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어진화가 한지민'의 진짜 모델, 이당 김은호
드라마 <이산>‘어진화가 한지민'의 진짜 모델, 이당 김은호
  • 김두호
  • 승인 2008.03.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였던 이당과의 추억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MBC 월화드라마 <이산>에서 드라마의 한 축을 이어가는 여주인공 성송연(한지민)은 궁중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리는 다모로 등장한다. 나중에 성송연은 이산(정조/이서진)의 후궁 의빈 성씨가 되어 왕자(문효 세자)를 낳게 된다. 드라마에서 성송연이 이산의 아버지 영조(이순재)에게 불려가 빈 방에서 조용히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을 그리는 과정은 매우 사사롭고 단순하게 묘사되었다. 물론 그 장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드라마를 굳이 역사적 사실과 연계해서 문제를 지적할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고 제사를 올리기 위해 행차하는 화성능행차도 같은 그림만 보아도 당시 궁중 도화서의 역할과 임무가 막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도화서의 화공들 중에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사람, 옛 명칭으로 어진화사(御眞畵師)에 대한 이야기라면 조선조 마지막 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화백의 실존 체험담을 빼놓을 수 없다. 현대 한국화의 큰 길을 열었던 이당은 1892년 고종 29년 경기도 문학(지금의 인천시 관교동)에서 태어나 1979년 2월 87세 되던 해에 별세하셨다. 타계하기 바로 한 해전인 1978년 3월 이맘 때 인터뷰를 통해 증언한 역사의 마지막 어진화사의 생생한 체험담을 소개한다.


이당은 1911년 3월에 시작한 일종의 미술학교인 서화 미술회에 들어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의 문하생으로 수묵화와 채색화를 배웠다. 시작부터 스승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천재 화가로 소문이 났다. 고종황제를 모시던 전의(典醫) 김창유와 김상궁이 평소 일본인 화가가 어진을 그리는 데 못마땅해 하는 임금께 천재화가가 있다는 소문을 올렸다. 고종은 손수 자신의 사진을 김상궁에게 건네주고 그려오도록 했다. 이 부문에서 이당은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비단 보자기에 싸온 덕수궁 전하(당시 고종황제가 덕수궁에 머물러 그렇게 칭했다)의 어용을 아주 질 좋은 종이에 정성들여 옮겨 묘사했지. 완성을 하자 불안해 하고 긴장해 있던 선생님들이 먼저 감탄을 했어. 나도 그제야 안심을 하고 내가 그린 어진 모사본을 전의를 통해 덕수궁에 올렸지.”


그림을 본 고종은 만족한 뜻을 이당에게 전하게 하고 윤비(순종황제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尹德榮)을 불러 “지금 내 초상을 그리는 일본 화사를 당장 물리치면 그들이 말썽을 부릴 것이니 먼저 그 젊은 화가(이당)를 창덕궁으로 데려가 그리도록하라”고 하명했다. 시대적 사정을 감안한 고종의 세심한 작전이었다.


마침내 공식 어진화사로 활동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매주 목요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순종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고관대작 신료들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찬이 끝나고 차를 마시는 시간에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시종장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참석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는 가운데 순종은 특별히 마련된 용상에 앉았다. 이때 윤덕영의 동생이며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尹澤榮/ 해풍부원군)이 형을 대신해 미리 데리고 온 이당을 이끌고 재빨리 순종 앞으로 다가갔다. 기억력이 좋은 이당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해 냈다. 윤택영은 순종에게 “전하, 덕수궁 전하께옵서 보내신 화사이옵니다. 전하의 어진을 봉사(奉寫/ 받들어 그림)케 하시라기에 데리고 왔사옵니다.” 라고 아뢰었다. 순종은 젊은 이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따뜻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그럼 나를 자상히 보아야 하겠구나. 저기 밝은 창가로 갈까?”라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이 떨리다가 굳어 있었던 이당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가 긴신이 심호홉을 하고 뒤를 따랐으나 발걸음이 후들후들 떨리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날은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으나 이튿날 창덕궁에서 가져온 관복을 입으면서 조금씩 본정신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소매가 짧은 소례복(小禮服)에 사모(紗帽)를 쓰고 순종전하의 어진봉사에 착수했지. 나보다 먼저 어진을 그린 바 있는 스승(소림과 심전선생)의 말씀을 들어가며 창덕궁 인정전에 있는 동행각(東行閣)의 넓은 방에서 평상위에 백전(白氈/ 흰담요)을 펴고 그 위에 홍전을 또 깔았지. 홍전위에 비단을 고정시킨 그림틀을 올려놓고 틀 바로 밑에 크기가 똑 같은 백전을 또 깔았지. 황제전하는 나의 초본이 완성될 때까지 매일 한번씩 나오셔서 20분 가량 용안을 보여주셨어. 그때마다 별로 말씀이 없으셨으나 가끔 네 얼굴이 잘 생겼구나, 어린 네가 어찌 그림을 그리 잘 그리느냐? 시며 덕담을 하시고 손목을 어루만져 주셨어. 작업을 끝내고 스승께 그런 보고를 드리면 임금이 만지신 손목에는 은으로 만든 토시를 만들어 팔목에 끼고 사는 법이라고 부러워 하셨지.”


