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여자, 밥짓는 여자> 신아연 작가(상)
<글쓰는 여자, 밥짓는 여자> 신아연 작가(상)
  • 김두호
  • 승인 201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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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수 아버지와의 눈물겨운 사연, 영화 ‘7번방의 선물’ 닮은 삶

【인터뷰365 김두호】언론계 중견 논객들의 칼럼 전문 사이트 ‘자유칼럼그룹’의 일원인 신아연 씨(51. 호주한국일보 편집위원)는 호주 시드니에 살면서 모국의 매체를 통해 조곤조곤, 가만가만 우리에게 말을 거는 ‘글쟁이’이자 ‘이야기쟁이’이다.
그의 표현대로 “누에고치가 실샘을 통해 끊임없이 실을 잣듯이” 자잘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그의 필력에 얹혀 탄력있는 실타래가 되어 솔솔 풀려 나온다.
그의 글은 맛깔스럽다. 쫄깃쫄깃 씹히는 식감이 감칠맛을 더한다. 그렇고 그런 사람 사는 이야기, 밋밋하고 무감각한 일상도 그의 애정어린 눈길, 세밀한 터치 한 번이면 입체감 있게 알록달록 채색되어 따스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저 나 먹자고 차린 조촐한 밥상, 장에서 빠진 숙변처럼 혼자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자신의 글에 ‘시치미’를 떼지만, 세간에서 그는 ‘쉽고 평범한 글이 자아내는 폭넓고 깊은 공감’의 작가, ‘자기 발견과 치유의 위로자’ ‘가슴 저미지만 결국 웃게 만드는’ 가슴 따뜻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천상 글쟁이인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과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좋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받고, 그것을 밑천 삼아 다시금 글로 되돌려주는 신아연 작가는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와 인터뷰하게 되면서 최근 1천만 관객이 몰렸던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주인공 꼬마가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그에게는 감방의 아버지와 눈물겨운 사연을 엮어 가는 영화 속 계집아이의 실존 같은 가슴 짠한 성장 일화가 있고, 그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남다른 삶의 내력이 있는 탓이다.
신아연 작가는 결혼 후 1992년, 한국과 사계(四季)가 정반대인 섬대륙 호주로 이주해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20년 넘게 모국의 온 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써왔다.
이민생활 이야기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함께 쓰는 부모들의 삶 <자식으로 산다는 것> 등을 펴낸 후 지난 3월, 네 번째 칼럼집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출간을 계기로 서울에 온 신아연 작가를 만났다.

한국인, 잘살면서 잘못 살고 있다

5년 만에 왔다는데 오랜만에 서울에서 느끼고 마주친 얘기가 궁금하다.
서울은 1년만 지나도 변해 있는 것이 많다. 거리가 갈수록 번화해지고 건축물은 도처에서 고층화, 대형화되고 있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초조한 듯, 허전한 듯 허둥댈 뿐, 안정감이나 만족감,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모르는 세 가지 중에 ‘자신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르는 것이 그 한 가지’ 라는 말이 생각났다. 물론 ‘잘 산다’는 의미를 물질에 국한시켜 하는 말이지만.
서민경제가 어렵고 중산층이 줄어들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고급 백화점에는 비싼 명품이 넘쳐난다. 물신주의, 과소비문화가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내가 사는 호주에서는 한국산 자동차가 판매율 1, 2위를 다투며 자국 브랜드를 앞지르고 있는데, 되레 한국에서는 벤츠를 비롯해서 외제차를 타는 분위기더라. 청담동 등 강남거리에선 특히 외국 유명 브랜드와 값비싼 외제차가 넘치던데, 부대끼며 사는 저소득층에게 적지않은 위화감을 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해 달라.
화장실을 가려고 들른 백화점에서 블라우스 하나에 80만원인 걸 보고 눈을 의심했다. 나는 사물의 본질적인 것을 따져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 순간 옷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옷이란 추위나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일차적이다. 거기에 마음을 끄는 색상, 약간의 장식 정도면 충분하다. 80만원 아니라 8만원이라도 비싸지만, 8-10만원 정도를 뺀 나머지 70만원은 ‘다른 무엇’을 위해 치르는 값이다.
그 ‘무엇’이 각자 ‘무엇’이든간에 그것의 본질은 자본주의의 거품이며 천박함이다.
양말 한 켤레를 단돈 천원이면 살 수 있지만 나는 구멍이 나면 꿰매 신는다. 제한된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밑창 떨어진 구두, 고장난 물건들도 가능한 고쳐 사용하는데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으로만 따지자면 차라리 새로 사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버리고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원 소모와 환경적 부담을 생각한다면 쓸 수 있는 데까지 쓰고 버리는 것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한다.
호주에는 비영리단체에서 운영하는 각종 재활용품 매장이 동네 곳곳에 다양한 규모로 들어서 있다. 쇼핑을 할 때 우선적으로 이곳부터 들른다. 기왕 만들어진 물건을 사면 그만큼 자원이 절약되고 생산하는 데 따른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한국에서도 매우 드물지만 작은 옷가게 수준의 재활용품점 ‘아름다운가게’가 눈에 띄어 반가웠다.

