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부터 강동원까지-대한민국 꽃미남의 계보
신성일부터 강동원까지-대한민국 꽃미남의 계보
  • 김두호
  • 승인 200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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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연예인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미남 미녀들의 경연장이다. 얼굴이 잘 생기고 늘씬하면 본인이 우선 연예인을 꿈꾸지 않아도 주위에서 연예인이 되기를 권한다. 1980년대 컬러 TV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전국의 미남 미녀들은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은막으로 몰려 들었다.



그들은 영화감독들이 직접 찾아내거나 추천을 통해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데뷔시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따금 거액의 상금이나 경품을 걸고 공개 모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영화 불세출의 톱스타, 신성일

영화배우 중 미남 배우로 대표적인 인물은 신성일이다. 연간 200여편의 영화가 쏟아져 나오던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에 불세출의 톱스타로 인기를 누린 신성일도 신필름의 신인 공모 창구로 배우가 됐다. 신성일이 필자에게 증언한 그 때 신인배우 공모 창구의 풍경을 잠시 소개해 보자.



시험 당일 신성일은 1차 면접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광화문 네거리의 국제극장 뒤에 있던 신필름으로 갔다. 그런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인데도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응시생이 영화사 문 앞에서 부터 꼬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줄을 서 있었다. 포기를 하고 부근에 있던 건물 추녀밑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만 쉬고 있을 때 구두닦이소년이 낡은 구두짝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그의 앞에 나타나 따라오라고 말했다.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서자 키가 크고 바싹 마른 몸에 눈매가 서글서글한 남자가 대뜸 ‘넌 뭐하러 왔어?’라고 물었다. 배우 응시생임을 확인한 그는 메모를 적은 종이를 건네주며 바로 신상옥 감독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얼굴이 특별히 눈에 띌 만큼 미남인 덕분에 줄을 서지 않고 신상옥 감독 앞으로 직행해 면접을 보게 된 것인데 군계일학을 찍어낸 사람이 당시 조감독이었던 이형표 감독이었다. 최은희와 함께 심사를 하던 신감독도 첫눈에 당대의 미남을 알아 본 것 같다. 다음날 신문에는 신필름이 응시자 5천8백15명 중 신성일을 신인배우로 선발했다며 신상을 소개했다. 물론 그때의 이름은 강신영이었고 신필름이 나중에 ‘뉴 페이스 넘버 원’을 한자로 바꾸어 신성일이란 예명을 달아주었다.



한때 정치를 하면서부터 성을 되살려 강신성일로 부르게 된 신성일은 이목구비가 남자답고 반듯하게 생겼고 키와 체격도 표준형 미남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지금도 하루 두시간 이상의 운동 습관을 철저하게 지킨다. 피부가 나이를 속일 수는 없으나 건강은 젊은 시절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데뷔해 2005년 ‘태풍’까지 541편의 출연 기록을 남겼다. 영화배우 중 최다 출연 기록이다.


꽃미남의 원조, 남궁원

출연 활동이나 인기도에 관계없이 영화배우 사상 가장 잘 생긴 미남을 꼽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남궁원을 내세우기도 한다. 신성일이 한국형 미남자의 표준이라면 남궁원은 서구형 미남자로 사랑을 받았다.


그들 외에도 ‘은막의 신사’로 통한 김진규와 윤일봉, 곱슬머리의 섹시한 미남자 최무룡도 미남자 축에서 제외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또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을 통해 이도령 역으로 가장 어울린 남자로 한시절 여성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이민의 이름도 올려야 한다. 그는 1990년에 생겨난 신조어 ‘꽃미남 연예인’의 원조로 볼 수 있을 만큼 깔끔하게 잘 생긴 미남이었다.



수많은 작품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주연급 스타의 인기를 풍미한 김진규 최무룡은 모두 고인이 되었고 이민은 일찍 은퇴했지만 아직도 건강한 모습으로 서울에 살고 있다. 지난해 필자와 만난 그는 한일 합작영화 한편을 연출할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이제 ‘정말 잘생겼다’는 말을 평생 듣고 산 남궁원으로 이야기를 옮겨 보자. 그는 대학생(한양대 화공학과) 때인 22살 되던 해 노필감독에게 발견되어 젊은 층의 우상이었던 이빈화의 상대역을 맡아 화려하게 은막으로 입성했다.



180cm의 늘씬한 키에 부드러우면서 남성미 넘치는 외모로 액션영화든 애정 멜로영화 또는 사극영화든 작품을 가리지 않고 주어진 배역마다 빛을 발하는 전방위 연기자의 면모를 유지했다. 장일호감독의 <국제간첩>은 한국의 제임스 본드라는 그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이 ‘국제적인 외모와 연기 센스를 가진 유일한 배우’로 극찬하면서 일찍 그를 신필름 전속으로 불러 들였다. <내시> <전쟁과 인간> <다정다한> <피막>등 50여년간 3백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남궁원은 본명이 홍경일로 올해 74살이지만 건장한 체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잘 생긴 얼굴 만큼이나 좋은 성격과 인품으로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고 산다.



