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사람.
기자, ‘가지 않은 길’을 꿈꾸는 사람.
  • 김세원
  • 승인 2008.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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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되고 싶다고? 사주가 어떤데요?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얼마 전 집안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CD 한장을 발견했다. ‘이게 뭐더라?’그리고 그 음악을 들을 필요도 없이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속의 삽화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일이다. “엄마, 팝송 좋아하지?” 어느 날 아이가 유치원에서 선물로 받은 거라며 CD를 가져왔다. 같은 반 여자 아이가 생일선물 답례품으로 자기 아빠의 추모 음반을 나눠줬단다. 나이도 젊을 텐데 추모 음반이라니... 마침 신문사 문화부에 근무할 때라 호기심이 당겼다. 재킷에는 생전의 그의 사진과 연보, 음반에는 그의 육성과 그가 좋아했던 음악들이 들어있었다. 미국 유학시절 만난 여학생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성격차로 이혼하고 남자는 독립영화 제작에 몰두했었다라고 적혀진 연보. ‘Free as the wind' 라는 팝송 제목에서 따온 이 CD의 타이틀처럼 짧지만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다간 한 남자의 삶을 정리한 연보를 읽다가 마지막 구절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받았다. ‘1996년 9월 O일. 신촌에서 화재로 사망.’



신촌의 한 록카페에서 불이 나 열두 명이 사망하고 십여 명이 화상을 입은 대형 화재가 발생했던 96년 추석 다음날 밤, 나는 사회부의 야근 기자였다. 야근하는 날이면 항상 사회면 톱을 바꿀만한 사건 사고가 마감 시간이 임박해 발생하는 바람에 사건을 몰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던 터였는데 그날 밤도 예외는 없었다. 데스크가 막 퇴근하고 45판 기사를 마감한 밤 11시 35분 경찰기자로부터 신촌에서 화재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지역 소방서로 전화를 해보니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대형사고란 생각이 들었다. 소방본부에선 카페 출입구가 좋아 사상자가 많을 것 같다고 했다. 사상자들이 가장 많이 수송된 연세대 병원으로 차를 몰고 내달렸다.



응급실 밖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상자들의 가족과 친구들, 언론사 기자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불이 나기 직전 카페를 나왔다는 사람들은 현장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전화를 하기위해, 술을 많이 마셔서 등의 이유로 그들은 먼저 카페를 나왔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단 몇 분 차이의 우연에 의해 갈리는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내내 삶의 허망함이 가슴을 쳤다.



화재가 났을 때 젊은 예술가들의 모임과 연세대병원 레지던트모임이 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회사에 보고한 뒤 사상자 신원 확인에 들어갔다. 화상 사망자는 심할 경우 신원은 물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기가 힘들어 취재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현장에 있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3도 화상을 입고 마지막 순간까지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태웠던 사람이 바로 추모 음반의 주인공인 L씨였다. 기자들의 응급실 출입이 금지돼 흰 가운 입은 사람이 나올 때 마다 생사를 확인하느라 발을 동동 굴렀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정확한 사상자의 신원을 최종 마감시간 전에 알아내는 데만 매달렸다. 산 사람을 사망자 명단에 포함시키거나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면 치명적인 오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며 당사자가 겪었을 끔찍한 고통과 남은 가족들의 아픔은 관심 밖이었다.



‘L씨. 나이:34. 직업: 영화감독’란 한 줄 글귀로만 존재했던 미지의 인물을 죽은 뒤 6개월이 지나 서야 온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대면하게 된 기막힌 우연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이 ‘사건’은 나에게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비정해야 하는 기자란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어쩌면 배우와 기자는 닮은 꼴이다. 간접적으로나마 여러 가지 삶을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다른 배역을 맡을 때마다 무대에서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해 철저하게 극중 인물의 삶을 살아낸다. 기자는 맡은 취재 분야에 따라 경찰서를 돌며 사건사고를 취재하다가 과학부로 발령이 나면 하루아침에 개기일식과 화성탐사 우주선 기사를 쓰게 된다. 경제부에서 정보기술업계의 동향을 추적하다 문화부에서 연예인의 행보를 쫓기도 한다. 물론 외교통상부를 출입한다고 외교관이 되고 종교를 담당한다고 하루아침에 성직자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세상사의 이구석 저구석을 들여다보고 관련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들을 닮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맡은 분야에 따라 성격과 행동마저 달라지게 된다. 경찰기자 때는 성말랐다가 출판을 맡으면 현학적이 된다. 그래서 ‘기자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나요?’ 하고 누가 내게 물을 때 나는 늘 이렇게 답한다. “사주에 역마살이 끼었다는 판정을 받았거나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많은 사람, 다양한 직업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기자직을 염두에 두라고.”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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