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세이] 냉소로 자신을 방어하고 독설로 타인을 해체하는 196분의 끝장토론 ‘윈터 슬립’
[시네세이] 냉소로 자신을 방어하고 독설로 타인을 해체하는 196분의 끝장토론 ‘윈터 슬립’
  • 김다인
  • 승인 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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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윈터 슬립' 서재에서 아이딘과 여동생의 끝장토론 장면(위), 촬영 중인 누리 빌제 세일란 감독(아래)

【인터뷰365 김다인】‘윈터 슬립’ 이 영화는 보러 가는데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3시간16분 동안 허리가 아프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196분 동안 주인공 아이딘과 투샷만 걸리면 반드시 펼쳐지는 철학적 토론에 귀 기울일 호기심이 필요하다.


스산한 들녘 바람이 낮은 풀들을 휘감싸며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는 가운데 마치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아이딘(터키어로 ‘계몽된 지식인’이라는 뜻이라 한다)이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진 오셀로 호텔의 주인이자 전직 연극배우이며 지방신문에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이다. 또 마을의 집에 세를 놓는 지주이기도 하다.


마치 바위를 파고 만든 듯 자연 속에 묻힌 오셀로 호텔 주인 아이딘의 삶을 뒤흔드는 첫번째 진동은 집세를 오랫동안 못낸 세입자의 아들이 트럭에 돌을 던져 창문을 깬 것이다. 이 일은 지주와 세입자, 지식인과 노동계급의 대치라는 오래된 사회적 명제를 이끌어가며 ‘기부가 곧 삶’인 아이딘의 아내 니할의 눈물로까지 이어진다.


겉으로는 공정하고 품위있는 지식인 모습을 하고 있는, 25년 동안 연극 하면서 드라마는 한 번도 하지 않은 게 자랑인 아이딘은 “내 왕국이 작을지라도 내가 왕”인 사람이다. 호텔에 묵은 여행객이 홈페이지에서 말이 있는 것을 봤다고 하자 당장 야생마를 구입하려는 허세도 있으며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결국 도와주지 않으면서) 자랑스럽게 아내와 친구 앞에서 읽어주기도 한다.


영화에서 아이딘의 위선적인 허세를 허물기 위해 끝장토론을 벌이는 인물은 여동생 네즐라이다. 아이딘의 서재에서 20분 가까이 펼쳐지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냉소적인 말들과 독설은 어느 액션영화보다 액티브한, 이 영화의 압권이다. 아이딘이 자신의 내면을 끝까지 방어하며 여동생을 역공하는 장면은 우리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자존심을 건드려졌을 때 하는 행동 바로 그것이다.


영화에서는 이외에도 아이딘과 네즐라와 아내 니할, 네즐라와 니할 그리고 아이딘과 니할 사이의 말싸움이 벌어진다. 이를 토론이라 하지 않고 굳이 말싸움이라 하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감정은 다치지 않겠다는 방어기재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싸움의 주제는 네즐라가 먼저 꺼낸, ‘악인이 악을 행할 때 그대로 당해주면 오히려 참회할 것’이라는 ‘레미제라블’적인 주제를 비롯해. 아이딘이 나할을 공격하는 ‘기부의 허세’ 등이다.

'윈터 슬립'의 마무리에서 주인공 아이딘이 집에 돌아와 아내가 있는 창문을 쳐다보는 장면.


배우들의 움직임과 카메라 워킹은 마치 배우들의 말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최소화 되어 있고 색감도 설경을 기본으로 무채색에 불빛이 전부다. 특히 아이딘이 네즐라의 독설을 반격하며 “네가 내 등 뒤에 앉아만 있어도 등이 얼얼해, 굳은살 박힌 손으로 내 등을 박박 긁어대는 것 같아” 같은 대사는 아이딘의 심경을 절묘하게 나타낸다.


차 유리창을 깨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아이딘의 생각축이 흔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이미지들은 물에서 끌려나오지 않으려 발버둥치다가 지친 야생마, 동물의 사체와 그것을 높은 나무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새떼, 그리고 그가 사냥한 토끼 등이다.

그는 새떼가 노려보는 동물의 사체처럼 될까 두려워 큰 도시 이스탄불로도 떠나지 못하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힘없는 세입자나 토끼를 잡는 나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딘은 아내를 향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의 방식으로 살겠다”고 독백을 하며 웅크려 있던 자신만의 겨울잠(윈터 슬립)에서 비로소 깨어난다.

누리 빌제 세일란 감독의 칸 수상작. (왼쪽부터) '우작' '기후' '쓰리몽키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

‘윈터 슬립’의 시나리오·연출·편집 등을 도맡아한 누리 빌제 세일란(56) 감독은 한마디로 칸영화제가 사랑하는 감독이다. 1993년 첫 연출한 단편 ‘코자’는 1995년 칸 경쟁부문에 선정(터키 단편영화 사상 최초)된 것을 시작으로 ‘우작’(2003)이 5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 ‘기후’(2006)가 59회 국제비평가협회상, ‘쓰리 몽키스’(2008)가 61회 감독상,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2011)가 64회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4년 ‘윈터 슬립’이 제67회 칸영회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윈터 슬립’은 ‘벚꽃동산’ 등 안톤 체홉의 단편 3편을 감독이 15년 동안 자기 속에서 녹여내 비로소 내놓은 작품이다. 세계 100대 경관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인 터키 카파도키아를 배경으로 촬영을 했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눈발과 함께 영화에 흩날린다.


영화의 또다른 영역이 궁금한 관객들이라면 기꺼이 3시간16분을 투자할 만하다.

김다인 interview365@naver.com
인터뷰365 편집국장, 영화평론가.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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