겉으로는 인간의 본질, 사람중심의 인본주의를 내세우지만 이면에서는 물질의 가치를 사람 위에 두는 탐욕과 물신주의로 인해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빈자와 부자는 사는 방법과 살아가는 사회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한국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이분화 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
이해가 간다. 물자 재활용 문제만 봐도 그렇다. 며칠 전 TV에서 선 후배간 교복 재활용 이슈를 다루면서 “있는 사람들은 관심없는 일이겠지만…”하는 식의 아나운서 멘트에 깜짝 놀랐다. 그걸 왜 가난한 학생들의 행사로 몰고 가나. 가뜩이나 예민한 나이의 어린 학생들에게. 사회가 물질적 부의 다과로 양분되고 양자간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런 식의 사고 방식 탓이다.
물건을 아끼고, 고쳐 쓰고, 다시 쓰고 하는 일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사이자 책임이다. 밥을 먹어도 식구들 몫을 남겨둬야 하듯이 다음 세대가 쓸 것을 남겨놔야 하지 않나. 부자든 빈자든 있으면 다 쓰고, 또 쓰고, 더 쓰고 뒷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몰염치에서 예외가 없다. 그럼에도 자원 절약 캠페인을 벌이면서 가진 자를 예외 층으로 생각하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가진 자가 더 문제 아닌가. 없는 사람은 쓰고 싶어도 못 쓰니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착한 가격’ ‘착한 점심’ ‘착한 고기’ 따위로 사물을 인격화하고, 물건을 칭할 때 “얘는 얼마고” “쟤는 어떻고” 하는 소리도 귀에 거슬린다. 당장 듣기엔 참신하고 새로운 느낌이 들지만 사람에게 붙여야할 인격적 호칭이 물건에 붙게 되니, 물건이 사람 대접받는 세상, 사람에게 부여할 인격적 지위를 떼어다가 상품에 붙여버리니 주객전도도 유만부동이지 그것이 물신숭배가 아니고 뭔가.
재미삼아 비트는 언어, 과장된 표현에는 그 시대, 그 세대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법 아닌가.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외국 명품 가방과 이른바 짝퉁을 섞어놓고 진품을 찾아내는 TV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바느질의 꼼꼼함이나 끝마무리, 부착 장식품 등에서 진품 식별이 가능할 것이라는 상식을 뒤엎고, 어깨에 메는 순간, 손에 드는 순간 ‘죽죽’ 올라가는 자존감, 자신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명품이라는 증거란다. 아무리 오락 프로그램이라 해도 듣기에 기가 막혔다. 오죽 못났으면 그깟 가방이 내 인격과 인간적 품위를 결정해 줄 것이라고 믿는단 말인가.

5년 만에 한국에 왔다는 신 작가는 한국에 팽배한 물신숭배 현상을 우려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왜래 문화의 무분별한 도입과 함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왔다. 주로 정치권이 시대를 바꾸는 변화의 분출구가 되었고, 시대가 바뀌면 집권 세력이 교체되고 사람도 바뀌면서 기존과 비교되는 새로운 것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을 거의 의무로 생각한다. 따라서 전통을 이어갈 만한 좋은 문화나 제도가 등장해도 세력이 바뀌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한 때의 유행으로 묻혀 버린다.
한국은 정말이지 ‘겁도 없이’ 바꾸고 없애고 새로 만든다. 더 편리하고 더 기능적이고 더 효율적이라는 경제잣대를, 그래서는 안되는 분야, 즉 정신, 문화, 예술, 사상, 학문의 영역에까지 들이댄다. 자멸과 공멸을 부를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하고 교만한 발상이다. 그 결과 무형의 정신적 가치들이 업신여겨지고 무참하게 짓밟히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나.
하물며 물질적 기반의 자원도 멀쩡한 것을 부숴서는 안 되거늘.

