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광풍, <코리안 디바이드>는 포기하는가?
영어광풍, <코리안 디바이드>는 포기하는가?
  • 김세원
  • 승인 2008.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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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경쟁력을 찾을때 까지/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외국어 전공자에게 외국어는 평생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불문학과 대선배는 사무실에 외국인이 방문할 때 마다 혹시라도 불려갈 까봐 화장실에 숨어있었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외국어 전공자의 아픔



필자도 신입사원 시절, 전공을 묻는 사람들에게 불어가 유창할 거라는 기대치를 낮추기 위해 ‘불교문학’이라고 우스개 섞인 거짓말을 하곤 했다. 불교문학(佛敎文學)이나 불문학(佛文學)이나 한자가 같다는 데서 착안한 고육책이었다.



다행히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던 80년대 중반은 지금처럼 영어 실력이 실력을 가늠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국가고시나 대기업 입사시험에 영어가 포함돼 있긴 했지만 독해와 문법 위주였고 요즘처럼 토익이나 토플 성적을 의무적으로 제출하거나 외국인과 대면해야 하는 영어 구술시험은 치르지 않아도 됐다. 직장에 따라서는 오히려 외국어를 잘하면 역관(譯官)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교양과 지성을 연마하고 비전과 리더십을 키워야 할 대학시절, 당장 먹고 살기 위한 실용기술만 익혔다는 일종의 편견이 작용한 탓이었다.



잉글리쉬 디바이드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내놓은 ‘몰입식 영어 공교육’ 방침을 놓고 온, 오프라인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당선인도 비영어권에서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못하는 나라보다 훨씬 더 잘 산다면서 영어 실력이 곧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잉글리쉬 디바이드(English Divide)' 는 ‘디지털 디바이드’가 디지털 혁명 시대에 사회를 정보 소외계층과 네티즌으로 나눠놓았듯 국제화 시대의 새로운 계층구분방식이다. 유아 때부터 영어교육에 투자를 하는 부유층 자녀와 그럴 수 없는 소외계층 자녀 사이에 형성되는 ‘영어 격차’는 학창시절엔 성적의 차이로, 어른이 된 뒤에는 취업은 물론, 취업한 뒤에도 연봉과 승진의 격차를 확대 재생산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추정하는 우리의 영어 사교육 시장 규모는 어림잡아 연간 15조원. 국내 영어 시장 규모는 지난 10년간 10배로 뛰었다. 해외 유학 연수 비용은 대부분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도 작년 토플이 인터넷 기반의 iBT로 바뀌면서 전체 147개국 중 한국은 꼴찌에 가까운 111위로 추락했다. 취업, 입학 등 각종 시험 영어에 몰두하다 보니 해석과 문법은 강한 데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말발은 약한 탓이다.



도대체 왜 한국의 부모들은 ‘펭귄 아빠’ ‘기러기 모녀’로 생이별을 하는 가정 파괴 위험까지 무릅써가며 영어 교육에 목숨을 거는 걸까? 전문가들은 “지식중심 사회가 되면서 영어네트워크에 편입되느냐 여부가 부가가치 창출 능력을 결정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갈수록 영어 구사 능력이 한국 사회에서 신분을 결정짓는 잣대로 굳어지기에 영어공부에 ‘올인’한다는 얘기다.



굳이 영어를 쓸 필요가 없는 분야에서까지 영어를 인재 선별의 잣대로 활용하는 관행도 영어 열풍에 한 몫 한다. 학교에서 국어나 국민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나 회계 담당, 은행원이 되기 위해서도 영어는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 돼 버렸다.


원어민 교사가 지적하는 영어교육의 거품



영어 교육 광풍(狂風)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허실을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은 엉뚱하게도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들이 제기한다. 부천 영어문화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한 외국인은 ‘한국판 트로이 목마(Korea's Trojan Horse)’란 제목의 영자신문 칼럼에서 영어 구사능력이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 줄 것이란 그릇된 믿음이 한국의 영어 교육 시장을 턱없이 부풀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영어를 쓰는 나라는 부유한 나라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으나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처럼 국민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지만 가난한 나라도 적지 않다. 그는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천문학적인 돈과 노력을 영어라는 블랙홀에 쏟아 붓고 있다면서 그 돈을 사회 복지 향상이나 과학 연구에 쓰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국가가 나서 영어교육에 열을 올리더라도 영어와 한국어의 언어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데다 인공적인 환경에서 절실한 필요성 없이 공부하는 것이라 결국 5% 정도만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설사 영어를 잘 하게 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머릿속에 꾹꾹 눌러 억지로 각인시켰던 영어도 빠져나가게 된다.



이렇게 영어 교육 투자의 성과는 미미한데 비해 영어 광풍의 폐해는 심각하다. 영어 몰입교육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영어권 국가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그릇된 관념을 심어줄 수도 있다. 영어에 딸려 들어온 영미식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우리 생활과 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필자는 몇 년 전 영어마을 건립이 유행일 때 영어마을에서 열리는 영어캠프에 가 본 적이 있다. 알다시피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고 교사에게도 선생님이란 호칭대신 ‘샘’이니 ‘제인’이니 하며 이름을 부른다. 선생님과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을 가르치는 예절 교육이나 동 서양의 문화차이를 알려주는 수업이 병행되지 않으면 영어는 잘 하지만 뿌리를 잃어버려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문제아를 양산할 수도 있다.



코리안 디바이드(Korean Divide)


언어는 국력을 충실하게 반영한다. 영어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미국이 국제 비즈니스와 과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이버공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바다에 떠도는 정보의 80%가 영어로 돼 있고 국제기구의 85%가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전 세계 51개국이 영어를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사용하고 100여 개 국가에서 가르치고 있다. 각국 도메인 이름을 비롯한 전 세계 인터넷 주소는 현재 미 캘리포니아의 비영리 민간단체인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가 맡고 있다. 인터넷 자체가 60~70년대 미국방부의 지원 아래 대학 연구소 간 컴퓨터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에서 발전한 덕분이다. 영어가 중요한 것은 국경이 사라진 지구촌 시장에서 경쟁을 하는데 요구되는 정보의 대부분이 영어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1차 대전까지 세계 외교무대를 지배한 것은 불어였다. 유엔의 전신이라 할 국제연맹도 불어가 공용어였다. 불어권 국가의 감소, 서구의 중국어 열풍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고 있는 프랑스와 거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무섭게 부상하는 중국의 입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대학 부설 한국어교육기관은 4,5년 전부터 ‘한류’ 붐에 힘입어 한국어를 배우러 온 외국인들로 붐빈다. 대학의 국제학부와 국제대학원에는 한국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의 우수 인재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다국적 미녀들이 출연하여 한국에서 살면서 겪은 일화와 한국인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유창한 한국어로 들려주는 공중파 TV프로그램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비싼 비용과 시간을 들여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 눈에 인수위의 영어몰입 공교육 확대방침이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다. 영어의무교육에 들어가는 막대한 세금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IT 반도체 줄기세포 등 첨단과학 분야 연구를 지원하고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돌린다면 상황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전 국민이 영어에 매달리기 보다 우리의 강점을 더욱 키우고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는데 더 힘을 쏟자는 얘기다.



몇 년 뒤 구 소련국가나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과열된 나머지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소득 격차가 확대되어 ‘코리안 디바이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외신 기사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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