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의 손녀라고? 반골의 피는 어쩔 수 없군.”
“독립운동가의 손녀라고? 반골의 피는 어쩔 수 없군.”
  • 김세원
  • 승인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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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여전히.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지금은 세상에 없는 어머니는 일제시대 두만강 국경지대와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외할아버지가 의용군을 일으켜 무장 독립투쟁에 투신하는 바람에 어릴 때부터 궁핍한 집안 살림을 돌봐야 했다. 두만강에 얼음이 얼면 개썰매를 타고 두만강을 오가며 중국에서 그냥 버리는 강아지를 가져다 함경도에 팔고 함경도 바닷가에서 소금을 사서 만주 내륙지방에 팔기도 했다.



열 두 살 짜리 국경 무역업자



마적이 출몰하는 장백산맥 자락의 거친 황야를 단신으로 누비던 열 두 살 소녀에게 아버지는 1년에 몇 번, 도둑같이 한밤중에 담을 넘어 들어왔다가 날이 밝기 전 사라지는, 서먹서먹한 존재였다. 아버지가 몇 번 다녀가고 나면 동생들이 태어났다. 막내 여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였다. 아버지를 채장군이라고 부르며 집에 쌀과 고기를 가져오는 중국인들을 통해 아버지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했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만주 생활은 두만강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한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처럼 이국적이지도, 김동인의 단편 <붉은 산>처럼 비장미가 흐르지도 않았다. 콧물을 흘리면 그대로 고드름이 돼 버리는 영하 30도의 혹한에 얼어죽은 아편장이들의 시체가 길거리에 방치돼 있고 사냥꾼이 호랑이 고기와 뼈를 팔며 사람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판 ‘불량만두업자’를 처형해 머리를 성문에 걸어놓는 야만적인 곳이었다.



그런 만주벌판을 떠돌며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던 외할아버지는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 때문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되어야 했던 외할머니는 수시로 집에 찾아와 외할아버지의 소재를 불라고 다그치는 일본군들의 고문 후유증으로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자립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그나마 독학으로 만주의 간호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지는 못했다. 일본군이 앗아간 부모를 대신해 소녀 가장이 되어야 했던 어머니는 해방이 되자 열 살 아래 여동생을 데리고 귀국했다. 어머니의 신산한 삶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했던 대다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



몇해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올해 전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22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후손 10명중 8명이 고졸 이하 학력이며 후손 10명중 6명은 직업이 없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자신의 생활 수준이 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자가 59.4%였고 현재 직업이 없다는 응답자도 58.2%에 달했다. 가난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했고 배움의 기회가 적다보니 변변한 직업 없이 연금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의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는 3대가 떵떵거리며 살지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입증된 셈이다.



대학교의 이념 서클을 섭렵했으면서도 친일파를 단죄한 북한 정권은 정통성이 있고 친일파를 중용해 건국의 공로자로 둔갑시킨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이 없다는 선배들의 주장을 반신반의했다.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명예와 애국심을 정신적인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에게 돌아온 말은 ‘반골의 피’



1980년 가을, 나는 전두환 집권 반대 시위 모의 음모에 연루돼 정보과 형사들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두 명의 형사가 집안에 들이닥쳐 책꽂이와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금서를 소지하고만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들어가던 시절, 자본론 영인본을 친구에게 빌려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구둣발로 안방을 박차고 들어온 형사들에게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딸을 연행해가는 형사들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독립유공자 유족입니다. 저 아이 외할아버지가 독립군 중대장이었습니다”



그러자 형사중 한 명이 조소하듯 말했다. “역시 반골의 피는 못 속이는군.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라니.” 선처를 기대하며 말했던 아버지는 물론 당사자에게도 형사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친일 세력이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는 애국자가 아니라 체제의 안정을 위협하는 반골이요, 그 후손은 불온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잠재적 위험인물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 고통스럽게 가슴을 쳤다. 그후로 오랫동안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당신 자신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파탄에 빠뜨리고 후손에게는 가난과 피해의식만을 물려준 외할아버지를 원망했었다.



카인의 후예와 아벨의 후예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상황논리에 충실해 시류를 쫓는 상황론자와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을 따르는 원칙론자가 그들이다.


일제식민지배 기간 동안에도 외할아버지같은 원칙론자와 훗날을 도모하며 현실에 타협하자는 상황론자와의 갈등은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국광복을 부르짖으며 독립운동에 나섰던 지식인들도 을사보호조약까지 치면 40년 동안이나 식민통치가 지속되자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중 몇몇은 자신과 가족의 영달을 위해 해방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반 대중을 회유하는데 앞장섰을 것이다. 온갖 상황논리를 들이대며 해방의 그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니 현실을 인정하고 일제에 협력하라고 말이다.



원칙론자들이 의지를 꺾지 않았던 것은 변절했던 어느 원로 화가가 말한 것처럼 일제의 공작 대상이 될만큼 유명세를 타지 못했거나 무식해서 정세 파악이나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원칙론자들의 독립운동은 고착된 식민통치 체제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요즘처럼 경제도 어려운데 과거사 규명문제를 다시 들고 나오는 것 역시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고 소모적인 정쟁을 야기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멀리 내다보자. 시선을 멀리 보내면 전혀 다른 풍경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상황론자와 현실주의자들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세계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적 과제가 산적해있는데 과거사를 잊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경제를 살려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는 화합은 불가능하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변방으로 밀려나 있고 나라와 민족을 버렸던 이들이 새 국가 건설의 공신으로 뒤바뀌어 있는 역사 아래서 어떻게 ‘카인의 후예’와 ‘아벨의 후예’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겯고 함께 같은 길을 갈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과 한국의 이승만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어 타국에 점령당했던 과거사의 청산이란 과제를 떠맡았으나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언론의 경우만 보더라도 총 900여종의 프랑스 신문 잡지가운데 나치협력 전과가 있다고 인정되는 694개사가 폐간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드골대통령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치협력자 청산작업으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이 1만8000여명에 이른다고 밝혔을 정도다.



해방 후 6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후손에게 조상의 잘못을 묻자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뒤바뀐 역사만큼은 60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지나도 바로잡아야 한다. 어느 누군가의 개인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 이끌어가야 할 민족사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시간에 묻혀진 과거사는 결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가 계속되는 한,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3월이 되면 내 몸 한 구석에서 흐르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피’ 어쩌면 ‘반골의 피’가 유독 나를 뜨겁게 만든다.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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