감옥과 집을 잇는 5살 꼬마 통신원

이제 글 잘 쓰는 당신의 얘기를 듣고 싶다. 글에서 읽히는 당신의 생각과 마음은 눈앞에 있는 스토리텔러의 이야기에 빠져들 듯이 흡인력과 공감력, 나아가 성찰과 통찰에 이르게 한다. 무엇보다 글이 편안하고 쉽고 따뜻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5,6살 때부터였다. 아버지가 무기수로 복역중이셨다. 생업에 등이 휘는 어머니, 학업으로 바쁜 언니, 오빠들을 대신해 내가 감옥과 집을 잇는 꼬마 통신원이 된 것이다. 아버지께 편지를 쓰기 위해 한글을 일찌감치 배웠고, 이렇게 시작된 옥중서신이 20년 지나서야 끝이 났다. 돌이켜 보면 다섯살 때부터 습작을 시작해 한 달에 3번꼴로 20년이나 지속했다. 부녀간에 주고받은 옥중서신이 책으로 몇 권 분량이었을 텐데, 편지를 모아두지 않은 것이 아쉽다.

언젠가 당신의 칼럼을 통해 선친(신광현 / 2007년 80세로 타계)께서 1968년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때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와 함께 무기형을 선고받고 장기수로 복역한 분인 것을 알았다. 제대로 사물을 분별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창작형태의 글을 썼다면 타고난 문학 재능이다.
열흘에 한 번꼴로 편지를 쓰려면 가족들의 일상사를 소상히 관찰하고 아주 소소한 것이라도 이야기 거리가 되도록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심난한 집안의 존재감 없는 막내 특유의 관점이 덧입혀졌을 것이다. 나의 글은 칼럼이면서도 단편 소설이나 콩트같은 문학 작품처럼 읽힌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아마도 어릴 적부터 습작 훈련이 된 때문인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푸른 수의 (囚衣), 아니면 비둘기색 작업복으로 찾아온다.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옥살이는 26살, 결혼하던 그 해 비로소 끝이 났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 역시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나름의 철학을 그 때 깨쳤다. 절망의 세월에도 나의 손목을 잡고 묵묵히 면회를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가 이감되는 전국의 교도소를 두루 찾아다니며 나는 성장했다. 나는 늘 외로웠고 두려웠고 불안했고 우울했다. 그 정서가 나의 글의 밑거름이다.

최근 신아연 작가가 출간한 칼럼집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에는 ‘김근태 고문을 생각하며’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무기수였던 아버지와 관련해 힘들었던 시기의 이야기가 있어서 그대로 옮겼다.

생전에 뵌 적은 없지만 이제 영면에 들어가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이 요즘 문득문득 생각납니다. 그분의 별세가 분노와 죄의식, 빚진 마음을 느끼게 한다는 세간의 말들에 나 또한 그러하다는 ‘말부조’는 못할망정 그러한 위무의 말이 제게는 마치 구슬프고 서러운 진혼곡처럼 들립니다.
더러 만났거나 아니 만났으되 만난 것과 진배없는 가엾고 서글픈 인연들이 김 고문의 죽음으로 인해 헐벗은 혼령처럼 너울대며 다시금 의식 안으로 걸어 들어온 탓입니다.
김 고문의 이름 앞에 떳떳이 놓인 ‘민주주의자’라는 수식어가 그분이 흘린 피의 대가인 양 선명하고 달라진 세상의 새 명패 같아 감격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굴비두름으로 엮여 고통받던 가족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추 30년 전쯤,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 씨를 비롯하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만났던 그 가족들 말입니다. 더러는 눈빛만큼은 형형했지만 국가로부터 무던히도 미움과 트집을 잡히며 가난하고 남루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남편과 자식, 형제의 기한 없는 옥살이에 기다림에는 이골이 났다면서도 그 고통의 분량만큼 희망 또한 옹골지게 키워가던 사람들 속에 저 또한 섞여 있었습니다.
전에 한번 글에 쓴 적이 있지만, 1968년 8월 통일혁명당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한 후 1988년 8월 올림픽 특사로 가석방된 제 선친의 가족 대표로 그때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제가 민가협 회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학시절 내내 꽁무니에 형사가 따라다니는데다 저의 동향에 대해 학과장에게는 보고까지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데모라도 있는 날은 특별감시에 들어가고 어떤 때는 집에까지 쫓아오니 저는 저대로 어둡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 날은 으레 어머니도 일하다말고 불려와 담당형사에게 문초를 당해야했습니다. 몇 달 간격으로 정해진 날짜에 찾아오는 공안담당 형사에게 “그런 일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 연결도 없어요.., 그러믄요…” 죄인 아닌 죄인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끝을 흐리시던 모습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그런 날은 덤터기를 써야 하니 더 속이 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절이 보다 살벌했을 때는 동네사람들 눈이 무서워 6개월에 한번씩 이사를 해야 했고 그러다보니 전학도 밥 먹듯 해 제 작은 언니의 경우는 초등학교를 예닐곱 번이나 옮겨다녔습니다.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어머니가 싫어하셨기 때문에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도 없었습니다.
양팔을 간격 있게 벌려 우뚝 선 채 버스의 동그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버지 고문당하던 모습이 생각나 몸서리가 쳐지는데 그 상태로 하도 맞아서 눈알이 빠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는 어머니 말씀도 새삼 떠오르고,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는 취조실 석탄난로를 엉겁결에 껴안아 얼굴에 중화상을 입었다는 서승씨, 남편의 사형선고에 충격을 받아 아내가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들도 거기서 들었습니다.
잔혹한 고문을 거친 장기수, 양심수의 가족들이라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 저는 가장 어린 회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슨 민가협의 ‘잔 다르크’는 아니었고 그 무렵 유난히 지쳐 하시던 어머니께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드릴 길이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아예 체념을 해야 하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자투리일망정 조금치라도 시국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중략)
아버지와 같은 사건으로 복역 중이시던 신영복 선생의 글과 그림을 옥중 선물로 받아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시작된 아버지의 옥살이가 스물여섯 결혼하던 그해에 끝이 났으니 돌이켜보면 참말로 ‘징한’ 세월이었습니다. (후략)

