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허위와 위선, 그리고 포용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허위와 위선, 그리고 포용
  • 주하영
  • 승인 20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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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테네시 윌리엄즈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테네시 윌리엄즈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콘셉트 사진./사진제공=예술의전당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뜨겁게 달구어진 양철로 된 지붕 위에 네 발을 딛고 있는 고양이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지붕은 뾰족하고 발은 너무 뜨거워서 끊임없이 발을 바꿔가며 펄쩍 펄쩍 뛸 수밖에 없는 고양이. 뜨거움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고양이는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 뛰어내리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할지라도 고양이는 지붕을 포기할 수가 없다. 어떻게 올라온 지붕인데, 얼마나 힘들게 버텨온 지붕 위인데, 고양이는 절대로 지붕을 떠날 수가 없다.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는 문삼화의 번역과 연출로 새롭게 탄생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연극이다.

문삼화 연출은 드라마적인 효과를 위해 엘리아 카잔의 무대화를 기본으로 했지만 빅대디가 암으로 인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면을 강조한다거나, 마가렛이 아닌 브릭의 대사로 막을 내리는 선택을 함으로써 극작가인 테네시 윌리엄스의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작품은 3막에서 빅대디의 존재감을 살릴 필요를 제안했던 엘리아 카잔과 브릭의 도덕적 마비가 모든 비극의 원인임을 강조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시선을 둘 다 잘 수용하고 있다. 더불어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로서 마가렛의 지칠 줄 모르는 안타까운 노력을 강조한다.

한 때 유명했던 축구 스타였으나 친구 스키퍼가 자살한 이후부터 현실을 외면하고 술로 도피하고 있는 남편 브릭은 아내 마가렛과 표면상의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브릭은 아내의 몸에 손도 대지 않지만 마가렛은 끊임없이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간청을 다한다. 마가렛은 남편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진실'과 직면할 필요를 느끼지만 진실을 말하려 할 때마다 브릭은 날카롭게 반응하며 더 멀어져 갈 뿐이다.

하지만 말기 암 선고를 받고도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아버지 빅대디의 생일파티가 벌어지는 대저택의 2층 브릭 부부의 침실에서 가족들 간의 모든 갈등과 진실은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며 탐욕과 위선, 그리고 허위를 모두 관객 앞에 폭로하게 된다.

허위와 위선, 그리고 탐욕과 같은 단어들은 사실상 가족과 쉽게 연결되는 단어들이 아니다. 가족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랑, 이해, 그리고 위로와 같은 따뜻한 단어들과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 속 대부분의 가족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며, 비난하면서도 안타까워하고, 이해하면서도 수용하지 못한다. 어쩌면 '갈등', 그것이 가족과 가장 근접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 간의 갈등의 출발은 언제나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빅대디를 둘러싼 가족들은 소통하지 못한다. 브릭의 알코올중독과 동성애적 성향이라는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피상적인 대화들, 유산상속을 향한 탐욕을 숨긴 채 생일을 맞이한 빅대디에게 건강을 기원하는 위선들, 곳곳에서 벽에 귀를 들이밀고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염탐하면서도 모르는 척 가장하고 상처를 건드릴 만한 뾰족한 말들을 실수인 척 던지는 가족 구성원들.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욕망과 탐욕에 치중한 채 상대를 무너뜨려야 할 '적' 혹은 넘어야 할 '장애'로 간주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서 펄쩍대는 일을 계속한다.

브릭은 말한다. "허위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이에요." 혐오스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브릭에게 빅대디는 말한다. "나는 평생을 허위와 함께 살아왔어! 왜 너는 그걸 참지 못하니? 허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뭐가 있겠니? 우리는 허위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단다!" 하지만 브릭은 대답한다. "네, 아버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게 하나 있긴 하죠. 바로 '술'이에요!"

연극'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콘셉트 사진./사진제공=예술의전당

사르트르에 따르면 상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문제를 묵인하거나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은 '자기기만' 혹은 '허위'에 해당한다.

브릭은 사실상 자신을 향한 혐오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술에 취한 채 장애물을 넘다 쓰러져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채 목발을 짚고 있는 브릭은 자신에게 닥친 삶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불구의 인생을 상징한다. 브릭은 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친구인 스키퍼를 자살로 몰고 간 책임이 자신의 '허위'에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자신을 향한 혐오, 거짓을 말함으로써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위선에 대한 죄의식, 진실과 대면하고 앞으로 나아가길 갈망하는 마가렛을 향한 적대감과 연민은 브릭으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술이 선사하는 망각이라는 '짧은 여행'으로 계속 도피하도록 만든다.

브릭 역시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단지, 지붕 위에서 뛰어내릴 용기도 펄쩍 거리며 고군분투할 의지도 없기 때문에 모든 노력을 포기한 채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브릭이라는 고양이는 술에 너무 취한 채 거꾸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생 불안증에 시달리며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 술에 탐닉했고, 결국 술에 취한 채 쓸쓸히 호텔 방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테네시 윌리엄스가 가장 사랑했다는 작품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속 브릭은 윌리엄스 자신과 많이 닮아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자신의 피부 속에 갇혀있는 고독한 존재"라 생각했던 윌리엄스가 보다 연민하고 매력을 느꼈던 인물은 마가렛이었다. 마가렛은 빅대디 가족 일원 중 가장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며, 스스로에게 정직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키퍼와 브릭이 감추고 있는 허위를 참지 못해 둘 사이에 끼어든 마가렛은 자신의 실수가 치명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진실한 대화를 나누려 하지만 브릭은 온몸을 던져 혐오를 드러낸다. 마가렛은 "불 난 집에 들어앉아 살려달라고 외치는" 자신을 향해 브릭이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사회가 규정한 가치의 틀과 내밀한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설 곳을 찾지 못한 브릭이 다른 누군가를 구원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마가렛은 말한다. "어떨 땐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게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한다면 말이죠."

연극'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공연 사진./사진제공=예술의전당

허위와 가식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사랑과 정직을 통한 포용"이라고 생각했던 윌리엄스는 마가렛으로 하여금 브릭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을 선포함으로써 가족 간의 모든 갈등을 종식시키도록 만든다.

남편의 허위와 위선을 벗겨내고 진실과 직면토록 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이어나가고자 애쓰던 마가렛이 정작 가장 큰 '거짓'을 말하고, 가족들 모두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믿는 척 넘어가는 아이러니는 관객들에게 씁쓸함을 남긴다. 하지만 희망은 남겨진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인 마가렛은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가렛은 브릭을 향해 말한다.

"당신과 같이 연약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붙잡아 줄 누군가예요. 부드럽게 사랑으로 안아줄 사람 말이에요! 사랑해요, 브릭!" 브릭은 대답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 웃기지 않아?"

서정성이 담긴 테네시 윌리엄스 극에 익숙한 관객이나 사랑을 애원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마가렛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으나 문삼화 연출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는 고전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을 끌어안기 위한 한국식 해석을 더해 욕망과 위선, 갈등으로 얽힌 한 가족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갈등의 극복과 화해는 가족이기에 더욱 어려울 때가 있다. 언제나 우리가 가족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해와 응원, 도움의 손길이지 진실, 혹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늘 정반대로 행동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진실을 요구하고,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힐 줄 알면서도 충고를 말하며, 조언이라는 옷을 걸친 비난의 화살을 던진다. 우리는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으로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견뎌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견뎌주는 것'이 곧 함께 하는 것이며, '인정하는 것'이 곧 수용하는 것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가족은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뜨거운 양철 지붕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들이 떨어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등에 기대어 끊임없이 펄쩍거리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것, 그 뜨거움을 '견뎌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