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시인께 드리는 ‘어린 편집자’의 짧은 추억 편지
김남조 시인께 드리는 ‘어린 편집자’의 짧은 추억 편지
  • 김다인
  • 승인 2013.06.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바람 부네
바람 가는 데 세상 끝까지
바람 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 연한 과육에
수태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 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 말지 하는 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 바람이었던 게야
바람이 의관 쓰고
나들이 온 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 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 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며
바람 따라 나도 갈래
바람 가는 데 멀리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인터뷰365 김다인】얼마만에 다시 찾아 옮겨 보는 시 구절인가. 김남조 시인의 시 ‘바람’이다.
이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오래 전 명동의 한 카페. 당시 시인들의 시 낭송회에 참석한 김남조 시인의 육성을 통해서였다.
호기롭고도 허허하던 어린 시절. 유난히 바람을 좋아하던 필자는 이 시를 듣고 마치 ‘존재 증명’을 얻은 것처럼 공감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을 잘못 외워 ‘바람의 각시나 될래’라고 한동안 읊고 다녔다.
김남조 시인과의 시를 통한 일별은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단행본 출판사 어린 편집자가 되었을 때 이어졌다. 당시 이미 우러러보기만 하는 높은 산이었던 시인의 전집을 내기 위해서였다.
시인에게 찾아 뵙겠다 전화를 걸면 시인은 차마 거절은 하지 못하고 3일 후 다시 걸라고 미뤘다. 그 답이 거절인 줄 알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서 딱 3일 후 그 시간에 다시 걸었다. 이러기를 세 번.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딱해서인지 시인은 마침내 자택 방문을 허락했다. 효창동이었다.
어린 편집자를 만난 시인은 의외로 다정다감했다. 얼음 땡 굳어있는 필자를 부드럽게 맞아주었다. 그제서야 빼꼼 둘러본 집안은 단정하고 깔끔하면서 바람이 노닐고 있었다.
어린 편집자가 가상했는지 안쓰러웠는지, 한 권만 출판을 승낙해줘도 감읍할 처지인 필자에게 시인은 세 권 전집을 허락했다. 이후 책 때문에 몇 번을 다시 뵈었고 시인은 당시 문학도였던 필자에게 이런저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시인과의 인연은 필자가 출판사를 그만둔 후 영화로 진로를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입에 달고 다니던 ‘바람의 각시나 될래’도 잊혀졌다. 하지만 문학 관련 뉴스에서 시인의 근황을 접할 때마다 그 옛날 효창동에서 만났던 시인 모습은 늘 선명했다. 시인의 정치적 혹은 시대적인 평가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온전히 개인적인 앵글이었다.
어제오늘 시인이 17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를 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동안 시인의 여러 활동에 대해 간간이 듣고 있었음에도 이 시집 발간 소식은 뭔가 다르게 다가왔다.
폐에 석회가 침착되는 질환을 앓고 있어 폐와 심장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시를 쓰는 시인이 고맙고 새로웠다. 그리고 어느덧 이런저런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필자 스스로가 난감해졌다. 불현듯 이제는 ‘바람의 색시’가 아니라 스스로 바람이 되어야겠다는 낯선 자각도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인은 기억할 리 없는 짧은 만남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는 ‘어린 편집자’가 멀리서나마 시인의 건승을 기원한다.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김다인

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김다인
김다인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