타계한 김근태 고문으로 인해 민가협 시절을 회상한 그의 글은 “김근태 고문의 명복을 빕니다”로 마무리된다. 그의 글에는 아버지로 인해 암울하고 힘들었던 성장기의 서러운 고백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지금 말로 하면 사상범이자 양심수이지만, 그때 말로는 ‘빨갱이’인 아버지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마다 “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냐, 도둑질을 했냐, 니들 아버지 징역살이는 남들하고는 다르다. 그러니 기죽을 것 하나도 없다”는 고모들의 다소 ‘극성스런’ 방패막이로 초등학교 1학년 계집아이의 ‘서슬퍼런’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일화도 들어있다.

감방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며 일찍이 글쓰기에 눈을 뜬 신 작가는 다섯 살 때부터 습작을 했다.


큰 바다였던 어머니의 생애

긴 세월을 두고 무기수 남편의 옥바라지와 남편을 대신 해 가족을 뒷바라지하신 어머니(장복환 여사 / 82 )는 어떤 분인가?
우리 어머니는 바다같은 분이다. 일생 끊임없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원망도, 극복도, 체념도, 의미부여의 몸짓도 없이, 그저 담담히 생애의 거친 물줄기를 한데 안으며 큰 바다가 되신 분이다. 아버지 가석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의 1남 3녀 중 유일한 아들, 내게는 하나뿐인 오빠가 45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아들의 유해를 봉안당에 두고 온 다음날도 어머니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버지의 아침상을 차리더라.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아버지는 치매에 걸렸고 다시 어머니의 5년간 치매 간병이 시작됐다. 20년 옥바라지로도 모자라 ‘치매 바라지’ 5년이 덧붙은 것이다.
어머니는 전생애를 걸쳐 ‘종합불행세트’를 선물처럼 받은 분이지만 천성이 명랑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시다. 나도 ‘한 유머’하는 편인데 어머니한테서 온 것 같다. 끊임없이 닥치는 불행 중에도 작은 행복을 놓치는 법이 없는 어머니의 삶의 경영력은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일상을 평온하고 재미있고 즐겁게 영위하신다. 82세 고령에도 집안 살림을 새댁 못지않게 반질반질 윤나게 하시고 매일 3시간씩 가부좌를 튼 채 일점 흐트림없는 자세로 천 알의 염주를 돌리시며 정진한다. 낮잠은커녕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방바닥에 몸 한번 누이는 법 없이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신다.
이번에 서울에 나와 어머니께 내가 물었다. 엄마는 언제 눈물이 나냐고. “좋을 때, 감격스러울 때.”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슬플 때는?” “ 눈물이 안나.”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슬픔에는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도 큰 일을 겪다 보니 아마도 다른 사람과는 정서 구조가 달라진 모양이다. 젊었을 때는 문학 전집을 읽으면서, 연세 드셔서는 연속극을 보실 때 눈물이 난다면서도 정작 소설보다 더 소설같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당신 자신의 삶에는 감각없이 무덤덤해지신 것일까. 하기사 그러지 않았다면 일생 풍파가 끊이지 않는 모진 세월을 어찌 견뎌오실 수 있었을까.
친정의 아파트 현관문 번호는 아버지의 수인번호다. 연세가 더 들어도, 혹여 치매가 온대도 그 번호는 안 잊어버릴 자신이 있나 보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아버지의 수인번호만 남았다. (계속)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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