우리피데스의 경우, 메넬라우스 앞에서 헬레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종용하는 헤큐바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헬레네의 수사학적 대립을 통해 극한에 처한 인간이 자신의 감정적 에너지를 당장 비난하기 쉬운 대상을 찾아 쏟아내며, 실질적인 책임자들에게 화살을 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옹켕센은 헬레네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간자적 입장에 세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모호한 존재로 표현한다. 모호함과 낯설음은 생각할 여지와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관객들이 단순히 전쟁의 원인으로 헬레네를 지목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극은 전쟁이란 비극을 불러온 원인을 철저히 인간들의 '어리석음'의 탓으로 돌린다. 인간들은 필멸임을 알면서도 전쟁을 일으키고 그 불 속으로 들어간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이 불러온 필멸의 불길 속에서 피를 토하는 가장 연약한 희생자들의 고통과 '한', 그리고 분노를 토로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고 오로지 광증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의 비참함과 무가치함,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야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국립 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오는 2018년 5월과 6월 영국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의 소리로 표현되는 여인들의 '한'이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이들의 가슴에 전해져 전쟁의 ‘야비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우며 그 '인기'를 잠재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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