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부겸 전 의원이 대구로 내려간 까닭
[인터뷰] 김부겸 전 의원이 대구로 내려간 까닭
  • 김두호
  • 승인 201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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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과 상생의 정치에 승부수 던졌다

내년 총선에도 대구 수성감 지역에 출마하겠다는 김부겸 전 의원.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인터뷰365가 정치인 김부겸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예술 문화 교육 분야의 인물이나 롤 모델이 될 만한 전문 직업인을 주로 인터뷰이로 선정해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소개해온 인터뷰365가 정치인 김부겸을 만난 것은 지역주의 정치의 뿌리 깊은 적폐(積弊)를 해소하겠다는 그의 담대한 도전의지가 차츰 우리 정치문화의 비전으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김부겸 전 의원은 말 그대로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한 토박이 TK(대구 경북)출신이지만 호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정당(새정치연합)에서 3선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해왔다. 4선이 보장된 경기 군포지역구를 포기하고 소속 정당의 불모지인 대구 수성갑 지역구를 선택해 한차례 낙선하고 이어서 대구시장 선거전에도 새정치연합의 이름으로 뛰어들어 고배를 마셨으나 그의 득표율이 예상을 넘어선 박빙의 결과로 나타나 정치권을 놀라게 했다. 지금 그의 초심과 의지는 변함이 없다. 내년 총선에도 대구 수성갑에서 두 번째 출사표를 던져놓고 있다.

김부겸 정치인의 행보는 새누리당 소속의 호남 출신 이정현 의원이 역시 새누리당의 불모지인 호남의 고향지역으로 내려가 당선된 것보다 더 넘어서기 힘든 변화와 개혁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대구 수성갑 지역구는 TK의 정치 1번지로 일컫는 곳이다. 당선에 이를 경우 지역주의 정당정치를 뒤집는 분기점이 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결과와 관계없이 그가 선택한 파격적인 도전은 부패와 분파, 반대를 위한 반대와 지역 색깔로 국민의 불신을 받아온 대한민국 정당정치의 꼬인 매듭을 풀고 추한 정치문화를 세척하는 정화운동(淨化運動)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어서 기대를 모으게 한다. 7, 80년대 민주화 학생운동으로 아픈 청춘을 보내고 국회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을 거치는 등 의회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해온 김부겸 정치인이 탈(脫)지역주의에 정치생명의 승부수를 던지기까지 겪고 보고 느낀 삶의 비화를 들었다.

최근 KBS가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두개의 분단, 하나의 통일>의 초청인사로 독일의 통일과정을 둘러보고 온 것으로 알고 있다.
KBS와 국가보훈처가 함께 주관한 행사였다. 독일이 통일 이후 25년간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를 구 동독지역의 중심지였던 라이프치히와 동베를린, 드레스텐 지역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접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만나 본 동독 쪽 시민들과 지도자들이 다같이 통독이 되기 전까지 분단은 강대국들에 의한 것이므로 통합은 언젠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고백이었다.

현재 동 서독지역의 임금 격차는 동독지역이 서독지역의 약 80% 수준을 받고 있지만 통일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시민들은 인간의 행복과 삶의 충일감, 자유 등은 물질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구 동독 지도자는 동독이 무너진 이유를 여행의 자유를 갈망하는 민심을 읽지 못한 점을 꼽기도 했다. 또 공산권에서도 비교적 잘 사는 나라로 알려진 동독이었지만 자신들의 차량이 아우토반에서 100km를 달릴 때 서독산 자동차들은 200km로 질주하는 것들을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면서 흡수 통일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인식이 변화를 앞당긴 것으로 밝혔다.

그렇다면 우리의 처지는 어떻게 통일로 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도 언젠가는 통일이 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식하되 공존의 단계와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조금씩 꿈을 확장해 가며 끈질긴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분단국가는 양쪽의 지도자가 누구이든 통일의 선택은 결국 국민들이 하게 된다는 것을 독일의 통일 사례가 입증했다. 우리의 통일도 240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신뢰를 주는 정성이 필요하다. 서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자유를 찾는 동독의 정치범 20만여 명을 돈을 주고 맞아들이는 정책(Buying Freedom)을 착실히 추진했다.