순종의 어진 초본(초벌 그림)에는 특수한 기름종이에 생강즙을 먹인 기름종이가 사용됐다.묵선으로 어용의 윤곽을 잡은 후에 대원수의 군복차림을 한 상반신으로 전체 구도를 형성했다. 임금의 피부색은 반투명 유지배면(油紙背面)에 곡선을 맞추어 채색했다. 이당은 말했다. “나의 초본은 전하와 모든 사람들에게 격찬을 받았어. 경험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그린 작업이 제법 큰 솜씨로 인정을 받았으니 기뻤지. 나는 도를 닦는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 초본을 비단밑에 붙이고 어진 제작에 들어갔어.”


그러다가 1912년 순종의 처조모(윤비의 조모)가 작고하여 잠시 어진 제작이 중단됐으나 이듬해 봄 작업이 재개됐다. 창덕궁 찬방(饌房)에서 특별상을 대접받으면서 일했고 때로는 윤비(尹妃)와 왕실살림을 총괄하는 민병석 이왕직장관이 특별음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당은 노모가 대궐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해 하고 자식 잘 둔 것을 자랑했던 때를 흐뭇하게 기억했다. “순종 전하의 어진은 4개월 만에 완성했지. 왕실에서는 폐백(화료)으로 4천원의 거금을 주었지. 쌀 한가마 4원할 때인데 쌀 1천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니 거액이었어.”




이윽고 고종황제의 어진을 봉사(奉寫)할 시간이 찾아왔다. 고종은 어느 날 덕수궁으로 서화미술회 선생과 학생들을 덕수궁으로 불렀다. 한때 어진화사였던 소림과 심전을 가까이 불러 “많이 늙었구나”라며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시종장을 불러 “김은호라는 청년이 누구냐”고 물었다.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고종은 앞에 선 이당을 향해 “얼굴을 보니 재주가 있겠구나. 어떻게 하여 그리도 그림 솜씨가 좋으냐?”고 칭찬했다.


이당은 곧 매일같이 덕수궁 준명당(浚明堂)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했다. 무너져 가는 왕조의 고독한 황제는 곤룡포를 입고 하루 10여분씩 이당 앞에 나와 그늘을 감춘 밝은 미소로 시선을 마주했다. 황제는 간혹 “어쩌면 살결이 그렇게 고우냐? 볼수록 예쁘구나.”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가 시종장 이필균을 불러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화사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다 주어라고 야단을 쳤다. 이당은 버드나무로 만든 연필로 초를 잡아가며 스케치한 유탄화를 바라보다가 용포가 끌리는 소리도 감추면서 소리없이 자리를 떠났다. 고종의 어진도 4개월만에 완성되었다. 궁중 표구사가 금빛으로 만든 족자는 비단으로 싸서 오동나무 상자에 곱게 넣어 역대 어진 봉안소인 선원전에 봉안되었으나 6.25때 소실되었다.


이당이 어진화사로 대궐에 불려 다닐 때 하루는 순종황제가 그를 창덕궁으로 불렀다. “어진을 그린 화사에게 벼슬을 내리는 법인데 시절이 좋지 않아 예우가 소흘하구나”라며 따뜻하게 위로하고 대신 비원에 특별 잔치상을 마련해서 대접해주었다. 이당은 그로부터 어진을 그린 화가로 이름을 떨쳐 민영휘 윤덕영 등 당대 세도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해방 후에는 신사임당 이율곡 이순신 논개 등의 영정도 남겼다. 봄볕이 따사롭던 1978년 3월 어느 날 이당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 1937년부터 41년째 살고 있던 한옥집 이묵헌(以墨軒)에서 감기 몸살을 앓아 수척해진 모습으로 역사에 묻어있는 자신의 기록들을 들추어냈다. 그로부터 꼭 1년을 더 사셨다.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