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현찬의 그때 그 칼럼] 명배우 김승호의 눈물
[호현찬의 그때 그 칼럼] 명배우 김승호의 눈물
  • 호현찬
  • 승인 201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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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현찬의 그때 그 칼럼>을 연재하며
호현찬 원로 영화평론가는 전문화 된 영화저널리즘과 영화평단의 1세대입니다. 여기에 그의 특별한 이력에는 영화 기획 및 제작, 영화행정 분야에서 활동한 업적들이 추가됩니다. 인터뷰365는 호현찬 평론가가 1960∼1990년대에 발표한 명칼럼을 모아 독점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인터뷰365 호현찬】4.19 학생혁명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 필자가 몸담고 있던 D일보 문화부에 떨리는 목소리로 김승호 씨가 황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성난 군중들이 청진동에 있는 그의 집을 습격, 불을 질렀고 그는 대명천지에 몸둘 바를 모를 지경에 다다랐다는 사연이다.


그 얼마전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자유당 정권의 집회에 끌려가 연설한 것이 빌미였다. 으석한 다방 한구석에서 만난 김승호 씨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배우생활을 은퇴한다고 선언하였다. 내로라하는 많은 문화예술인들도 권력을 등에 업은 연예계의 폭력대부 임모씨(4.19후 사형)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얼마전에는 배우 김희갑이 뭇매를 맞아 갈비뼈기 부러진 사건이 있을 무렵이다. 정상의 인기를 누리는 배우였기 때문에 군중들은 유독 그를 향해 돌을 던졌고 그는 인기의 대가로 한 몸에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자는 그의 은막 은퇴 기사를 논평없이 짤막하게 보도했다. <시집 가는날> <마부> <박서방> 등에서 서민의 얼굴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건만 대중들은 단숨에 등을 돌렸다. 기자가 할 수 있는 말은 ‘대중들이 김승호를 사랑했고 또 요구한다면 언젠가 은막에 돌아올 날이 있을지 모른다’는 한마디였다.

한국적인 아버지상을 표현해낸 김승호의 <박서방>(1960)

그리고는 수년 동안 김승호는 스크린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가 수년 후에 컴백하였다. 그의 익살맞은 웃음과 서민적인 애환의 표정에 대중들은 다시 갈채를 보냈다. 한국영화의 큰 별이자 아시아의 스타로 이름을 새긴 김승호 씨도 역사의 갈림길에서 이같은 치욕스러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영화스타에게 사회는 상반된 두 태도를 보인다. 이단시하거나 격찬하거나간에 배우를 특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배우의 예술>의 저자 앙드레 뷔리에는 그렇게 말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의 배우에 대한 악평은 배우의 예술의 본성과 관계없는 이유에서 종종 나타난다.


스타는 스크린에서 우선 평가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김승호 씨의 경우도 거와 비슷하다. 그러나 배우라하더라도 역사적 사회적 진실과 외면하고 살 수 없다는 이치를 김승호 씨의 눈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화의 해를 기념하는 11월의 인물로 김승호 씨가 선정되었다. 한국영화사에 큰 이정표를 세운 명배우로서 우리들이 다시 추억하고 싶은 큰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한국적인 체취가 물씬나는 보통 한국인의 표정과 심성을 잘 표현해서 대중들의 공감을 받은 데 있을 것이다. <1986년 스포츠서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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