구 동독 정권의 마지막 리더인 한스 모드르 수상도 만났다는데.
그는 한 때 동독을 통치하는 절대 권력의 마지막 정상이었다.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진보정당의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는 아주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당시 수상인 자기도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기가 어려웠다고 기억했다. 절도 있는 철수나 단계적인 변화를 생각했지만 몇 달 사이에 국민들이 장벽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했고 그 누구도 통일을 향한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에도 2012년 제19대 총선 때 낙선한 대구 수성갑 지역구에서 다시 출마하는가?
그렇다. 이제 숙명으로 생각한다. 가야할 길을 정했으니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올인 하겠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가 고향 주민으로 생활 한 시간이 한 4년 지났다.

새누리당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같은 지역에 출마 의향을 드러내 정치권이나 현지 주민들의 비상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예상하지 못했다. 경북고와 서울대 선배이고 운동권 활동에서도 선배가 된다. 고1때 김 선배를 처음 만났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혁명가의 모습으로 많은 인상을 남겨준 선배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친밀감을 느껴왔다. 군포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도지사인 김 선배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돌아온 대구 수성으로 지역구를 선택한 것은 뜻밖이다.

선거도 게임이다. 얼마 전 김문수 전 지사를 의식해 공개편지를 보냈지 않은가?
나도 보도를 통해 김 선배가 대구 수성갑지역 출마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접하고 “낯설고 이해가 안 되는 선택입니다. 이건 잘못된 싸움이 되겠지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정도 지키며 해봅시다”라는 요지의 공개 편지를 페이스북에 올린 일이 있다.

이를테면 정치적으로 적지(敵地)의 한복판에 겁 없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뛰어든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의 무모한 도전으로 여겼다.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 한 여전히 당선이 어렵다고 보는데 본인 생각은?
거대한 개혁이나 변화도 시작은 한 두 사람의 생각과 의지에서 출발한다. 나의 정치 신념, 철학은 통합과 상생에 있다. 대립하는 상대를 부정하거나 소멸 시키지 않고 내 뜻이 옳다는 신념을 보여주며 더불어 공존과 상생의 길을 찾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하루아침에 나의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첫 출마 때 지역구 주민 중에는 내가 본래 호남사람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고 심지어 빨갱이라는 말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나는 조금씩 그분들에게 다가가 김부겸이는 키워주면 지역과 나라 발전에 제 몫을 할 일꾼이 될 것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김부겸 전 의원은 지난 1996년 총선 낙선 후 몇몇 낙선자들과 함께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대립과 싸움은 승자와 패자로 구분된다. 승자가 패자에게 상생의 여유를 보여주는 정치는 우리 정치문화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같이 특별한 신념을 갖게 된 어떤 동기나 배경이 있는가?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10년 선배이면서 정치인으로도 스승이 되어준 빈민운동가 출신 제정구 의원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죽음을 앞둔 1998년 가을, 암투병 중에도 혼신을 다해 국정을 챙기는 모습이 아직도 눈물겹게 다가온다. 그분이 내 마음 깊이 상생정치의 비전을 새겨주고 떠났다.

어떤 비전들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그는 모순과 대립을 통한 세계의 발전이라는 명제는 이제 불가능해지고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정치행태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1세기는 상극이 아니라 상생의 시대가 될 것이므로 화해와 상생, 통합의 정치만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단언했다. 모든 사물, 모든 인간과의 관계를 늘 새롭게 깨닫고 발전시켜 나가야한다는 주장을 나에게 심어주고 떠나셨다.