이를테면 ‘꽃미남’급의 배우로는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아로운역으로 떠들썩하게 화제를 모았던 김운하, 신성일이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발굴한 신영일, 탤런트로도 활동해온 최윤석 이영하 등이 있고 신영균, 신일룡, 윤양하 등도 남성미를 느끼게 하는 미남으로 인기를 누린 배우들이다.


80년대의 조각품, 임성민의 등장

미남배우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배우는 또 있다. 김호선 감독이 멕시코 로케이션으로 연출한 ‘애니깽’을 마지막으로 타계한 임성민이다. 어쩌면 남궁원 이후 최고의 미남배우로 꼽히기도 했던 임성민은 한창 활동할 젊은 나이에 병으로 떠났으나 스크린에 남긴 그의 잘 생긴 남성미는 여전히 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950년생인 임성민은 대학에서 체육학(건국대)을 전공했으나 워낙 출중한 외모로 인해 일찍부터 주변사람들이 연예인이 되기를 권유했다. 그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가 1977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가 되었지만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영화감독들이 그를 바쁘게 불러냈다. <달빛 멜로디>와 <애란>의 이황림, <무릎과 무릎사이>의 이장호, <탄드라의 불>의 김성수, <장사의 꿈>의 신승수, <됴화>의 유지형 감독 등이 임성민을 장미희 강수연 이보희 등의 상대역으로 내세웠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작품들이 상업성 애정영화들이었다. 그의 멋진 미남의 매력은 예술을 위한 좋은 연기자의 틀을 제대로 갖출 여유도 없이 인기 여배우들의 ‘몸 받이 배역’의 선에서 진일보 하지 못하고 사라진 점이다.



180cm의 키에 77kg의 체격은 언제나 듬직하게 보였고 선한 눈빛과 남성적이면서 부드러운 인상이 제2의 남궁원을 연상케 한 임성민. 그는 언젠가 필자와 차 한 잔을 나누며 아주 멀쩡한 정신으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냥 어디론가 멀리 멀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일과 사람들이 모두 싫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래요. 큰 욕심을 부리며 살지는 않지만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의 목소리는 매우 피곤해 있었다. 아무 곳으로나 떠나고 싶을 만큼의 고민들이 어떤 것들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연기자가 되지 않았을 때 그에게는 아주 예쁜 부인과 어린 딸이 있었다. 그러나 연기자가 된 뒤 모두를 잃었다. 데뷔하면서 미혼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 불행을 불렀다. 그 일은 그 무렵 저만치 잊혀진 과거였지만 그러나 그를 만나면 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따뜻하게 다가와도 그 한 켠에는 그늘이 보였다.



39살 임성민이 하늘로 간 날은 1995년 8월 22일이다. 그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짧지만 이 세상 즐거운 소풍을 끝내고 장미희와 고생고생하며 찍은 ‘애니깽’의 작업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생전의 소망대로 어디론가로 멀리 혼자서 떠났다.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김주승

임성민 이후, 미남의 계보를 잇는 배우는 단연 꽃미남 김주승이었다. 1983년 MBC 공채 16기로 데뷔한 김주승은 KBS의 <첫사랑> <야망의 세월> 등을 통해 8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연기자로 등장했다. 그는 드라마에서 황신혜와 자주 호흡을 나누며 가장 아름다운 ‘선남선녀 커플’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영화보다는 TV에서 주로 활동한 탓에 중년 여성시청자들의 호감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 사채업계의 큰손으로 알려졌던 장영자씨의 사위가 되면서 연기활동보다 사업가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결혼 이후, ‘멜로 킹’ 김주승의 활동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가끔씩 <형제의 강> <덕이>등의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김주승은 예전같은 인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방송보다는 사업가로써의 시간을 더 많이 가졌고 한때 방송 외주 프로덕션을 운영하기도 했었다.



작년 1월, 김주승은 아내와 이혼을 하고 다시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의 복귀에 행운을 주지 않았다. "웃음 뒤 진한 여운이 남는 그런 연기를 펼쳐 보이겠다." 라던 그의 각오가 식기도 전, 80년대를 대표하는 꽃미남 김주승은 지난해 지병인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꽃미남 임성민처럼 김주승도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장동건,강동원,조인성 그리고.

꽃미남이라는 말보다 그냥 미남자로 지금 이시대의 젊은 주역을 꼽는다면 아마도 장동건 강동원 조인성의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할 것 같다. 장동건은 이목구비가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남자다운 매력을 풍긴다면 강동원은 섬세한 미색을 간직한 귀여운티의 꽃미남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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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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