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 어떻게 달라져 왔나 (상)
[기획]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 어떻게 달라져 왔나 (상)
  • 김우성
  • 승인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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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 시스템으로 형성된 감독의 계보 / 김우성



【인터뷰365 김우성】“도제 시스템으로 형성된 감독의 계보”


영화감독은 하늘이 점지해 준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디렉터스 체어에 앉기까지의 과정이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막상 메가폰을 잡고 수백여 명의 제작진을 지휘한다는 게 보통의 통솔력과 배짱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생겨난 말일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 순발력과, 때로 시대를 기다릴 줄 아는 집념도 요구된다. 예나 지금이나 고행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학교와 촬영장, 나아가 영화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삶의 현장 곳곳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영화감독의 꿈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중이다.


영화계 환경변화에 따라 감독데뷔 과정도 시대마다 모습을 달리해왔다. 1990년대 이전까지 영화계는 철저하게 도제시스템으로 운영되어왔다. 감독 밑에 제1, 제2, 제3조감독이 있고 이들은 현장에서 몸으로 감독 수업을 받은 후 때가 이르면 감독으로 데뷔했다.

당시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이 양성되는 과정은 중세 유럽의 길드가입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일직종 수공업자들끼리 결성한 길드는 장인匠人-도제徒弟 간 엄격한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했다. 장인은 ‘권력’ ‘권위’의 다른 이름이었고, 나이 어린 견습공들은 스승 밑에서 오랜 기간 숙식을 하며 험난한 수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물품을 만들어내게 되었을 때 그들 밑에는 또 다른 견습공들이 줄을 이었다.

90년대 이전까지 도제시스템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이었다. 감독이 장인이라면 조감독(연출부)은 도제였다. 조감독들 사이에도 제1조감독, 제2조감독, 제3, 제4... 하는 식으로 경력에 따른 서열이 존재했다. 이들은 현장의 잡무부터 배우며 몸으로 현장 시스템을 익혔다. 가장 기초적인 현장용어에서부터 장비 운용, 연기 등을 어깨 너머로 익혀나갔다. 그렇게 작품 수가 늘어가고 서열이 오르면 좀 더 전문적인 일이 주어졌다.

특정 감독의 조감독이 되면 한 작품이 끝났다고 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게 아니었다. 감독이 되어 독립하지 않는 이상, 같은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 그대로 팀을 이루는 방식이었다. 길게는 10년 가까이 한 감독 밑에서 일하는 경우도 허다했기에 충무로 도제시스템을 밟아간 이들은 유형무형으로 스승의 영향이 남아있기 마련이었다. 같은 이유로 흥행감독 밑에서 일하던 조감독들은 통상 데뷔하기가 수월했고, 대를 이어 계보를 형성한 예가 더러 있다.



70~80년대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인 이장호 감독을 예로 들어 보자. 이장호는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대작을 쉼 없이 쏟아내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견인했던 신상옥 감독 수제자로 8년간이나 기량을 갈고 닦았다. 당초 배우가 되고자 신필름을 찾아갔던 이장호는 신상옥을 만나면서부터 인생의 항로가 달라졌다. 자신이 신상옥 감독 밑에서 감독 수업을 했듯이 이장호는 배창호, 장선우, 신승수 등을 조감독으로 두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직작생활을 하던 배창호는 대학시절 선배 최인호를 통해 이장호 감독을 만났다. 이후 그는 현대종합상사를 그만두고 당시 활동정지로 어려움을 겪던 이 감독과 동고동락했고 이장호의 재기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제1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선우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1) 조감독으로 영화일을 시작, <일송정 푸른솔은>(1983)에서는 기획을, <바보선언>(1984) <과부춤>(1984)에서 다시 조감독을 하며 이장호 감독의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제2조감독이었던 신승수는 배창호의 <적도의 꽃>(1983)과 이장호의 <무릎과 무릎 사이>(1984)에서 조감독을 한 후 감독으로 데뷔했다. 신승수가 떠난 배창호의 밑에는 이명세와 곽지균이 조감독으로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장호의 밑에서 영화를 시작한 이명세는 <고래사냥>(1984)부터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까지 배창호의 최전성기를 함께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배창호는 이명세의 감독 데뷔작인 <개그맨>(1989)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곽지균은 <깊고 푸른 밤>(198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의 조감독을 거쳐 <겨울나그네>(1986)로 감독 데뷔를 했다.

이밖에 이명세 감독 밑에서 일했던 구임서 조감독과 김국형 조감독은 각각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1995)와 <구멍>(1999)으로 데뷔했고, 곽지균 감독 밑에서 일했던 장현수 조감독은 곽지균이 시나리오를 쓴 <걸어서 하늘까지>(1992)로 데뷔했다.

이들이 ‘한 뿌리’라는 흔적은 캐스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 주연이었던 안성기, 김보연, 김희라가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서 나란히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 주연이었던 안성기, 이보희는 신승수 감독의 <달빛 사냥꾼>(1987)에서 재차 호흡을 맞추고 있다. 곽지균 감독의 <젊은 날의 초상>(1990)에 나왔던 배종옥, 정보석은 장현수 감독의 <걸어서 하늘까지>에서 그대로 주연을 맡았다.




도제 시스템을 논함에 있어 임권택 감독과 박광수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몇 해 전 <장군의 아들4>를 제작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김영빈 감독을 비롯해 김의석, 김홍준, 임상수, 김대승 등이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임권택 감독 본인 또한 근래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정창화 감독 밑에서 영화를 처음 배우며 액션비법을 전수받았다.

이현승, 여균동, 김성수, 이창동, 허진호, 박흥식(‘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감독으로, ‘역전의 명수’ 박흥식 감독과 동명이인)으로 이어지는 박광수 감독 계보를 살펴보면 유난히 감각적이고 개성 넘치는 필모그라피가 눈에 띈다. 그들이 동일 선상에 있다는 방증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박광수 감독은 데뷔 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에서 잠시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강우석 감독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강우석은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 시리즈에서 조감독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는 유독 러브신을 찍지 못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훗날 만들어진 그의 영화에는 키스신조차 드물다. 당시 제작자들이 강우석 조감독에게 기대했던 건 당연히 정인엽의 흔적. 아직까지도 그가 가장 자신 없어 하는 부분으로, 흥행감독 밑에 있어서 데뷔가 더 어려워진 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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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성 기자 ddoring2@interview365.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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