당신은 학생 운동권 시절에 감옥을 드나든 강경파로 활동했지만 정치권에 들어와서는 온건파로 분류된다. 지역주의 앞에서는 스스로 경계인을 자처했다. 어떻게 보면 색깔이 모호한 정치인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1980년대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분열과 함께 정치권의 지역주의가 정당과 정치인들의 색깔을 구분했다. 출신 지역과 반대편 쪽의 정당에 소속된 나 같은 정치인에게 그것은 고통과 증오의 장벽이었다. 그래서 나의 정치이력은 별종 취급을 받아가며 지역주의와 싸워온 투쟁사로 생각한다.

사실 정의감과 열정으로 세상을 살았던 대학시절이나 재야 단체에서 활동할 때는 강경파였다. 그러다가 정치인으로 들어서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나 극단적인 투쟁, 출신 성분이나 소속 정당의 이익보다 먼저 사리가 분명한 바른 정치인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화두로 삼았다. 때로는 소속 정당의 당론 투표 지시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집단을 의식 않고 내 생각이 옳다고 판단되는 길을 선택해 오해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꼽아 달라.
2003년 2월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북송금특별검사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나는 전날 열린 의원총회에서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국회차원의 진상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표결에서도 당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소수 여당이던 민주당이 퇴장한 가운데 진행된 전자투표에서 재석 162명 중 찬성 158명, 반대 1명, 기권 3명이 나왔다. 반대 1명이 나였다. 어떤 의원은 평양에서 고맙다고 전화 받았느냐는 야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한나라당 당적이었을 때가 있었다.
내가 책을 내면서 제목을 <나는 민주당이다>로 달았지만 나의 출신성분은 TK지만 정치성분은 처음부터 민주당이다. 1991년 제도정치권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 DJ와 이기택 공동 대표 시절의 민주당이다. 이부영 제정구 전의원이 있었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대변인, 이어서 홍사덕 전의원이 대변인일 때 나는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6년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과천의왕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총선에 참패한 민주당은 1996년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했다. 김원기 노무현 박석무 김정길 제정구 유인태 원혜영 이철 선배 등이 참여한 통추에서 나는 막내였다. 그때 바닥 인정도 접하고 재정에도 보태겠다고 모두 함께 출자해서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고깃집을 내고 약 2년간 운영했다.

왜 하필 고깃집 이름이 하로동선인가? 그 후 어떻게 한나라당으로 이어졌는가?
지금은 여름의 화로나 겨울의 부채처럼 쓸모가 없지만 때가 되면 제 몫을 한다고 그렇게 지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통추 회원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직접 고기를 구워주고 함께 술잔을 나누며 당번을 정해 손님을 접대했다.
그러다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자유민주연합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대선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는 회오리 속에서, 조순 서울시장이 민주당 총재 겸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합당을 발표하고 한나라당을 출범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 소속인 통추 멤버들은 서로 가는 길이 엇갈렸다.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선배들은 DJ 쪽에 합류하고, 나는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해 온 제정구 선배와 이부영 이철 박계동 선배들과 민주당에 남아 있다가 한나라당 창당 멤버가 된 것이다.

2000년 총선 때 군포지역구에서 아주 근소한 표차이로 당선되어 화제를 남겼었다.
여론조사에서 나는 도저히 경쟁후보와 겨룰 수 없는 후보로 열세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김부겸이라는 무명 정치인의 진정성을 전하는데 전력투구했다. 마지막 투표함 집계에서까지 밀리고 있다가 개표를 끝낸 최종 집계에서 260표 차로 당선됐다.

첫 국회의원 당선 된 그때의 기분을 돌이켜 달라.
운동권 아들 때문에 오랫동안 서럽게 버텨오신 부모님이 먼저 생각났다. 당당하던 공군 장교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생시킨 아버지께 처음으로 기쁨을 바치게 되어 더욱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당선이 확정되자 아내와 함께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한나라당에서 적응하지 못한 것은 역시 진보적인 정치 성향 때문인가?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해 움직이지만 소수 의견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정치 정당 사회도 마찬가지다. 당론과 다른 의견이나 제안이 나오면 왕따를 시키거나 당을 떠나게 하는 풍토가 우리 정치 문화다. 2003년 7월 나는 이우재 이부영 김영춘 안영근 의원과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그 해 말 민주당 탈당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내가 창당대회 사회를 보면서 우리 당이 한국 정치 역사상 첫 지역주의를 극복한 전국 정당으로 성공해야한다는 결의를 보여주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DJ와 함께(왼쪽), 아주머니들과 유쾌한 수다 중인 김부겸 전 의원.

