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 어떻게 달라져 왔나 (하)
[기획]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 어떻게 달라져 왔나 (하)
  • 김우성
  • 승인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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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시스템의 도입, 각개격파 감독 데뷔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PD시스템의 도입, 각개격파 감독 데뷔”


1990년 이후 국내 영화계에는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고 PD시스템이 도입된다. PD는 자본주의 입맛에 맞는 시나리오와 신진 연출가를 발굴하기에 힘을 쓴다. 그 결과 기왕의 도제시스템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능력에 따라 감독으로 데뷔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과거 한국영화에서 ‘제작’분야 스텝이라고 하면, 주로 재정 관련된 실무나 현장진행을 하는 정도로 활동반경이 한정됐다. 이에 촬영장에는 제작부장으로 통칭되던 스텝이 배치되어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 황기성(황기성사단), 이태원(태흥영화사) 등의 제작자들이 나서 프로듀서 시스템을 시도한다. 한국영화 최초의 프로듀서라 일컬어지는 그들은 기존의 감독 중심 제작방식을 지양하고, 직접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주도했다. 기획된 내용에 따라 예산을 책정하고, 시나리오를 개발했으며, 각 분야의 최적임자를 섭외했다. 그러한 시스템 하에서는 감독의 선정 또한 프로듀서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얼마나 효율적인 팀을 조직해서 얼마나 합리적으로 운영하는가, 그래서 약속된 결과물을 얼마나 온전히 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프로듀서의 목표이자 고민이었다. 프로듀서들은 자신이 원하는(또는 예상하는) 그림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아 나서게 됐고 현장 경험이 일천한 인재들이 이때부터 중용되기 시작한다.

이후 연출자로서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단편영화가 각광을 받았다. 프로듀서로서는 소문과 조언에 귀 기울이기보다 10~20분량의 가시적인 결과물을 확인하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비록 만듦새는 떨어질지언정, 연출자의 재능과 철학을 사전에 파악하기에 단편영화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시나리오도 하나의 평가기준이 됐다. 영상을 만들어야 할 사람이 그 뼈대가 되는 이야기를 스스로 창조해내는 것만큼 프로듀서에게 매력적인 상황이 없었다. ‘재미나고 기발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충무로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시스템은 결정적으로 영화산업구조의 지각변동과 맞물리면서 도제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계에는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삼성 영상사업단의 자본과 배급력이 집결된 기획 프로젝트 <쉬리>(1998)는 도제시스템을 논함에 있어 여러모로 상징적인 작품이다. 우선 강제규 감독부터가 충무로 도제시스템의 혜택에서 멀찌감치 비껴가있는 인물이었다. 중앙대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졸업 후 곧장 영화현장에 뛰어들지만 얼마 안가 도제시스템의 한계를 느끼고 조감독 생활을 접는다. 이후 홍보영화, CF, TV드라마 등에서 대본을 쓰다가 다시 충무로에 돌아와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1990)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게임이 법칙>(1994) 등 화제작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때를 기다린다. 결국 자신이 쓴 시나리오 <은행나무 침대>(1996)로 메가폰을 잡았고, 몇 년 후 <쉬리>를 내놓으며 충격에 가까운 흥행스코어를 기록했다.

<쉬리>가 써내려가는 역사를 똑똑히 지켜본 대기업 자본은 이전의 단순투자를 넘어 직접제작에 뛰어들고 배급망을 잠식해갔다. 도무지 깨질 것 같지 않던 <쉬리>의 관객 수가 대기업 자본을 등에 업은 흥행작들에 의해 속속 경신되면서 영화현장에는 더욱더 상업적 논리가 힘을 얻어갔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감독이 필요했고 굳이 ‘경험’이 전제되지는 않았다.

여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현장에서 이뤄지던 영화교육의 상당 부분이 학교로 이관됐다. 한때 UIP직배로 신음하며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한국영화가 기적처럼 부활해 세계 유례없는 점유율을 기록하자, 영화의 산업적 가능성에 대학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손가락에 꼽히던 영화관련 학과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불과 10여 년 만에 50개교 이상으로 폭증했다. 각 대학들은 우수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현장에 버금가는 양질의 기자재를 경쟁적으로 갖추었으며, 기성영화인들을 강사로 적극 채용해 실무교육에도 힘썼다.




국가에서는 침체된 한국영화를 중흥할 목적으로 80년대 중반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설립하고, 90년대 중반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상원을 개원했다. 두 교육기관에서 그동안 배출된 감독의 면면만으로도 국가의 영화인력 양성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비슷한 무렵,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던 유학생들의 귀국도 줄을 이었다. 이광모, 홍상수, 곽경택, 장윤현 등이 그들이다.

감독지망생들은 더 이상 현장에 매달리지 않았다. 조감독 경험이 꿈을 이루는 과정일 수는 있지만, 꿈을 이뤄주는 절대적 방법은 아님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여 습작을 만들거나 꾸준히 글을 쓰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어갔는데 그 밑바탕에는 미디어의 발전이 자리하고 있다. 단편영화 한 편을 제작하려 해도 8mm 필름카메라나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를 어렵사리 구해서 고군분투해야 했던 옛날과 달리, 이른바 ‘칼라TV 키드’들은 손쉽게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할 수 있으며, 능수능란하게 효과를 적용할 수 있었다. 좋은 예로 영화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 2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친구들과 함께 만든 장편독립영화 <용서 받지 못한자>(2005)가 있다.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윤종빈 감독은 얼마 후 <비스티 보이즈>(2005)를 연출하며 장편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제2의 윤종빈을 꿈꾸는 이들은 지금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으로 영화서적을 읽고, 영화를 보며, 시나리오를 쓰는 시대에 살고 있다. HD급 촬영과 편집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도제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의 조감독들이 무난히 데뷔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박찬욱 감독의 경우 자신의 조감독이던 이경미 감독의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의 사례는 현재 영화계 전체로 봤을 때 극히 드문 경우이며, ‘국내 탑클래스 감독의 조감독’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의 재능이 원체 뛰어났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이 가까운 미래에는 또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으나, 미디어환경의 추이를 잘 살핀다면 앞으로의 향방도 어림짐작 가능할 것이다. 현재로서 가장 중요한 건,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는 당사자가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왜 만들 것인가’ 스스로 따져보는 일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최근 5년간 배창호 감독의 행보를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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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 기자 ddoring2@interview36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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