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여, 가슴을 펴라.
중년이여, 가슴을 펴라.
  • 김세원
  • 승인 200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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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경험과,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함이 있다. / 김세원



[인터뷰365 김세원] 양력설을 보내고 음력설이 다가오는 계절엔 꼼짝없이 또 한 살을 먹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실제 연령과 생체 연령이 다르고 지성 연령과 감성 연령도 제각각이듯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철떡 같이 믿었던 나였다.



오버그라운드의 비애



그런데 유럽에서 살 때는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이가 한국에 오니 무슨 일을 하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어느 모임이건 통성명을 하고 나면 학번을 들먹이기 시작하고 시장에서 물건 값을 물어보는 데도 점원들이 ‘언니’냐 ‘어머니’냐를 가리기 위해 손님의 나이를 가늠하기 바쁘다. 물 좋다는 카페나 디스코텍에서는 ‘미성년자 입장 불가’보다 더 무서운 ‘(물 흐리는) 오버그라운드 입장 불허’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참여정부가 집권하는 동안은 386세대에 끼지 못한다는 (이미 40이 넘었다는) 이유 하나로 무용지물로 전락한 것 같은 기분까지 맛봐야 했다. 게다가 삼팔선(38세 퇴직),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 까지 일하면 도둑), 육이오(62세까지 일하면 오적)같은 나이와 관련된 유행어가 고실업과 경기침체 물살을 타고 거의 매일 미디어에 오르내리지를 않나. 젊고 육감적인 여성들이 광고부터 드라마까지 온통 안방극장을 점령하고 있으니 나처럼 젊지도 않고 섹시하지도 않은 여성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더욱 심할 수 밖에.



정부의 정년 연장 방침



정부는 2008년부터 60세, 2033년에 가서는 65세를 ‘정년의무화’ 로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정년 연장이 이슈가 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저 출산 고령화 추세에서는 고령자의 빈곤화와 연금 재정 악화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는 조기 퇴직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란다.


이스라엘과 일본도 정년을 연장했다지만 이에 대한 경제단체와 노동계 언론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더 줄어들 테고 기업경쟁력이 떨어지며 이미 ‘삼팔선’ ‘사오정’이 유행하는 마당에 정년 연장을 법제화한대서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지켜질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년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나이에 의한 차별을 인정한다는 애기다. 일할 능력과 의지가 충분한 데도 일정 나이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해야 한다면 인종이나 성에 의한 차별 못지않은 인권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가는 곳마다 보이지 않는 나이 장벽이 둘러쳐져 있는 우리 나라는 대표적인 인권 침해국이다.



미국에는 정년이 없다



구조조정의 발상지이자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정작 고령자의 일할 권리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이미 68년 정년제를 폐지했으며 86년에는 취업 해고 등에서 70세 이하 차별 금지를 규정했던 연령차별 금지법마저 개정해 아예 연령 상한을 없애버렸다.



정년제 폐지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직장인들의 직업전환을 도와주는 각종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과 평생교육이 일반화된 것이다. 덕분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처럼 중년의 가정주부가 이혼한 뒤 법대에 들어가 변호사나 정치가가 되는가하면 전직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예술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생 이모작’ 석세스 스토리가 만발하고 있다. 월마트같은 대형할인매장의 캐쉬어나 맥도날드의 웨이터, 비행기 승무원같은 서비스 업종에도 장년층과 노인층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중년의 묘미



며칠 전 한 온라인 사이트에서 읽었던 글이 가슴을 두드린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늙은 숫사자 왕초랑 영토를 뺏으려는 젊고 패기만만한 숫 사자 무리가 아프리카 세렌게티 평원에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보았다. 저쪽은 셋이고 이쪽은 하나다. 게다가 이쪽은 늙었다. 그런데도 바늘 끝 같은 긴장된 시간이 지나고 결국 젊은 숫사자 무리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간다. 중년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얼굴에 난 수많은 상처와 거친 갈기 때문일까? 늙은 숫사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니까. 썩은 고기나 주워 먹으며 연명하거나 하이에나 밥이 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러니 눈빛이 다를 밖에. 그 서슬 퍼런 비장함에 젊은 숫사자들이 줄행랑친 거다."



중년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더 이상의 유예는 없다. 어느새 거꾸로 세워진 삶의 모래시계에서는 쉴 사이 없이 모래가 흘러내린다. 인생의 성패가 갈려지는 시점인데 감정 과잉을 즐기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거나 삶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매 순간 순간이 아쉽고 소중한데 쾌락과 덧없는 열정을 위해 삶을 방기하거나 파랑새를 쫓느라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있겠는가.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바로 현실에 뛰어들 수 있는게 중년이다.



중년만이 가질 수 있는 비장함에 부산한 청춘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통찰력과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난 노련미가 어우러진다면 중년의 생산성도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경제 공식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중년을 구조조정이란 체에 넣어 솎아내고 정년이란 올가미를 씌워 일할 기회를 빼앗을 텐가.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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