이제 학생 운동권 시절로 돌아가 보자. 운동권에 적극적으로 뛰어 든 동기가 있을 것이다.
경북고등학교 3학년 때 ‘민청학련’이라는 단체 이름이 등장해 많은 학생과 사회 명사, 정치인들이 잡혀 가는 등 긴박한 시대 변화에 관심이 갔다. 특히 동아일보가 백지 광고 신문을 내며 탄압에 저항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3년 개근에 우등생이었던 나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대학입시를 치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길에 친구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동아일보 광고지면을 사기도 했으니 내 암울한 청년기는 내 스스로 겁도 없이 뛰어들어 자청한 길이었다.

1976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해 정치학과를 졸업한 때가 1987년이었다. 졸업까지 11년이 걸린 셈이다. 군 복무 기간도 있었겠지만 구속, 제적, 복학을 반복했으니 서울대 아들을 두고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한 부모님 고통을 헤아릴만하다.
1977년 서울대 도서관 점거사건, 1980년 계엄령 위반 등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또 나와 관련이 없지만 운동권 배후 인물로 의심을 받아 혹독하게 수사 받은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의 여파로 상경할 때까지 나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광주민주화 투쟁기에도 계엄당국은 10대 현상수배 인물로 나를 포함 시켰다. 재미있게도 수배전단에 나의 인상을 미남형으로 소개했다. 1982년 대구에서 결혼한 아내도 가시밭길을 걸었지만 부모님은 대학 입학 후부터 한 번도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고통을 안겨 드렸다. 충직한 공군 중령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수배자가 될 때 군수사기관에 불려 다니시며 많은 고초를 당하셨지만 강제 전역은 면하고 뒤에 예편하셨다.

투사가 됐던 청년기보다 꿈 많은 어린 시절의 얘기를 듣고 싶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지금도 옛 고을의 인습과 농경문화의 정서가 남아 있는 경북 상주다. 큰 건물도 없고 산천도 변한 게 별로 없다. 나는 그곳의 높은 산인 갑장산 자락 상주읍 오대리에서 해 질 무렵이면 마을 어귀로 나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착한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18살 고고생 때 결혼해 나를 낳았고 장기복무 하사관 생활을 끝내시고 군복무 중 야간대학을 다니신 뒤 다시 공군 소위로 임관해 엄격한 규율 속에서 평생을 보낸 강직한 직업군인이었다.
가끔 어린시절이 그리울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녔던 신작로를 찾아가 향수를 달랠 때도 있다. 마을 가까이 있는 ‘상주남부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가 중학교 입시를 위해 대구로 전학시켰다. 나는 아버지가 입대하신 후 어머니가 돌이 지난 뒤에 출생신고를 해 호적상 만 4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또래 친구들을 따라 학교에 놀러갔다가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조기 입학한 것인데, 덕분에 고입과 대입 두 번 재수를 하고도 동년배와 같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열혈 운동권 시절에 ‘아크로폴리스의 사자후’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녔다는 얘기가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서울대 캠퍼스에 있는 광장을 뜻하지 않는가?
계엄령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1980년 4월말 5월초 이틀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복학생들이 중심이 된 집회가 열렸다. 신입생들의 병영 집체훈련 입소문제를 두고 논쟁이 한참 벌어졌는데, 이날 관악 캠퍼스를 비롯해 수원에 있던 농대와 수의대, 연건동의 의대와 치대, 간호대 학생까지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다. 나는 복학생의 막내였지만 행사를 주관하고 있어서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민주화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학생들마저 눈치를 본다면 군부세력의 집권연장 음모를 막을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우리 각자가 결단해서 열어나가자. 우리가 단결하면 군인들도 총부리를 겨누지 못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열변을 15분 쯤 토했는데, 그 때 현장을 지켜 본 사람들이 나중에 대중 선동의 사자후를 느꼈다며 한마디씩 보탠 것이 그렇게 전해진 것 같다.

