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으로 인한 분노, 그 끝은 어디인가?
절망으로 인한 분노, 그 끝은 어디인가?
  • 주하영
  • 승인 201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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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연극 '미국 아버지'
연극 '미국아버지' 장면/제공=극단 이와삼
연극 '미국아버지' 장면/사진=극단 이와삼

[인터뷰365 주하영]한 아버지가 있다. 아들의 죽음장면이 전 세계에 공개됨에도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의 고통과 슬픔, 절망과 분노의 깊이를 우리는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9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세 번째로 재공연 무대에 오른 '미국 아버지(장우재 작·연출)'는 2004년 이라크에서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공개 참수된 닉 버그의 아버지 마이클 버그를 모델로 하여 창작된 연극이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우재는 마이클 버그가 영국전쟁저지연합에 보낸 편지를 읽고 절망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주인공인 빌은 베이비 붐 세대로 성장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편승해 한 때 월스트리트에서 일했지만, 현재 마약 중독자로 전락해 아들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패배자이다.

빌은 자신이 권력과 자본의 주체들에 의해 이용만 당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대신했을 뿐임에도 부패의 원흉이 아니라 대리자인 자신이 몰락하게 된 불공정한 현실에 분노한다.

그의 아들 윌은 세계화를 이루어 낸 미국의 젊은 세대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월스트리트의 증권맨이다. 현재 윌은 아랍계 여성과 결혼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 아내 헤바의 가족이 친척에게 송금한 돈이 테러단체로 흘러 들어간 정황이 포착되자 윌은 태어날 아기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주기 위해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떠날 것을 선언하게 된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의 추악함에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그 세상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더 많이 돈을 버는 것"이라 주장하는 빌에게 윌의 선택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미친 짓'이다. 자본의 세상이 규정하는 성공한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봉사의 길을 가겠다는 아들의 선언은 빌에게 지나치게 순수한 영혼이 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비난하고 자본과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을 저주하는 아버지를 향해 윌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만든 가치는 우리를 구할 수 없어요. 우린 우리 스스로 각자만의 가치를 만들어야 해요."

그렇게 떠난 아들이 오로지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행해진 무참한 폭력의 희생양이 된다. 친구를 돕기 위해 이라크로 간 아들이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참수된 것이다.

아버지인 빌이 느끼는 분노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빌을 잠식한다. 죽은 아들을 살아 돌아오게 만들 수도, 세상을 향해 복수를 할 수도 없는 빌은 폭주한다. 제대로 표출할 대상조차 찾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분노는 아랍계 며느리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총으로 무장을 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광기로 변질된다.

연극 ‘미국 아버지’의 한 장면. /사진=극단 이와삼
연극 ‘미국 아버지’의 한 장면. /사진=극단 이와삼

절망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빌은 또 다시 마약을 향해 손을 뻗는다. 환각에 사로잡힌 빌 앞에 나타난 윌이 말한다. "난 불행하지 않았어요. 그저 세상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을 뿐이예요. 아프더라도 진실을 마주해야 해요." 빌이 대답한다. "난 그런 진실 따윈 인정할 수 없어. 그걸 인정하면 난 무너져. 그럼 난 아무것도 아니야."

최근 몇 년간 세계는 '분노'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하하고,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혐오하며, 모든 불행이 그들의 탓이라 외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총을 발사하고, 인도 한 복판으로 차를 몰고 돌진하는가 하면,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폭탄을 설치하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은 왜 이토록 분노하는가?

일자 샌드는 "분노라는 감정에도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노라는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다.

분노를 일으키는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결국 분노라는 감정의 뿌리는 자신에게 가해진 상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윌은 아버지의 분노가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다. 젊은 시절 자유와 평화, 사랑과 평등, 정의를 외치던 히피들을 동경하고 열망했던 순수한 자신을 버리고 성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본의 논리에 편승해 부정한 선택을 해 온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은 자신의 분노를 들여다볼 수 없기에 환각을 통해 끊임없이 젊은 시절의 자신과 조우하고 첫 사랑 낸시와 만나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지만 정작 현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자신과 직면하지 못한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분노를 이해한다한들 그 분노를 종식시킬 정의를 실현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원래 자기보호를 위한 방어기제의 감정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 처해졌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아 폭력적이 되는 순간의 감정, 그것이 분노인 것이다. 즉, 분노는 에너지이다. 때문에 어디론가 표출될 곳을 찾을 수밖에 없고, 예측 불가능한 사고나 상황으로 인해 부당함을 느낄 때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자신을 불사를 정도의 크기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에 따르면, 분노는 '정의를 향한 욕망의 감정'이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부당함과 불공정함 속에서 인간이 느끼게 되는 불편한 감정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현되는, 정의를 갈구하는 역설적 표현인 것이다.

결국 아버지인 빌이 느끼게 되는 분노의 크기는 사실상 불공정 속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마음의 크기라 할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세상과 시스템에 의해 희생된 아들을 앞에 두고 절망 속에 무너져 내리는 빌은 환각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죽여야 할지 아니면 실체로 보이는 환영들을 죽여야 할지 고민한다. '사람은 정상인데 세상이 비정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연극 '미국 아버지'는 실제 모델이 된 마이클 버그처럼 용서하는 일에 실패하였으므로 "이 연극은 실패하였다."라는 나래이션을 남기고 끝이 나지만 연극 속 미국 아버지인 빌은 용서하는 일에 실패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관객들이 분노의 정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의 시작이 어디인지, 분노의 끝은 어디인지, 분노를 넘어설 수 있는지, 관객들은 가늠하고 예측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분노 그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고, 결국 용서를 택한 마이클 버그의 선택을 인정조차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연극 '미국 아버지'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빌의 분노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가를 생각해보길 권한다. 용서의 결과를 낳든 누군가를 응징하고 정의를 세우는 결과를 낳든 분노의 끝은 오직 그 시작점을 알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극 '미국 아버지'는 마이클 버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힘없는 한 개인이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느끼는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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