얼마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경선을 앞두고 당내에서 대표 출마 소리가 나왔다. 야당을 대표할 수 있는 중진에 이른 일면이다. 그동안 DJ, 노무현 대통령 등 많은 지도층과 시간을 함께하면서 느낀 그 분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려 달라.
DJ는 배려심이 많고 정치적인 안목이 지혜로우면서 섬세한 분이었다. 민주당 부대변인 일 때 일단짜리 작은 기사도 주의 깊게 파악을 하고 격려해주었다. 어느 때는 정성을 표하는 글을 담아 격려금을 주기도해 눈물이 핑 돌게 했다. 내가 사고가 생겨 부대변인직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대선에 패배하고 난 뒤에도 급여를 따로 모아 보내주셨다. 영국에 계실 때는 찾아 온 측근들에게 민주당이 키워야 할 재목 중 한명으로 꼽아주셨지만, 1995년 민주당 분당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그 분을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노 대통령과는 정치적 애환을 오랫동안 함께 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많다. 통추를 함께 하면서 ‘하로동선’을 열어 버텨나가던 일 등……. 때로는 거칠기도 했지만 꾸밈없는 소탈한 인품에 인간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분이었다. 상황을 돌파하는 저돌성이 뛰어났던 그는 간혹 두차례 낙선한 뒤 의기소침하게 지내고 있던 나에게 ‘서울대학이나 나온 놈이 무슨 정치를 그래하노’ 라며 격려의 핀잔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과도 별로 눈에 뜨이지 않게 따뜻한 소통을 나누어왔다. 국회에서 40대 의원 모임을 하면서 노래방에도 함께 가는 등 정치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친하게 지냈다. 동생 박지만 회장이 워커힐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하객으로 참석했더니 (당시 여권 내에서 참석자가 없어서 그랬는지) 나를 보고 여길 어떻게 오셨느냐고 깜짝 놀라면서 맨 앞 테이블에 박준규 의장, 박태준 회장님과 함께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박의장님을 비롯한 그 원로들께서 ‘이 사람아, 정치를 이렇게 해야지. 자네 이제 밥값 한 거야.’라며 기뻐하셨다.

김부겸 전 의원은 인터뷰365와 세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도전에 대한 의미들을 밝혔다. 사진 왼쪽은 인터뷰어 김두호.

가족 얘기를 듣고 싶다. 따님(탤런트 윤세인)이 선거 때마다 열정적인 선거운동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는 고등학교 친구이면서 민주화 운동 동지였던 이영재 목사의 동생(이유미)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1979년, 대구로 내려가 있을 때 이 목사와 자주 만나다가 한국은행 대구지점에 근무하던 아내를 만났다. 내가 수배중일 때면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며 공포 속에서 지내기도 했고 오랫동안 집안 살림도 도맡아 했지만 불평없이 살아와주어 평생 갚아야 할 빚이 많다. 딸 셋 가운데 둘째 딸 지수는 정치인인 아버지의 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예명을 윤세인이라고 지었는데, 선거에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어 내가 얻은 많은 득표가 딸 덕분이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 전 외국계 은행 직원과 결혼했다. 막내딸은 대학생이다.

꿈이 이루어지를 기대한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간단하게나마 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강하고 힘센 자들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한테 교만하지 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맞도록 해달라는……. 내가 던진 정치 생명의 마지막 승부수가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출마하고 또 출마하다가 낙선하고, 그러다가 정치적 생명이 다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때까지 꿈을 버리지 않겠다. 그래야 우리 후배들이 기대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라도 만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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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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